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랫동안 말을 잃은 상태를 그녀의 육체는 예민하게 드러낸다.
그녀의 몸은 실제보다 단단하거나 무거워 보인다. 걸음걸이, 손과 팔의 움직임, 얼굴과 어깨의 기름하고 둥근 윤곽 모두가 확고한 경계선을 이룬다. 어떤 것도 외부로 새어나가지 않고, 어떤 것도 내부로 스며들어오지 않는다. - P58

γῆ ἔκειτο γυνή.
한 여자가 땅에 누워 있다. - P59

γῆ ἔκειτο γυνή.
한 여자가 땅에 누워 있다.
χιὼν ἐπὶ τῇ δειρῇ.
목구멍에 눈雪.
ῥύπος ἐπὶ τῷ βλέφαρῳ.
눈두덩에 흙. - P64

말로 열리는 통로가 더 깊은 곳으로 파고들어갔다는 것을, 이대로 가면 아이를 영영 잃을 것이라는 사실을 그녀는 알았다. 알면 알수록 통로는 더 깊은 곳으로 파고들어갔다. 간절히 구할수록 그것을 거꾸로 행하는 신이 있는 것처럼. 신음이 나오지 않았으므로 그녀는 더 고요해졌다. 피도 고름도 눈에서 흐르지 않았다. - P65

그러나 지금 그녀의 몸속에는 말이 없다.
단어와 문장들은 마치 혼령처럼 그녀의 몸에서 떨어져, 보이고 들릴 만큼만 가깝게 따라다닌다.
그 거리 덕분에, 충분히 강하지 않은 감정들은 마치 접착력이 약한 테이프 조각들처럼 이내 떨어져나간다. - P67

그녀는 다만 바라본다. 바라보면서, 바라보는 어떤 것도 언어로 번역하지 않는다. - P67

χαλεπὰ τὰ καλά.
칼레파 타 칼라.
아름다움은 아름다운 것이다.
아름다움은 어려운 것이다.
아름다움은 고결한 것이다.
세 번역이 모두 그르지 않은 것은, 고대 희랍인들에게 아름다움과 어려움과 고결함이 아직 분절되지 않은 관념이었기 때문이다.
모국어에서 ‘빛‘이 처음부터 밝음과 색채라는 두 의미를 함께 가지고 있었던 것처럼. - P69

세계는 환이고 산다는 건 꿈꾸는 것이다, 라고 그때 문득 중얼거려보았다.
그러나 피가 흐르고 눈물이 솟는다. - P71

상상할 수 있겠니.
살아 있는 사람에게서 그런 침묵을 본 건 처음이었어. - P78

이제 스탠드를 끄면 어둠이 찾아오겠지.
눈을 감는 것과 뜨는 것이 거의 다르지 않은, 먹보다 진한 내 눈의 밤이.
하지만 믿을 수 있겠니. 매일 밤 내가 절망하지 않은 채 불을 끈다는 걸. 동이 트기 전에 새로 눈을 떠야 하니까. 더듬더듬 커튼을 걷고, 유리창을 열고, 방충망 너머로 어두운 하늘을 봐야 하니까. - P83

παθεῖν
μαθεῖν
‘수난을 겪다‘는 뜻의 동사와 ‘배워 깨닫다‘는 뜻의 동사입니다.
거의 흡사하지요? 그러니까 지금 이 부분에서, 소크라테스는 일종의 언어유희로 두 가지 행위가 비슷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 P85

그녀는 여전히 희랍어 강사의 해쓱한 얼굴을 올려다보고 있다.
흑판에 씌어진 모국어 단어들이 그녀의 오른주먹 안쪽에, 땀으로 축축해진 육각 연필의 매끈한 표면에 소리없이 으깨어져 있다. 그녀는 그 단어들을 알지만, 동시에 알지 못한다. 구역질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다. 그 단어들과 관계를 맺을 수 있지만, 관계를 맺을 수없다. 그것들을 쓸 수 있지만, 쓸 수 없다. 그녀는 고개를 숙인다.
조심스럽게 숨을 내쉰다. 들이마시고 싶지 않다. 깊게 들이마신다. - P87

아름다운 사물들은 믿으면서 아름다움 자체를 믿지 않는 사람은 꿈을 꾸는 상태에 있는 거라고 플라톤은 생각했고, 그걸 누구에게든 논증을 통해 설득해낼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의 세계에선 그렇게 모든 것이 뒤집힙니다. 말하자면, 그는 자신이 오히려 모든 꿈에서 깨어난 상태에 있다고 믿었습니다. 현실 속의 아름다운 사물들을 믿는 대신 아름다움 자체만-현실 속에서는 존재할 수 없는 절대적인 아름다움만을-믿는 자신이. - P94

지난봄부터 그녀가 밤마다 들이마신 공기 속에 떠돌고 있었을, 호흡기 속으로 무심히 들어와 아직 깜박이고 있을 극미량의 발광체들을 그녀는 알지 못한다. 세포들의 틈을 희미하게 밝히며, 투명하게 관통하며 떠돌아왔을 원소들을 알지 못한다. 제논과 세슘137. 반감기가 짧아 곧 사라졌을 방사성 요오드 131. 혈관 속을 끈질기게 흐르고 있을 뭉클뭉클하고 붉은 피의 입자들을 알지 못한다. 캄캄한 폐와 근육과 장기들을, 세차게 펌프질하는 뜨거운 심장을 알지 못한다. - P96

자정이 가까웠을 때 그녀는 낯선 영화관의 입구에 다다라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마지막 영화의 매표가 끝난 부스에 불이 꺼져 있다. 어두운 매표구의 반투명한 아크릴 칸막이를 향해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다가간다. 여덟 개의 컴컴한 구멍들 가까이 입술을 가져갔다가 흠칫 뗀다. 그 가지런한 구멍들에서 공포스러운 힘이 뿜어져나와, 그녀의 입술과 목구멍에서 강제로 목소리를 흡인해내고 말것처럼. - P97

펄펄 내리는 눈의 슬픔.
응?
그게 엄마 이름이야.
그녀는 얼른 대답하지 못하고 아이의 말간 눈을 들여다보았다. - P100

며칠 전에 새로 깔린 뜨거운 아스팔트 바닥에 개의 허리 아랫부분이 납작한 종잇장처럼 달라붙었다. 앞발과 가슴과 머리만 입체의 형상을 한 개가 거품을 물며 신음한다. 그녀는 무작정 다가가 개의 상체를 끌어안으려 한다. 개는 온 힘을 다해 그녀의 어깨를, 가슴을 물어뜯는다. 그녀는 비명도 지르지 못한다. 두 팔로 개의 입을 막으려 한다. 팔뚝을 한번 더 물어뜯기는 순간 그녀는 기절했고, 어른들이 달려왔을 때 백구는 이미 죽어 있었다고 했다. - P101

눈이 닿는 곳마다 사방에서 빛나던 못물들이 그렇게 보인다.
스무 살이 되던 봄, 야간 경비를 서던 당직실에서 죽은 아버지를 운구해 K시 근교의 선산으로 내려가던 긴 하루였다. 마치 온 세상이 어항으로 변한 듯, 눈부신 청색 못물이 끝없이 담겨 있던 논들이 번쩍인다. - P101

그녀의 검붉은 입술이 부풀어오르던 이상한 꿈을 그렇게 본다.
수차례 반복된 그 꿈속에서, 물집이 터진 자리에서 피와 진물이 흐르던 걸 본다. 앞니가 곧 빠지려는 듯 뿌리째 흔들리고, 침을 뱉자 한움큼 피가 섞여 나오던 걸 본다.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는 손이 돌처럼 단단한 약솜으로 그녀의 입을 틀어막던 걸 본다. 피와 비명을 한번에 밀봉하려는 듯 단호하게. - P101

아무것도 판단하지 않는다.
감정을 부여하지 않는다.

모든 것이 파편으로 다가와,
파편인 채 그대로 흩어진다. 사라진다.

단어들이 좀더 몸에서 멀어진다.
거기 겹겹이 무거운 그림자처럼,
악취와 오심처럼,
끈적이는 감촉처럼 배어 있던 감정들이 떨어져나간다.
오래 침수돼 접착력이 떨어진 타일들처럼.
자각 없아 썩어간 살의 일부처럼. - P103

신령한 것, To Sayóvmov, to daimonion과 신적인 것, To eciov.
to theion의 차이가 궁금한데요. 전 시간에 ecwpia, theoria에 ‘본다‘는 의미가 있다고 하셨는데, 신적인 것, to eciov, to theion도
‘본다‘는 동사와 관련되어 있습니까? 그렇다면 신은 보는 존재이거나, 시선 그 자체인 건가요? - P104

모든 사물은 그 자신을 해치는 것을 자신 안에 가지고 있다는 걸 논증하는 부분에서요. 안염이 눈을 파괴해 못 보도록 만들고, 녹이 쇠를 파괴해 완전히 부스러뜨린다고 예를 들어 설명하고 있는데, 그것들과 유비를 이루는 인간의 혼은 왜 그 어리석고 나쁜 속성들로 인해 파괴되지 않는 겁니까? - P105

방에는 아무도 없었다. 마치 유년 시절의 아침이 돌아온 것처럼, 모든 사물들이 선명한 빛과 형체들로 시야에 들어왔다. 창문이 열려 있었다. 바람이 부는지 짙은 청색 커튼이 조금 흔들렸다. 방 안의 공기는 미세한 유리알들을 머금은 것처럼 선명하게 반짝였다. 엷은 푸른빛으로 칠한 벽에 수많은 물방울들이 맺혀 있는 것이 보였다. 외벽에서 스며들어와 이제 바닥으로 흘러내릴 눈부신 물방울들을 보다가 나는 의아해졌다. 밖에 비가 내리고 있는 건가. 그런데 왜 이렇게 환할까. - P107

눈을 뜨고 있는 꿈을 꾸다가 문득 잠들어 있었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나는 고통을 느끼지 않는다. 상실감도, 체념도 느끼지 않는다. 잠이 천천히 몸에서 가시는 동안 단호히 꿈으로부터 돌아누울뿐이다. 마침내 눈을 뜨고 희끄무레한 천장을, 윤곽이 무너진 사물들을 바라볼 뿐이다. 한번 더 빠져나갈 꿈 밖의 세계가 없다는 사실을 침착하게 확인할 뿐이다. - P107

우리가 가진 가장 약하고 연하고 쓸쓸한 것, 바로 우리의 생명을 언젠가 물질의 세계에 반납할 때, 어떤 대가도 우리에게 돌아오지 않을 거라고.
언젠가 그 순간이 나에게 찾아올 때, 내가 이끌고 온 모든 경험의 기억을 나는 결코 아름다웠다고만은 기억할 수 없을 것 같다고. - P120

그녀는 상체를 앞으로 기울인다.
연필을 쥔 손에 힘을 준다.
고개를 더 수그린다.
단어들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
입술을 잃은 단어들.
이뿌리와 혀를 잃은 단어들,
목구멍과 숨을 잃은 단어들이 잡히지 않는다.
몸이 없는 헛것처럼, 형체가 만져지지 않는다. - P126

방금 새가 건물 안으로 날아들어왔다. 어린애의 주먹보다 작은 박새다. 방금 들어오고도 나갈 길을 찾을 수 없는지, 다급하게 울며 콘크리트 벽에, 이층으로 올라가는 층계의 난간에 머리를 들이받는다.
막 입구로 들어서던 여자가 소리없이 멈춰선다. 새가 세번째로 벽에 머리를 들이받는 것을 보고 뒤돌아선다. 한쪽만 열려 있던 유리 현관문을 다른 쪽까지 활짝 연다. 혀와 목구멍보다 깊은 곳에서 말한다.
밖으로 나가야지. - P128

가끔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나요.
우리 몸에 눈꺼풀과 입술이 있다는 건.
그것들이 때로 밖에서 닫히거나,
안에서부터 단단히 걸어잠길 수 있다는 건. - P161

아무리 시간이 흘렀어도, 그녀가 결코 알아낼 수 없는 것이 있다.
그날, 그 뜨거운 아스팔트에 납작하게 달라붙어 있던 백구는 왜 그녀를 물었던 걸까?
그것이 그에겐 마지막 순간이었는데.
왜 그토록 세게, 온 힘을 다해 그녀의 살을 물어뜯었을까.
왜 그토록 어리석게, 그녀는 끝까지 그를 껴안으려고 했을까. - P168

눈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침묵이라면, 비는 하늘에서 떨어지는 끝없이 긴 문장들인지도 모른다.
단어들이 보도블록에, 콘크리트 건물의 옥상에, 검은 웅덩이에 떨어진다. 튀어오른다. - P174

눈을 뜨지 않은 채 그는 입맞춘다. 축축한 귀밑머리에, 눈썹에 먼 곳에서 들리는 희미한 대답처럼, 그녀의 차가운 손끝이 그의 눈썹을 스쳤다 사라진다. 그의 차디찬 귓바퀴에, 눈가에서 입가로 이어지는 흉터에 닿았다 사라진다. 소리없이, 먼 곳에서 흑점들이 폭발한다. 맞닿은 심장들, 맞닿은 입술들이 영원히 어긋난다. - P184

마치 시간이 나에게 입맞추는 것 같았어요.
입술과 입술이 만날 때마다 막막한 어둠이 고였어요.
영원히 흔적을 지우는 눈처럼 정적이 쌓였어요.
무릎까지, 허리까지, 얼굴까지 묵묵히 차올랐어요. - P190

나는 두 손을 가슴 앞에 모은다.
혀끝으로 아랫입술을 축인다.
가슴 앞에 모은 두 손이 조용히, 빠르게 뒤치럭거린다.
두 눈꺼풀이 떨린다. 곤충들이 세차게 맞비비는 겹날개처럼.
금세 다시 말라버린 입술을 연다.
끈질기게, 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내쉰다.
마침내 첫 음절을 발음하는 순간, 힘주어 눈을 감았다 뜬다.
눈을 뜨면 모든 것이 사라져 있을 것을 각오하듯이. - P19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