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스락 바스락 바스락, 멀리서 작은 소리가 난다.
누군가 초원을 걷고 있다. 뾰족뾰족 날카롭고 딱딱한 잡초일텐데 그 사람이 밟으면 마치 신록의 계절인 양 부드럽고 상냥한 소리가 난다. 두 무릎에 묻고 있던 얼굴을 든다. 발소리가 다가온다. 천천히 일어나 주위를 둘러본다. 흐려진 시야를 닦아내듯끔뻑끔뻑 세게 눈을 깜빡인다. 흔들리는 풀들 너머에 노을 같은붉은색의 기름종이에 비친 듯한 사람 그림자가 보인다. 넉넉한하얀 원피스가 바람에 동그랗게 부풀어 있고 금색 빛이 긴 머리를 따라 흐르고 있다. 어른스럽고 얇은 입술에는 새벽의 으스름달처럼 살짝 올라간 미소가 있다.
"스즈메."
내 이름을 부른다. 그 순간 귀와 손가락 끝과 콧등, 그 목소리의 파문이 닿은 곳에서부터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듯 편안함이온몸으로 퍼진다. 조금 전까지 바람에 나부끼던 눈발은 어느새분홍색 꽃잎이 되어 춤을 춘다.
그래. 이 사람은 이 사람이.
계속 계속 내가 찾던……………. - P12

가로등에 비친 설경이나, 정상에만 햇살을 받은 산이랄까. 손이 닿지 않는 높이에서 바람에 이끌리는 흰 구름이랄까. 꽃미남이라기보다는 그런 풍경처럼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 풍경을 아주 오래전에 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맞아. 꿈에서 찾아가는 초원의, 그 기묘한 푸근함 같은…………. - P20

은박지처럼 반짝이는 바다 저 너머에 여러 개의 크레인이 세워진 항구가 보였다. 바다냄새에 석유 냄새와 식물, 물고기, 인간의 생활 냄새가 마구 뒤섞여 있다. 갑자기 몸을 내리누르는 듯한 음량으로 기적이 울렸다. 자, 이제 시작이야. 주위의 모든 것이 떠들썩하게 이야기하는 듯한 느낌이 문득 들었다. 무엇이 시작될지, 여행일지 인생일지, 아니면 단순한 하루일지는 모르겠으나 어쨌든 이제부터시작이야, 소리와 냄새가, 빛이, 체온이 그렇게 속닥속닥 속삭였다.
"......가슴이 막 두근거려."
아침 햇살이 그려내는 풍경을 바라보며 저도 모르게 내뱉었다. - P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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