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들이 널 싫어한다고 그랬지?"
"그렇다니까...... 왕따야......."
"안타깝네. 근데 내가 니 자식이라도 그럴 것 같아. 너처럼 떠들어대면 누가 좋아하겠니?"
"이 자식 보게, 이거. 내가 내 입으로 떠들지도 못하냐?"
눈을 뜨고 따지는 황을 보며 곽은 짧은 한숨을 내뱉고 되받아쳤다.
"뭘 떠드는데? 뭘 알고 떠들어? 니가 요즘 애들처럼 공부를 많이했어? 아니면 책을 많이 읽었어?"
"야! 내가 산전수전 겪으며 살아온 게 있는데, 그 따위 공부가 뭐대단하다고! 진짜 너 왜 젊은것들 편만 들어? 자식들이 뭐라던? 너대체 누구 편이야?"
"나? 입 닥치고 조용한 쪽 편이다. 잘 들어. 이놈아, 우리같이 돈도 힘도 없는 노인들은 발언권이 없는 거야. 성공이 왜 좋은 줄 아나? 발언권을 가지는 거라고. 성공한 노인들 봐. 일흔이 넘어도 정치하고, 경영하고, 응! 떠들어도 밑에 젊은 놈들이 경청한다고. 걔들 자식들도 충성하고. 근데 우린 아냐. 우린 망했잖아. 그런데 떠들긴 뭘 떠들어!"
"씨발. 그래. 인정. 망했지, 못났고.... 그럼 못난 놈들끼리 모여서 떠들면 되잖아! 광화문 나가서 다 함께 말이야! 야 이 자식아, 너이혼했다고 너무 의기소침할 거 없어! 나랑 같이 이번 주말에 광화문 나가서 신나게 소리나 한판 질러보자! 어때?"
곽은 부끄러웠다. 친구가 부끄러웠고 별다를 바 없는 자신도 부끄러웠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옆에 놓인 황의 마스크를 들어 자신을 올려다보는 황의 입에 다짜고짜 씌웠다. 입 닥치라고, 광화문가서 코로나나 걸리지 말라고. - P212

대화를 나눌 가족이 사라졌고 그것이 스스로의 탓임을 깨닫게된 곽은, 그제야 자신의 입을 가리고 있는 마스크가 편하게 느껴졌다. 진즉에 봉했어야 했다. 가족들에게 무심코 던졌던 폭력적인 말들이 고스란히 자신의 뒤통수에서 울릴 때마다 자업자득이란 말을되새김질할 수밖에 없었다. - P215

사장님과 면담을 했다. 아주 사적인 퇴사 사유를 그녀는 묵묵히들어주었고, 궁금증이 풀린 것만으로도 나를 이해해주었다. 편의점이란 사람들이 수시로 오가는 곳이고 손님이나 점원이나 예외없이 머물다 가는 공간이란 걸, 물건이든 돈이든 충전을 하고 떠나는 인간들의 주유소라는 걸,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이 주유소에서나는 기름만 넣은 것이 아니라 아예 차를 고쳤다. 고쳤으면 떠나야지. 다시 길을 가야지. 그녀가 그렇게 내게 말하는 듯했다. - P243

"자네는 가족이 있나?"
쓸쓸한 눈빛이었다. 나는 고개만 끄덕였다.
"가족들에게 평생 모질게 굴었네. 너무 후회가 돼. 이제 만나더라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르겠어."
나는 질문에 대답하려 애썼다. 나 자신에 대한 질문이기도 했기때문이었는데, 그래서일까 무어라 말이 터지질 않았다. 내가 씁쓸한 표정으로 아무 말도 못하자 그는 괜한 말을 했다는 듯 손사래를치고 컵라면 그릇과 함께 몸을 돌렸다.
"손님한테 하듯..... 하세요."
불쑥 튀어나온 말에 그가 나를 돌아보았다.
• "손님한테...... 친절하게 하시던데………… 가족한테도・・・・・・ 손님한테 하듯 하세요. 그럼・・・・・・ 될 겁니다."
"손님에게라……………. 그렇군. 여기서 접객을 더 배워야겠네."
곽 씨가 고맙다는 말을 덧붙이고는 뒷모습을 보였다. 따지고 보면 가족도 인생이란 여정에서 만난 서로의 손님 아닌가? 귀빈이건불청객이건 손님으로만 대해도 서로 상처 주는 일은 없을 터였다.
불쑥 내뱉은 말이지만 그에게 답이 되었다니 마음이 놓였다. 그런데 내게도 답이 될 수 있을까? 아니 나는 감히 손님이라도 될 수 있을까? - P251

결국 삶은 관계였고 관계는 소통이었다. 행복은 멀리 있지 않고내 옆의 사람들과 마음을 나누는 데 있음을 이제 깨달았다. 지난가을과 겨울을 보낸 ALWAYS편의점에서, 아니 그 전 몇 해를 보내야했던 서울역의 날들에서, 나는 서서히 배우고 조금씩 익혔다. 가족을 배웅하는 가족들, 연인을 기다리는 연인들, 부모와 동행하던 자녀들, 친구와 어울려 떠나던 친구들…………. 나는 그곳에서 꼼짝없이주저앉은 채 그들을 보며 혼잣말하며 서성였고 괴로워했으며, 간신히 무언가를 깨우친 것이다. - P252

강은 빠지는 곳이 아니라 건너가는 곳임을.
다리는 건너는 곳이지 뛰어내리는 곳이 아님을.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부끄럽지만 살기로 했다. 죄스러움을 지니고 있기로 했다. 도울 것을 돕고 나눌 것을 나누고 내 몫의 욕심을 가지지 않겠다. 나만 살리려던 기술로 남을 살리기 위해 애쓸 것이다. 사죄하기 위해 가족을 찾을 것이다. 만나길 원하지 않는다면사죄의 마음을 다지며 돌아설 것이다. 삶이란 어떻게든 의미를 지니고 계속된다는 것을 기억하며, 겨우 살아가야겠다.
기차가 강을 건넜다. 눈물이 멈췄다. - P2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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