그냥 아름다울 뿐인, 내게는 아무 의미도 없을 여자애가 말했다.
"너랑 사귀어도 되지만 조건이 세 개 있어.
첫째, 학교 끝날 때까지 서로 말 걸지 말 것.
둘째, 연락은 되도록 짧게 할 것.
마지막으로 셋째 날 정말로 좋아하지 말 것. 지킬 수 있어?"
당시 나는 모르는게 몇 가지 있었다.
일상적인 것으로는 가짜로 고백하는 올바른 방법이라든지,
철학적인 것으로는 죽음이라든지, 시적인 것으로는 연애 감정이라든지.
그런데 모르는 게 하나 더 늘었다. 나 자신에 관한 것이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모르는 여자애에게 이렇게 대답했다. "그래"라고.

그 애 앞에 있으면 저절로 마음이 기뻤다. 그게 틀림없는 내 감정이었다.
유사 연애 관계라 해도 다를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내마음이 기쁜 것. 내가 히노를 좋아하는 것. 다를 게 없다.
이 마음만 있으면 히노가 나를 좋아해주지 않아도 된다. - P126

히노는 밤에 잠이 들면 그날 있었던 일을 모두 잊어버린다. 하루하루를 쌓아 올릴 수 없다. 대체 얼마나 절망스러울까. 얼마나 괴로울까.
자기만 시간의 흐름에 따라가지 못하는 데다 미래까지빼앗겼다.
그렇다면 내일의 히노가 조금이라도 일상을 즐겁게 느낄 수 있도록, 히노가 쓰는 일기를 즐거운 추억으로 가득채워주자.
그것을 읽고 내일의 히노들이 조금이라도 용기를 얻을수 있도록조금이라도 미래에 대한 공포를 덜어줄 수 있도록. - P128

이제 나는 힘없는 어린애가 아니다. 아직 어리기는 해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시절의 내가 아니다. 적어도 내발로 걸을 수 있다.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을 만나러 내 발로 갈수 있다.
도중에 조바심이 나서 뛰기 시작했다.
히노의 얼굴이 자꾸만 떠올랐다. 몸 전체가 기뻐하고있었다.
달리기 때문인지 심장이 빠르게 고동치더니 순간 죄어드는듯한 아픔이 느껴졌다.
비틀거릴 뻔했지만 넘어지지 않을 수 있었다. 점심도먹지 않고 느닷없이 뛴 탓일 것이다. 그렇게 턱도 없는 행동을 하는 나 자신에 웃음이 났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한시라도 빨리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다. 웃으며 이야기하고 싶은 사람이 있다.
한걸음 한 걸음이 그 사람에게로 이어졌다.
나는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그건 내가 바라 마지않던힘찬 충동이었다. - P179

"제가...... 제가 소설을 쓰려고 한 건 아버지 영향이에요. 소설을 쓴다는 행위는 아버지 덕분에 가까이에 있었어요. 그렇지만・・・・・・ 처음엔 저도 그랬거든요. 지금의 자기자신한테서 도망치고 싶어서 썼어요. 그런데 언제부턴가그게 아니게 된 거예요. 자기를 확장해가기 위한 걸지도모르겠다. 자기 자신의 새로운 말, 새로운 생각을 만나는장소일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생각하게 됐어요." - P247

"잊어버리기...... 싫어."
어느새 내 입에서 그런 말이 흘러나왔다. 시야가 부옇게 번졌다.
어라? 어째서? 왜 이러지.…………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잊어버리고 싶지 않았다. 이런 소중한 시간을 잊어버리다니, 일기에만 남길 수 있다니, 그런 건 싫었다. 그렇지 않나. 인생은 언제나 한 번뿐이다. 어떤 순간도 돌이킬 수 없다. 그렇기에 사람은 그걸 소중히 한다. 보물로 삼으려고한다.
그런 걸 기억할 수 없다니 너무한다. 너무 슬프다.
반대편 손으로 눈물을 훔치는 나를 남자친구님이 보고있었다.
"잊지 않을 거야, 난 이날을."
그 목소리는 폭죽 터지는 소리에 묻히지 않고 또렷이내 귀에 들렸다.
"나. 나도 잊지 않을 거야. 잊을 리 없는데.
이상하다. 너무 즐거워서 그런가? 눈물이 그치질 않네."
그렇게 말하며 눈물을 흘리는 내 손을 남자친구님이 꼭쥐었다.
"사람은 원래 잊어버리게 마련이야. 하지만 괜찮아. 어떤 기억도 완전히 사라지는 건 아니니까. 난 그렇게 믿어." - P266

‘좋아한다‘는 감각에 기인하는 말이다. 오기로 곁에 있어 준다든지 논리로 따질 수 있는 게 아니다.
누군가를 좋아하게 됐을 때, 나중에 그 이유를 말로 설명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그건 좋아한다는 직감과는 거리가 있다.
인간은 ‘어떠어떠하니까 좋아한다‘라고는 할 수 없는것이다.
근거가 없는, 진정한 의미로 감각에 기인하는 감정이다. - P282

"그렇지만...... 죽다니. 그런 일 없어. 괜찮아."
"응, 알아. 하지만 인간은 존재하는 것 자체가 기적이라고 생각하거든. 그렇잖아, 굉장하지 않아? 공업 제품이랑은 다르다고. 거기엔 설계도도, 숙련된 작업자도 없어. 어머니 배 속에서 자라서 세상에 툭 나와서, 그때부터, 아니그 전부터 살아 있지. 그건 기적 같은 일이라고 생각해. 그런데 로봇처럼 설계도를 바탕으로 만든 게 아니니까 이상이 생겨도 바로 모르고 움직이지 않아도 부품을 교체해 살려낼 수 있는 것도 아냐. 어떻게 이렇게 살아 있는 건지 실은 잘 알 수 없어. 이해할 수 없고, 굉장하고, 동시에 겁나는 일이야." - P307

"세계는 말로 되어 있어. 그리고 사람은 그 말에 매달리려고 해. 좋다고 생각하면 무슨 일이든 좋은 게 돼. 좋지 않다고 생각하면 무슨 일이든 좋지 않은 게 되고, 특히 이번일은 그게 뚜렷하다고 생각하거든. 결과가 불확실하니까.
일기에서 도루를 없애지 않으면 마오리는 괴로워할지도몰라. 그런 마오리를 보면서 도루 말대로 할 걸 그랬다고너도 괴로워할지도 몰라. 반대로 일기에서 도루를 없애면지금의 마오리한테는 좋을지 몰라. 하지만 넌 양심의 가책에 시달려야 할지도 몰라. 그렇지만 그것도 지금 시점에선전부 불확실하거든."
"살아야 하는 생을 사는 게 우리 인간의 참된 모습이라면 마오리가 괴로워하면서 사는 것도, 우리가 양심의 가책에 시달리면서 사는 것도, 둘 다 올바른 모습이라고 난 믿어. 다만...... 와타야, 도루는 선택을 너한테 맡겼어. 그러니까 네가 정하렴. 그러고 싶은지, 그러고 싶지 않은지, 그것만 기준으로 해서 난 네 판단을 따를게. 만약 너 혼자 정할 수 없다면 날 이유로 삼아. 그게 도루의 유지라면 난 이뤄주고 싶어. 그렇지만......." - P320

상처는 사라지지 않지만 아픔이 계속되는 것은 아니다.
사람은 그렇게 해서 슬픔을 소화해가는 걸까.
슬픔을 잊게 되는 걸까.
그럴지도 모른다. 계속 사로잡혀 있어서는 앞으로 걸어나갈 수 없다.
하지만 나는 언젠가 슬픔을 잊게 된다는 게 슬펐다.
"추억은 소중한 거죠."
그런 생각을 담아 말하자 누나는 표정을 살피듯 나를쳐다봤다.
"전 그 소중한 걸 잃었어요. 다른 사람들이 조금씩 그 애를 잊어갈 거라면 ・・・・・・ 전 조금씩 그 애를 기억해내고 싶어요. 소중한 걸 되찾아보고 싶어요." - P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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