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렇게 얘기했다. 그에게 돌아오는 말이 없어 그제야 주열 씨를 쳐다보았다. 그는 해맑게 웃는 이연이도 보지 않고 베란다를 쳐다보고 있었다. 무슨 일인지 몰라도 생각이 많아 보이는표정이었다. 그럼에도 그저 잘해낼 거라 믿었다. 지금 돌이켜 보면 잔인한, 그리고 이기적인 믿음이었다.

사소한 물음에도 다정하게 답해주던 그는 이번엔 내 말에 제대로 답하지 않았다. 부서 이동을 한 뒤 달라진 모습이었다. 일이많아서 힘든가보다,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일부러회사 일에 관해 묻지 않으려 했다. 그게 그를 믿는, 나만의 방법이었다. - P42

"후회해요. 매일 후회해요. 그런 회사 그만두라고, 둘이 어떻게든 살아보자고 말했다면, 뭐가 힘든지 더 물어봤다면, 그날 밖에 나가지 말라고 했다면, 같이 있었다면......."
언제부터 울고 있었을까. 슬프다는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데자연스럽게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내게 남은 것은 후회와 그날의 기억이었다. 하나라도 달랐다면 한 번이라도 물어봤다면, 주열 씨의 죽음을 방관한 사람. 방관한, 나. 도저히 용서할 수 없었다. 그들도 나 자신도 - P54

"쉽게 설명드릴 순 없지만, 정말 소중했던 사람. 정말 간절한사람. 그런 단 한 사람만이 고인의 마지막 마음을 들을 수 있는특별한 공중전화예요. 고인이 세상을 떠난 시간에만 들을 수 있어서 강주열 씨가 사망한 시간까지 와달라고 한 거고요. 물론, 언제나 연결되진 않아요. 고인이 마지막으로 마음을 전달하고 싶어야만 하죠. 다른 사람은 몰라도 송연아 씨라면, 들을 수 있을 거예요. 누구보다 간절하고, 강주열 씨가 사랑한 사람일 테니까요."
"......."
"믿기지 않아도 믿어주세요. 세상에는 말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나곤 하잖아요." - P68

"강주열 씨는 송연아 씨와 아드님을 버린 게 아니에요. 자신이 무능력하다 느끼고 가족에게조차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고 생각하신 것뿐이죠. 그러니 자신이 없는 게 더 가족을 위한일이라고 생각하게 된 거고요. 송연아 씨와 아드님이 더 잘 살기위해선 자신보다 나은 사람을 만나야 한다면서요."
"알아요. 송연아 씨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시겠죠. 하지만강주열 씨는 자신이 놓인 상황에서 끝까지 그것이 모두를 위한선택이라고 믿으신 거예요. 그러니까 부디 강주열 씨가 혼자였다고, 또 송연아 씨가 버려졌다고 생각하지 않으셨으면 해요. 서로가 서로를…………… 너무 위했던 거예요."
"끝까지 가족을 아꼈기에 그만큼 힘드셨던 거예요." - P72

"자살로 낙인찍힌 다른 유가족분들은 어떻게 살아가세요?"
"자살 유가족분들의 삶을 물으시는 건가요?"
"좀 이상한 질문일 수 있지만, 생각해 봤어요. 만약 주열 씨의죽음이 회사에 의한 사고가 아니라 그저 자살로 끝나게 돼버린다면…………… 자살이라는 낙인이 찍히게 된다면...... 저랑 아이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지금이야 계속 싸우고 있지만 언젠가 이 싸움도 끝이 나게 될 테니까요. 그때 만약 자살로 결과가 나온다면어떻게 해야 하나 생각하게 되더라고요. 그래서 센터장님께 물어보고 싶었어요."
"그 누구도 낙인찍을 수 없고 자살이 낙인이 되어서도 안 돼요. 지금 송연아 씨가 하고 계신 일 모두 낙인찍히지 않은 삶을위한 싸움이에요. 자살이라는 것이 낙인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한 사람의 잘못만이 아니라는 걸 증명하고 계시는 거예요. 설령법으로 산재 인정을 받지 못한다 해도 고인이신 남편분과 지금여기 계신 송연아 씨, 그 누구도 두 분께 낙인을 찍을 수는 없어요. 다른 자살하는 분들도, 다른 유가족분들도 마찬가지예요. 중요한 것은 ‘자살‘을 했다는 게 아니라 ‘소중한 사람을 잃었다‘는 거죠" - P76

-・・・・・・도움을 받고 싶어요.
그 말에서부터 내 삶이 시작되었다. 도움을 받고 싶다는 마음으로, 그 말로, 그건 내가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말이자 홀로 걷기 위한 첫발이었다. - P122

"감사해요. 이 말, 꼭 하고 싶었어요."
"그 얘기 하러 오셨군요. 저도 정말 감사해요." - P127

"심리부검이 끝나진 않았지만, 이것만은 확실하게 말할 수 있어요. 어머님은 아영이를 죽이지 않았어요. 다만 어머님이 그렇게느끼는 것은 아영이의 마음이 어땠는지 몰랐기 때문이에요. 아영이의 마음이 어땠는지 안다면 다른 마음을 발견하실 수 있을 거예요."
"소중한 이를 잃은 슬픔이요. 똑같은 슬픔이라 생각될 수 있지만 그 둘은 다른 슬픔이에요. 지금 슬픔의 방향은 어머님을 향해 있죠. 내가 이렇게 못 해서, 내가 이렇게 말해서. 하지만 아영이의 마음을 안 순간부터 슬픔은 아영이를 향할 거예요. 소중한아이가 떠나갔구나. 힘든 마음을 가지고 살아갔구나. 그걸 저희는 ‘애도‘라고 말해요. 저희가 그럴 수 있도록 도와드릴게요." - P158

"다영이는 기적이 있을 거라 생각해?"
"있으면 좋겠어요. 없는 것보다 낫잖아요." - P175

"스스로 상처 내는 아이들의 마음을 직접 들은 적이 있어요."
"왜 자해를 하냐는 물음에 돌아온 대답 중 대부분이 ‘어떻게해야 할지 몰라서‘였어요. 살고 싶어서 했다는 아이들도 있었어요.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정말 죽을 것 같다고요. 그 아이들.
모두 자신의 마음을 어떻게 풀어야 할지 막막했던 거예요. 혼자서 어떻게든 해보려다 그렇게 된 거예요. 그중에는 죽고 싶다고말한 아이도 있었어요. 그래서 다시 물었죠. 잘 살 수 없을 것 같아서 무섭냐고요. 그 아이는......."
"고개를 끄덕였어요. 죽고 싶다는 그 아이도 실은 잘 살고 싶었던 거예요. 다시 물어보지 않았다면 저는 그 아이가 그저 죽고싶어 한다고만 생각했을지도 몰라요. 자해를 하고, 죽고 싶다고했으니까요. 우리는 때로 상대를 알고 있다는 생각으로..... 진짜마음을 몰라주고 있는지도 몰라요." - P178

"우리는 어른으로서 더 많은 것을 봐야 하는 건지도 몰라요.
하나가 아닌 둘, 혹은 그 이상을요. 아마 아영이도 SNS에 다 담기지 않은 모습이 있었겠죠. 어머님께 보인 모습이나, 학교에서의모습이나・・・・・・ 그 모두가 아영이고, 우리가 마주해야 하는 삶일거예요." - P186

-오빠는 이 일에서 뭐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해?
-남은 사람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거. - P236

그제야 지안이 왜 그를 불렀는지 눈치챘다. 그들에게 중요한것은 그녀가 ‘어떤 방법으로 죽었느냐가 아니라 그녀가 ‘어떤 삶을 살아왔느냐‘에 대한 회고였다. 애도란, 그 삶을 받아들이고 소화해 내는 과정이었다. 그들에게 필요한 건 그녀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대화하며 마음을 나누는 것, 그게 바로 수용이란 결지안은 진작 알아챘던 것이다. - P244

"왜 거기 올라갔어?"
모두가 물었다. 나를 담요로 감싸던 구급대원도, 내 이름과전화번호를 묻던 경찰관도 이송된 병원 의사도, 입원 처리되어나를 담당하게 된 의료진도 입원 이후 찾아온 어머니 역시 내게물었다. 왜 거기에 올라갔느냐고. 그들은 모두 내게 죽을 만한 이유가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나의 이유는 간단했다.
"생각이 너무 많아서요.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거든요." - P267

그녀가 대리기사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그녀가 차에 타는 것도 확인하지 않은 채 인사만 덜렁 건네고 뒤돌았다. 그 모습을그녀가 신경을 쓰는지 아닌지는 몰랐다. 하지만 그녀는 뒤돌아가는 나를 붙잡지도 않았다. 그 사실이 왜 그리 야속했는지. 그제야 나는 내 마음의 옹졸함을 보았다. 나는 항상 누군가 잡아주길 바랐던 것이다. 내가 나를 잡을 수 없어, 누군가가 잡아주길 기다렸던 것이다. - P280

"살아가는 사람의 마음을 알고 싶었어요. 그 사람들이 살아가는 이유를요. 어떻게 그렇게 큰 슬픔을 지니고도 살아갈 수 있나. 어째서 계속 살아나가는 걸까. 저라면 포기하고 싶었을 거예요. 그런 슬픔까지…… 견디고 싶지 않으니까요." - P286

-지금도 무너져 있어요?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상태랄까. 그러니까 지안 씨도………………......?
-지안 씨도 이제 쌓아 올려봐요. 다 무너트려서라도, 끝까지떨어지더라도 다시 시작해 봐요. 지금이 우리가 있어야 할 곳이잖아요. 이렇게 안부를 묻고, 대답하고, 대화하는 지금이 우리가살아가야 하는 곳이잖아. - P302

-지안 씨. 시간이 흐르면서 해결되는 것들이 있다지만, 그건해결하려는 노력이 있기 때문이라고 지안 씨가 말했잖아. 지안씨도 이제 노력이 필요할지 모르지. - P313

"......어머니는 왜 그러셨어?"
"그런 질문 이상해. 너도 아빠가 그렇게 갈 줄 몰랐잖아. 나도몰라. 장례식에서도 사람들이 다 묻더라. 왜 자살했느냐고. 그런데 엄마가 자살이든 아니든 죽었다는 건 나도 알아.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도. 그리고 나는 엄마가 자살한 게 슬픈 게 아니라 죽었다는 게 슬픈 거야. 너도...... 그냥 슬픈 거잖아." - P350

"나는 지금도 슬퍼. 엄마가 보고 싶어. 밖에 나간다고 한 날말려보는 상상도 했어. 그런데 그래도 엄마는 나갔을 거 같아. 아무리 내가 막아봐도 그렇게 생각하면 한편으론 마음이 편해. 모두는 죽고, 어쩔 수 없는 일이니까 언젠가 이 슬픔을 마주해야하잖아. 나는 그게 좀 이를 뿐이었겠지."
"......"
"슬프지 않은 죽음은 없을 거야. 죽음은 우리도 피할 수 없고. 나는 그냥 엄마 대신 내가 슬퍼한다고 생각해. 내가 먼저 떠나면 이 슬픔을 엄마가 겪어야 했을 테니까." - P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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