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색일지라도 혼의 주인에 따라 조각의 색조가 미묘하게 달랐다. 예를 들면, 장미의 붉음과 산딸기의 붉음, 석양의 붉음과 베텔게우스의 붉음처럼 말이다.
사람의 혼이란, 말하자면 기억의 집합체다. 사람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의 온갖 기억이 담긴 보이지 않는 물질을 ‘혼‘이라고 부른다. - P15
"뭐, 여전히 잘 그리긴 했지만 역시 자네 그림에는 무언가가 부족해. 물감 재료인 혼의 빛깔에 너무 의존하고 있는 거지. 아름다움과 정교함에 있어서는 확실히 높이 평가할 만하지만, 이 그림에 존재하는 건 그것뿐이야." "자네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아. 하지만 이것만큼은 어쩔 수가 없어. 나한테는 흔이 없는걸." 사신이란 존재는 보통 그렇다. 마음의 요람인 혼이 없기에 벌어진 사건이나 학습한 지식 등의 사무적 기억만 남을뿐, 감정적인 기억은 남지 않는다. 하룻밤 푹 자고 나면 자기 전에 느꼈던 감정은 전부 꿈의 저편으로 사라지기 때문인 것도 있고. - P39
"네가 명령했기 때문이야. 카에데에게 죽으라고 했잖아." "도망친다는 건 죄의식을 느낀다는 뜻인가?" "다행이야. 요즘 가해자 중에는 피해자가 죽으면 기뻐하는 사람도 있거든." - P93
죽은 카에데의 육체에서 해방된 혼의 대부분은 검정과회색으로 뒤덮여 있었다. 그 정도로 탁한 색의 혼은 오랫동안 이 일에 종사한 나조차도 처음 봤기에 지금 생각해도 놀랍기만 하다. 카에데는 죽은 채로 살아 있었다. 무엇을 봐도반응하지 않는 마음은 단단히 얼어붙은 돌멩이 같았다. 그런 그녀가 유일하게 아름답게 느낀 것이 죽기 직전에본 석양의 빛깔이었다. 그녀의 인생에서 그것 말고는 마음을 움직여준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나는견딜 수 없이 감상적인 기분이 되었다. 흔이 없어 삶의 기쁨을 기억할 수 없는 우리와 혼을 가졌으면서도 생의 기쁨을 느끼지 못했던 그녀 중에서 어느쪽이 더 슬픈 생물인 걸까. ·현실에서 도망칠 방법은 그것 말고도 얼마든지 있었어. 인간의 수명은 태어날 때부터 정해져 있지만 삶의 방식은 스스로 정할 수 있지. 모든 걸 잃어버릴 각오로 그 집에서 뛰쳐나왔다면 카에데도 좀 더 행복한 죽음을 맞을 수있었을지도 몰라. 하지만 그 아이는 포기해버렸지. 자기 인생도, 이 세상도." - P103
"이봐, 찰스, 어째서 인간은 추한 것들만 열심히 찾아내는걸까? 고개를 조금만 들어도 세상은 이렇게나 아름다운데." "인간은 다들 근시거든. 먼 곳을 보게 하려면 안경을 씌워줘야만 하지. 뭐, 그중엔 가끔 자네처럼 먼 곳만 보려 하는곤란한 녀석들도 있지만 말이야." - P104
"......이봐, 엘리. 내가 자네를 고용한 이유가 자네의 눈동자에 첫눈에 반했기 때문이라고 말하면, 자네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 P136
"오른손으로 기쁨을 붙잡으려 하면 왼손의 보물을 떨어뜨리게 돼." 인생이란 그런 거라고 어머니는 말씀하셨다. 나는 왼손의보물을 잃는 게 두려웠다. 그래서 계속, 언제까지나 지켜내고 싶었다....... 하지만 오른손으로 새로운 기쁨을 움켜쥔 지금은 이게올바른 선택이었다고 당당히 말할 수 있다. 왼손은 당분간비워두자. 욕심이 나서 또 오른손을 뻗지 않도록. - P157
아아, 수많은 아침을 맞이하면서도 슬픔의 빛이 바래지않는다는 건 멋진 일이야. 엘리, 부디 마지막 순간에 내 눈앞을 장식하는 혼이 너의 눈동자와 같은 색이었으면 해. - P180
"발상의 전환이라는 거죠. 예를 들어, 출생지나 시대, 재해처럼 자기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것에 인생을 지배당한다는 건 굉장히 불쾌하고 받아들이기 힘든 일일 겁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분노나 증오에만 집중하다 보면 만만치 않은 현실과 직면할 때마다 본인만 더욱 힘들어질 뿐입니다. 그렇다면 억지로라도 사물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편이 과거와의 타협을 훨씬 쉽게 만들어주지 않을까 하는 거죠." - P234
"우리는 눈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만으로도 보통 사람들 보다 모르는 게 몇 배는 많잖아요. 저는 태양을 본 적이 없고, 하늘이 어떤 색인지도 모르고, 별똥별이 어떤 건지도 몰라서 소원도 빌 수 없어요. 그래서 그만큼 눈이 보이지 않아도 이해할 수 있는 것을 좀 더 많이, 많이, 많~~이 알고 싶어요. 눈이 보이는 사람이 열 가지를 알고 있다면, 저는 백가지를 알고 싶어요. 그렇게 하면 제가 불행하지 않다고 생각할 수 있고 보통 사람들 앞에서도 당당할 수 있을 것 같아서요. 제가 이런 말을 하면 할아버지는 ‘세이라는 참 지기싫어하는구나‘ 하며 웃으시지만요." - P285
하지만 과연 그들의, 아니 나의 선택은 정말로 옳았던 걸까? 나는 그들이 고른 결말을 축복하는 게 아니라 슬퍼해야하지 않았을까? 결국 생의 기쁨을 잃어버린 그들의 공허한최후에 가슴이 아파야 하지 않았을까? 왜냐하면 세계는... "우리는 낙심하지 않는다. 우리의 외적 인간은 쇠퇴해가더라도 내적 인간은 나날이 새로워진다. 왜냐하면 우리가지금 겪는 일시적이고 가벼운 환난이 그지없이 크고 영원한 영광을 마련해주기 때문이다." 순간 무심결에 주먹을 맏아쥐던 내 귓가에 찰스의 거침없는 암송이 들려왔다. "우리는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본다. 보이는 것은 잠시뿐이지만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하다... "라고 코린토 신자들에게 보낸 편지에 적혀 있지. 인간이란 건 어쩔 수 없이 눈에 보이는 것에 얽매이기 마련이야그런 슬픈 생물이지. 전에도 이야기했잖아. 모든 사람은 근시라고." - P2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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