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시선은 말단(端)에 머무르게 되어 있다고 한다.
그래서 발끝이나 머리카락, 손목시계나 안경의 모양에 눈이 가는 것이다. 신발도 그렇다. 혼신의 힘을 기울여 손톱을 예쁘게 다듬은 여자가 주름진 흠집투성이 가죽구두를신고 있는 것을 보면 환멸을 품게 된다. 핸드백 역시 불쌍하게도 거칠거칠하게 말라 있다. 네일아트를 열심히 가르치는 잡지나 가게는 얼마든지 있는데, 가죽구두를 닦는 법을 가르쳐주는 사람은 너무나 적다. - P8

잔뜩 찌푸린 얼굴이 아프다.
비가 내린다는 것은.
바로 그런 것이다. - P11

빗방울이 만들어내는 소음을 들으며 생각한다.
주위에 사람이 없다는 건 좋은 거구나.
그런 내 생각에 조금 놀랐다가 바로 납득했다.
그래, 나는 혼자 있고 싶었던 건가. - P15

아, 행복하다.
세상에 단 한 명만 남은 것처럼 느껴지는 이런 시간이굉장히 좋다. 나는 모르는 사이에 그 정도로 지쳐 있었던것 같다. 이 시간이 계속 이어지면 좋을 텐데, 생각했다. 흐린 하늘과 빗방울 소리와 아무도 없는 넓은 정원을 언제까지고 독점하고 싶다. - P17

누군지도 모르는 그런 사람들에게 어렴풋이 증오 같은감정이 싹텄다.
이유는 잘 모른다.
하지만 불쾌했다.
지긋지긋해져서 바로 나왔다.
맑은 날에는 여기 와서는 안 된다.
그리하여 비 오는 날에만 공원에 다니는 습관이 생겼는데, 몇 번째인가 찾아간 어느 날, 그 정자에 그 여자가 있었다. - P44

여자의 목소리가 말했다.
"......본 적이 있을지도"
"네?"
나는 고개를 들었다. 여자의 얼굴은 역광으로 실루엣만남아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잘 보이지 않는다.
·우렛소리 희미하고."
벤치에 기대었던 우산을 들고 여자가 일어선다.
"구름이 끼고 비라도 내리면......."
붉은 우산이 펼쳐진다.
"그대 붙잡으련만......." - P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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