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다, 그런 날이었다. 전날 오후부터 불어온 곳도 불어갈 곳도 헤아리기 어려운 바람이 미친년 널뛰듯 불어젖히더니 자정 넘어 가랑비가 흩뿌리기 시작했다. 가랑비에 살금살금 젖은 바람이 비와 함께 땅으로 스며든 것인지 어느 순간 잠잠해졌다. 잠귀 밝은 개들의 잠조차 털끝 하나 건드리지 못한 고요한 비였다. 공기 중으로 스며든 습기가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의 불안을 토닥여 그 밤, 모든 것들의 잠은 그 어느 때보다 깊고 달았다. 그 밤, 하늘과 땅 사이도 비에 씻겨 말 그대로 허공(虛空)이었다.

-알라딘 eBook <찌니주의보> (정지아 지음) 중에서 - P4

동이 틀 무렵 오는 듯 마는 듯, 그러나 건조한 가을 대지를 적시기에는 충분했던 가랑비가 소리 없이 왔듯 소리 없이 사라졌다. 말간 하늘에 태양이 떠올랐다. 더러운 것이 씻겨나간 청정한 대기를 뚫고 햇살은 거칠 것 없이 지상으로 내려앉았다. 유난히 청명하고 유난히 상쾌한 아침이었다. 더 좋을 수 없이 좋았던 그날 아침, 모든 일은 시작되었다.

-알라딘 eBook <찌니주의보> (정지아 지음) 중에서 - P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