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한 눈빛이군요. 자신의 동료를 믿지 않는 건가요?] 믿지 않느냐고? 물으나 마나 한 이야기다. 툭하면 죽는 저 개복치 녀석을, 믿을 수 있을 리가...………. [믿습니다.] 그럼에도 왜일까. 잘도 그런 대답이 나왔다. 자연스러운 대답에 페르세포네의 눈동자에 이채가 스쳤다. [애초에 저 녀석을 믿었기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나는 화면 속 유중혁을 돌아보았다. 패배하고, 부러지고, 몇 번이고 절망해도그래도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는 녀석. 저놈을 안 믿는다면, 애초에 누굴 믿을까. 설령 이번 회차가 실패한다고 해도…………. 녀석은 언젠가 반드시 이 세계의 결말을 볼 것이다. 나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뜨며 말했다. [판돈을 올리죠 100만 코인 걸겠습니다.] - P302
[자넨 늘 그걸 보고 있군. 빈 메모장에 뭐라도 쓸 참인가?] 그 물음에 답할 말을 찾지 못하다가 이내 힘없이 웃으며 대꾸했다. .......그냥 이걸 보면 마음이 안정되거든요." 멀리서 암흑 차원의 긴 어둠이 밀려나는 모습이 보였다. 텅비어 있던 창으로 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마침내 돌아갈 시간이었다. - P330
"한때는 작은 나무가 모여 숲을 이루었다." "그런데 이제 작은 나무는 모조리 뿌리 뽑히고, 그 땅을 차지한 큰 나무 몇 그루만이 가지를 뻗어 하늘을 덮었구나." "잎과 가지는 무성하지만 이젠 고작 몇 그루의 나무뿐인 것을 그대들 생각은 어떤가. 그것을 여전히 ‘숲‘이라 부를 수 있겠는가." 무림武林은 오래전에 죽었다. - P357
나는 한명오를 잘 알았다. 내가 아는 최악의 인간 열 명을꼽으면 반드시 들어갈 인물이다. 그럼에도 왠지, 그 순간만큼은 한명오가 괜찮은 사람처럼 느껴졌다. "한없이 예쁜 아이였어. 인간은 아니지만, 내가 낳았다고는믿을 수 없을 만큼 정말 예뻤지." 저도 봤습니다." 아스모데우스가 화신체로 삼을 정도로, 예쁜 여자아이였다.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애틋한지, 한명의 입가에 몇 번이고미소가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이야기는 제대로 이어지지 않았지만 한명오가 무슨 말을 하고 싶었는지는 알 수 있었다. 잠시 사이를 두고 한명오가 말했다. "그러니 독자 씨도 해보게." 출산을요?" "아니, 독자 씨가 고민하는 거 말일세." 꺼진 스마트폰 화면에 내 당황한 얼굴이 비쳤다. "난 독자씨가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지는 모르겠네. 솔직히말해서 원래 독자 씨를 별로 좋아하지도 않았고." "잘 알고 있던 바입니다." "그런데 최근 독자 씨가 좀 이상하다는 것 정도는 느낄 수있어." 나는 입을 다물었다. "일이 잘 안 풀린다는 것, 알고 있네. 모든 게 원하는 대로는흘러가지 않겠지. 그래도 너무 연연하지 말고 마음이 이끄는대로 하게." "뭐가 어떻게 되든 그걸 살아내는 사람은 독자 씨야 제대로하지 않으면 나중에 분명 후회할 걸세." 정말 세상 오래 살고 볼 일이라고 생각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이 남자에게 공감하는 날이 올 줄이야. 불이 들어온 스마트폰 화면에 멸살법 파일이 보였다. -멸망한 세계에서 살아남는 세 가지 방법 (2차수정본).txt한명오와 같은 경험은 없다. 아이를 가져본 적도, 가질 예정도 없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나는 한명오의 기분을 조금은 알것 같았다. ‘2차 수정본‘을 읽느냐 읽지 않느냐. 지난 몇 시간 동안 머릿속을 차지한 생각은 그뿐이었다. 소설을 읽음으로 인해 내가 영향받을까 무서웠고, 내가 저지른 일의 결과를 확인하기가 괴로웠으며, 내 모든 ‘미래‘가정해져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두려웠다. 하지만 애초에 그런 건 우스운 일이었다. 한명오 식으로 말하자면.. 아직 이 이야기는 제대로 태어나지도 않았다. - P3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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