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부나 간호원들이 독일돈 벌어들이나, 군인이나 근로자들이 월남서미국돈 벌어들이나, 우리가 멀리 외국까지 나갈 것 없이 궁뎅이 운전으로 일본돈 착착 벌어들이나 뭐가 달라 그래.」
「두말하면 잔소리지. 애국자가 뭐 따로 있나. 우리도 앗싸한 애국자지.」 - P11

1972년 8월 3일 실시된 당일로 8.3조치‘로 불리기 시작한 ‘기업 사채 긴급 동결령‘은 세상을 발칵 뒤집어놓았다. 하룻밤 사이에 기업체 사장들이 돈벼락을 맞고 사채업자들이 날벼락을 맞은 때문만이 아니었다.
또, 독재정치를 ‘한국적 민주주의‘란 말로 둔갑시키는 탁월한 능력을 발휘한 것처럼 경제를 발전시킨다는 미명 아래 대통령의 긴급명령권을 턱없이 확대하여 세계에서 유일하게 기업들을 비호하고 나섰기 때문만도아니었다. 그 황당한 ‘한국적 자본주의‘의 행태로 사채업자들보다 더 참혹하게 날벼락을 맞은 사람들이 수없이 많았다. 그 피해자들은 이상하게도 지지리 가난한 사람들이었다. - P41

그런 그들은 한국 간호원들이 집안 식구들을 위해서 그렇게 혹독한노동을 자처하고 있다는 것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왜 자기 스스로의 인생을 살지 않고 여자 혼자의 힘으로 집안 식구 모두를 위해서 희생해야 하느냐는 것이었다. 집안이 가난하면 식구들 모두가 그 책임을 지고 고생해야 옳지 왜 한 사람이 고통을 당하며 그 짐을 져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한국 간호원들이 아름답게 생각하는자기희생을 서독 간호원들은 논리에 맞지 않는 가족들의 무책임이라고받아들였다. 그리고 사회복지제도가 전혀 없는 한국 사회에 대해서 서독 간호원들은 어떻게 그런 나라가 있을 수 있느냐고 믿으려 하지 않았다. 어차피 그들 사이에는 말로 이해될 수 없는 높은 벽이 가로막혀 있었다. - P210

다음날 한인곤은 그들이 시키는 대로 옷을 챙겨 입었다. 옷을 한 가지씩 입으며 한인곤은 자꾸 눈물이 나려는 목메임을 느끼고 있었다. 이곳에 끌려와 옷이 벗겨진 이후로 처음 입는 옷이었다. 옷의 기능이 단순히추위를 막는 것이 아니고, 멋을 부리기 위한 것은 더구나 아닌 것을 그는 이번에 절실하게 깨달았다. 옷으로 수치를 가리고 위신을 보호한다는 것은 옷의 기능 중에서 가장 큰 것이 아닐까 싶었다. 옷을 벗겨버리는 것, 그것은 또 하나의 잔혹한 고문이었다. - P223

남재구의 판에 박은 듯한 달변에 한인곤은 전혀 놀라지 않았다. 박정회 맹신자들이라는 말이 있었다. 자나깨나 경제건설을 주장하고, 정치행위의 모든 갈등이나 모순도 경제건설이라는 미명으로 합리화시켜버리는 것이 ‘박정희라는 것이고. 그 논리를 무작정 추종하며 때와장소를 가리지 않고 그 타당성을 역설해대는 자들을 맹신자라고 이름붙였다.
그런데 그 사회적 비아냥거림과 야유를 오히려 자랑스럽게 내세우며출세의 기회를 엿보는 자들이 숱한 게 정치판이기도 했다. 남자구도 영락없이 그런 부류들 중의 하나였다. - P226

「차아암∙∙∙∙∙∙ 저 한강을 건너올 땐 정말 청춘이었고 꿈도 컸었는데……………」
김선태는 중얼거림 끝에 또 긴 한숨을 매달았다. 그의 눈길은 저 멀리아득하게 흘러가고 있는 한강에 가 있었다.
「그야 어디 자네만 그런가. 나도 그랬고, 한강철교 건너온 젊은놈들이야다 청운의 꿈을 품었었지. 그래, 서울은 참 묘한 곳이야. 출세의 도시이기도 하고 절망의 도시이기도 해. 무작정 사람을 끌어당기는 마력을발휘하면서 책임은 지지 않는 잔인한 도시이기도 하지. 조선 500년에서지금까지 출세해 보겠다고 서울로 밀려들었다가 꿈을 이루지 못하고 저한강에 눈물을 떨구며 발길을 돌린 젊은이들이 그 얼마나 많겠는가. 그눈물을 다 모아놓으면 또 하나 한강이 될지도 모르지. 오랜만에 남산에서 한강을 내려다보니 감정이 묘해지는군. 이 사람아, 제사 지내나?」
「아, 예에.......」
김선태는 반쯤 남은 술을 털어넣고 얼른 잔을 건넸다.
「사실 인생이란 게 별게 아니긴 한데 고비고비 잘 풀리지 않으면 그것참 팍팍한 모래밭인 거라. 죽고 나면 다 헛것인데 산 목숨 하루하루는심각하고 절실하니까 최선을 다해 노력을 안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숱한 사람들이 인생에 대해 제 나름으로 많은 말들을 했는데 정작 정답은없는게 인생이거든. 사는 것, 그것에 열중할 수밖에 없어.」 - P247

경제발전이란 서울 시내에 중구난방으로 솟아오르는 고층건물들로나타났고, 키높이 경쟁을 하는 것 같은 그 건물들은 ‘빌딩숲‘이라는 외국말과 한국말을 짜맞춰 이상야릇한 새 말을 만들어내기에 이르렀다.
그 말과 똑같은 연유로 탄생한 것이 ‘아파트‘이었다. - P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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