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오는 날을 좋아하는 이들의 감성에 잘 공감하지 못한다. 추적추적 내리는 비가 낭만적일 때도 있지만, 그런 생각도 잠시. 일단 집을 나서면 비는 여간 귀찮은 게 아니다. 별다른 짐이 없어도 최소한 한 손에는 휴대폰, 다른 손에는 가방을 들고 다니는 내게 우산은 또 하나의 성가신 짐짝이다. 원래도 그리 반가운 존재는 아니었으나 조금 불편한 수준이었던 비가 어느 순간 내게 정서적인 영향을 주고 있음을 발견했다. - P14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Pierre Auguste Renoir의 「우산」 속 풍경은 얼핏 보면 축제의 한 장면으로 착각할 만큼 경쾌한 생동감이 느껴진다. 중앙에 반쯤 가려진 여자가 하늘을 확인하며 우산을 펴는 것을 보면이제 막 비가 오기 시작한 듯하다. 파리 시민들은 모두 동일한 색채의 파란 우산을 꺼내들고 각자의 걸음을 재촉하고 있다. 겹겹이 겹쳐진우산들은 마치 하늘로 팡팡 튀어오르는 모양새다. 비 오는 거리의 칙칙하고 무거운 분위기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오히려 그림 속 인물들에게서 옅은 미소와 함께 알 수 없는 설렘이 묻어난다. 비 오는 날의 설렘이라. - P17
똑같이 비로 시작된 하루라도 꼭 한 번은 해가 뜨는 여름날과 달리, 11월부터 거의 3월까지 런던은 늘 축축하고 그늘진다. 거기에 해까지 짧아지니 사람들은 쉽게 우울감에 빠져든다. 우리가 부러워하는 유럽의 휘황찬란한 크리스마스 장식들은 을씨년스러운 날씨와 그로 인한 우울에서 벗어나기 위한 안쓰러운 노력의 일환이다. 시끌벅적한 연말이 지나고 다시 휑한 거리에 비만 오는 1월이 찾아올 때 가장 많은이들이 무력감을 호소한다. 오죽하면 ‘1월 우울증January Blues‘이라는 말이 다 있을까. - P17
르누아르는 19세기 후반 인상주의의 대가로, 일상에서 마주치는 순간의 인상을 화폭에 담아내는 화가였다. 그가 우산 속 장면을 목격했을 때 비를 맞는 파리 시민들에게서 경쾌한 설렘이 뿜어져나왔고, 그 인상을 작품으로 기록했다. 흔하디흔한 비, 너무 자주 내려 우울까지 안기는 비가 뭐 그리 좋았을까? 작품의 제목에서 힌트를 얻을 수있다. 사실 원제는 ‘우산들 Les Parapluies‘이라고 번역해야 더 정확하다. 르누아르가 주목한 것은 비 오는 날의 ‘비‘가 아닌, 하나둘씩 펼쳐지는 ‘우산들‘이었다. 사람들을 설레게 한 것도 비 자체가 아닌, 비 오는 날펼 수 있는 우산이었다. - P18
인류가 날씨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는 만큼, 우산은 문명이 시작된 이래 어느 시대에나 존재했다. 그러나 그 형태와 용도는 지금과 사뭇 달랐다. 우산을 뜻하는 영어 단어 ‘Umbrella‘는 그림자 혹은 그늘을 뜻하는 라틴어 ‘Umbra‘에서 파생했다. 어원에서 알 수 있듯 역사적으로 우산은 비를 막는 용도보다는 햇빛을 가리기 위한 목적으로 등장했다. - P19
1852년, 새뮤얼 폭스가 개발한 강철 튜브 우산이 이러한 문제를 해결했다. 폭스는 강철의 속을 뚫은 튜브 형태의 우산살로 우산을 대폭 경량화하는 데 성공했다. 게다가 강철은 이전의 재료들보다 훨씬 튼튼하면서도 저렴했다. 폭스의 발명 덕분에 19세기 후반, 진정한 우산의 대중화가 실현되었다. 당시 예술작품에서 우산 쓴 모습이 급증하는 이유는 이러한 시대적 배경 때문이다. - P25
르누아르의 우산이 그려진 1880년대는 우산의 대중화가 실현되어 귀족과 부르주아뿐만 아니라 파리 시민 다수가 값싸고 가벼운 우산을 사용하기 시작한 때였다. 우산 속 인물들에게서 느껴지는 묘한 설렘은 아마도 이런 이유에서다. - P27
르누아르가 우산을 그리던 때는 달랐다. 이때의 파리 시민들은내심 비가 오길 바라는 마음으로 새로 구입한 우산을 챙겨다니다가, 드디어 비가 내리기 시작하자 우산을 사용할 수 있다는 소소한 기쁨을 안고 우산을 펼쳐들었을 것이다. 날은 어둡고 칙칙했을지 몰라도 빗속에서 잔잔한 즐거움이 피어났다. 르누아르는 이 장면을 포착했다. - P28
미술관에 들어올 때 바깥에는 검은 비가 내리고 있었다. 관람을 마치고 나올 때쯤이면 비가 다 그쳤기를 바랐다. 르누아르의 우산이 내뿜는 행복한 기운을 받은 걸까. 이제 꼭 그렇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밖에 폭우가 내리든, 보슬비가 내리든, 아니면 다시 해가 비추든 남은하루를 충분히 화사하게 만들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 P30
태생적으로 공간지각능력이 부족한 길치이자 방향치인 나는 살면서 나만큼 운전을 못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자동차는 고사하고 모든 종류의 운전이 그랬다. 어린 시절 놀이공원에서 범퍼카를 탈 때면 혼자 줄곧 벽을 박으며 끙끙댔다. 균형감각을 상실한 안타까운 몸뚱이로 인해 자전거 배우기도 실패했다. 지금도 지하철을 내릴 때 오른쪽 왼쪽을 의식적으로 따지는 수준이니 운전면허 따기는 또 얼마나 험난했을까. 두 번의 낙방 끝에 겨우겨우 얻은 면허증을 고이 장롱으로 모시며, 평생 운전할 일 없는 서울에만 살겠다고 굳은 다짐을 했다. - P31
창희의 말이 귀에 들려올 무렵, 나는 인생 최대의 노잼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겉으로만 보면 여느 때보다도 바빴다. 그러나 열심히만 살고 있을 뿐, 사실은 뭘 해도 재미가 없었다. 좋아하는 일을 해도 재미보다는 걱정과 스트레스가 앞섰고, 좋아하는 사람과 좋은 시간을 보내도 알 수 없는 허무를 느꼈다. 더 큰 문제는 앞으로 어떤 삶이 펼쳐져도 집 나간 재미의 감각이 돌아오지 않으리라는 불길함에 있었다. 인생 30년 차가 되니 기쁨에도 내성이 생긴 것일까. - P32
장 베로Jean Béraud는 19세기 후반 벨 에포크 파리를 그린 인상주의화가다. 언젠가 파리의 한 기념품 가게에서 파리 풍경이 담긴 엽서를고르고 있었다. 그러다 내 손에 들린 대부분의 그림에서 ‘Jean Béraud‘ 라는 동일한 서명을 발견했다. 이 화가의 존재를 처음으로 알게 된 순간이었다. 장 베로는 주로 패션과 문화로 북적이던 19세기 파리의 거리를 그렸다. 현장감 넘치는 그의 작품들은 마치 그 시절의 패션 잡지를 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 P33
기념품 가게에서 고른 엽서 중 특히 내 눈을 사로잡은 그림은 「샹젤리제의 원형교차로」였다. 당시에는 작품의 제목도 몰랐지만, 샹젤리제 거리를 달리며 쿨하게 인사하는 두 여인, 특히 빨간 타이에 중절모를 쓰고 직접 마차를 운전하는 그 힙한 모습에 ‘이게 파리의 스웨그인가! 하는 감탄이 절로 나왔다. - P33
운전 연수를 시작하고 이 그림을 보았을 때, 두 여인에게서 정해진 삶의 공간을 벗어나는 이들의 기대감과 짜릿함을 읽었다. 나 스스로 운전을 노잼 극복의 비책으로 여겼기 때문인지, 도심으로 향하는 두 여인에게서 새로운 재미를 찾아 집구석을 박차고 나오는 설렘이 느껴졌다. 특히 왼쪽의 여성은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복장을 하고 운전석에 올라타며 ‘정통‘으로부터 더 멀리 달아난다. 외출을 한다 해도 한껏 꾸민 드레스에 에스코트를 받는 편이 당시 여성에게는 더 어울리는 역할이었다. 그런데 이 여인은 집이라는 제한된 공간과 사회적으로 기대되는 역할을 모두 이탈해 자신이 설정한 방향대로 인생의 마차를 운행하고 있다. - P35
남녀의 성역할 구분이 뚜렷했던 19세기 유럽에서 더 무료한 일상을 보낸 성별은 분명 여성이었다. 가정에 귀속된 여성의 삶을 공적 공간으로 확장시키며 재미를 불어넣은 데에는 도시, 상업, 자본주의의 역할이컸다. 19세기 후반, 유럽 수도들이 본격적으로 대도시로 성장할 무렵, 사회는 하층계급 여성을 핑크칼라Pink collar 노동 수요의 공급자로서, 중상류층 여성을 새로운 소비문화의 주도자로서 집밖으로 불러냈다. - P36
상황이 바뀐 것은 1870년대부터였다. 1853~70년 사이 파리는 조르주외젠 오스만 남작의 도시 개조사업을 통해 오늘날의 세련된 외관으로 변신했다. 일명 ‘오스만화Haussmanization‘라 불리는 이 유명한 사업으로 도로, 건축, 위생 등이 근대적인 탈바꿈을 이룬 가운데,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대로의 신설이었다. 중세의 골목길은 널찍하게 직선화된 도로로 바뀌었고, 개선문을 중심으로 뻗어나간 열두 개의 방사형대로가 도심과 외곽을 이어주었다. 차도와 인도가 구분됨에 따라 마차의 운행이 수월해졌다. 깔끔해진 도로변에는 카페, 상점, 극장, 광장, 백화점 등 근대적 건축물이 줄지어 들어섰다. - P37
일상의 답답함을 해소할 수단으로 자동차를 원했던 창희, 그리고 인생 최대 노잼의 위기를 겪으며 운전을 결심했던 나의 마음과 그림 속 그녀의 마음이 크게 다르지는 않을 것이다. 한 발 더 나아가자면, 그녀와 비슷한 생각을 품었던 그 시대 여성들에게 더 온전한 해방감을 선사한 수단은 따로 있었다. 바로, 다른 누군가의 도움 없이 100퍼센트 혼자만의 운전을 즐길 수 있게 해준, 자전거였다. - P41
자전거가 남녀노소의 스포츠로 자리잡은 것은 1890년대부터였다. 결정적으로 1885년에 영국의 발명가 존 켐프 스탈리가 ‘안전 자전거를 개발하면서 자전거를 향한 부정적 인식을 크게 바꾸었다. 현대 자전거의 시초로 여겨지는 이 모델은 이후 추진력과 편리를 보완한 차기 모델들에 이르러 대중적인 이용자층을 확보했다. 가볍고 저렴한 자전거가 빠르게 보급되자 처음에는 상류층부터, 곧 중하류층까지 자전거를 즐기는 여성이 늘어났다. 물론 이를 둘러싼 사회적 논쟁이 있었다. 여성이 자전거를 타려면 다리를 벌리는 ‘저속한 자세를 취해야 한다는문제와 더불어, 더 중요하게는 보호자가 외출에 동행하기 어렵다는 문제 때문이었다. - P44
이렇게 자전거가 선사한 물리적 해방감은 여성들의 자신감을 북돋아 더 큰 정치적·경제적 해방까지 열망하게 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혹은 그 반대로, 오랫동안 노잼 상태에 머물러 있던 여성들의 해방 욕구가 이미 포화점에 도달해 어떤 형태로든 표출될 수밖에 없는 상태였기에 자전거라는 물리적 수단이 등장했을 때 그녀들이 누구보다 더 열렬한 수용자가 되었다고 볼 수도 있다. - P45
삶의 운전도 그러하지 않을까. 잡념을 뒤로한 채 마음 가는 곳으로달리다보면, 분명 즐거움이 두려움을 능가하는 순간이 올 터이다. 달리고 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 훨씬 더 살아 있음을 느낄 테고 그 순간보고, 듣고, 경험하는 모든 것은 설령 잘못된 길에 들어서더라도 이내 올바른 방향으로 재정비하는 현명함을 가져다줄 것이다. - P48
MBTI를 포함한 각종 성격 유형 검사는 나 같은 사람을 내향형 인간으로 분류한다. 외향인이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힘을 얻는다면, 내향인은 혼자만의 시간으로부터 힘을 얻는다고 이 기준으로 보자면 나는 확고한 내향인이다. 아무리 친한 사람과 좋은 시간을 보내더라도, 일단 사람 속에 있으면 마치 충전기를 꽂지 않은 휴대폰처럼 서서히 배터리를 소모한다. 불편한 사람 앞이나 자리에서 일어나는 ‘배터리 광탈 현상‘은 말할 것도 없다. 따라서 나의 무탈한 일상과 원활한 인간관계를 위해서라도 때때로의 고독은 반드시 사수해야 한다. 그 고요함속에서 무엇을 하고, 어떤 자원을 얻느냐에 따라 삶의 에너지가 확연히 달라진다고 할까. 그러니 ‘내가 집에 안 가면 내 가정이 무너진다‘는그 말이 그저 농담만은 아니다. - P51
코로나 시대에 유난히 자주 언급된 화가가 있다. ‘미국식 사실주의‘ 의 선구자라 불리는 에드워드 호퍼Edward Hopper다. 호퍼의 작품들은 팝아트를 연상시키는 색채감, 영화 같은 극적인 화면 구성과 빛의 사용을 공통적인 특징으로 한다. 그 미적인 외관 아래 대도시의 단절과 고독의 실상을 담아냈다는 점에서 호퍼는 지난 한 세기 동안 ‘현대인의 내면을 가장 예리하게 표현한 화가‘라는 칭송을 받았다. - P53
우리 도시가 뜻밖의 바이러스로 불가항력적 단절을 경험할 때, 여러 지면에서 호퍼를 ‘코로나 블루‘를 대변하는 작가로 소개했다. 가장 자주 언급되는 작품은 그의 대표작 <밤을 지새우는 사람들>이었다. 거리가 텅 빈 늦은 밤, 잠들지 않는 뉴욕을 그린 작품이다. 한낮 도시의 불빛과 소음은 소거되고, 정적이 드리운 배경에 한 심야식당의 조명만 거리를 밝히고 있다. 바의 손님들은 과묵하고 무심한 얼굴로, 어떤 교류나 대화 없이 그저 각자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 그 모습이 멍때리는 것 같기도 피곤한 듯하기도 한데, 분명 일말의 열심이나 역동성은 느껴지지 않는다. - P54
호퍼의 다른 작품에서도 작중 인물들은 대개 이와 흡사한 분위기를 풍긴다. 그로 인해 그들의 내면은 항상 쓸쓸함, 외로움, 우울 등의 멜랑콜리한 정서들로 해석되어왔다. 물리적으로는 가깝지만 심리적으로는 소외된 20세기 도시인들의 불안과 공허를 사실적으로 그려냈다는 평가가 호퍼를 향한 가장 흔한 찬사였다. 코로나 시대에 호퍼가 더 자주 소환된 까닭은 고립과 우울이 현재를 사는 우리만의 것이 아님을 보여주며 ‘그러니 힘내자‘는 나름의 위로를 전하기 위해서였을까? - P54
지극히 개인적인 시각에서 바라보니, 작품에 흘러넘치는 단절과 적막에서 외로움보다는 편안함이 느껴졌다. 호퍼의 피사체들은 늦은 밤 드디어 찾아온 고요한 시간을 가장 익숙하고 편한 장소에서 휴식하며 보내고 있었다. 아마도 관계에 지쳐 있던 때, 내가 갈구하던 시간을 그들이 누리고 있다고 여겼기 때문일 것이다. - P55
‘초연결사회‘를 살아가는 현대인에게는 온전히 자기에게 집중할 고요의 시간이 때때로 필요하다. 누군가 고독을 누리는 나에게 "넌 왜 이렇게 고립되어 있어? 그러니까 네가 외롭지"라고 충고한다면, 고독을 그저 부정적으로만 취급하는 태도에 기분이 상할 것이다. 호퍼 그림의 인물 중 그런 억울함을 가진 이들이 있지 않을까? 그저 무표정으로 앉아 있었을 뿐인데,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조용히 그 시간을 즐기고 있었는데, 100년 가까이 ‘우울한 뉴요커‘로 기억된다면 무척이나 당황스러울 것이다. 그들의 모습에서 안락함을 느끼는 나와 같은 내향인을 위해, 내 마음대로 호퍼를 읽는 지금의 시각에 그냥 머무르고 싶다. - P56
호퍼에 대한 통념적인 해석은 그가 활동했던 시대와 직접적으로맞닿아 있다. 모든 예술이 자기 시대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지만, 호퍼의 작품은 그보다 더 나아가 그 시대 자체를 ‘상징‘한다. 호퍼를 해설하는 글들은 거의 항상 호퍼 개인의 삶 이상으로 그가 살았던 시대를 중점적으로 다룬다. 이는 그만큼 호퍼가 지금의 명성을 얻기까지 당대 사람들이 호퍼의 그림을 이해하고 수용했던 방식이 중요하게 작용했다는 의미다. - P56
미국이 본격적인 성장 가도에 오른 것은 제1차세계대전(1914~18)이후였다. 유럽이 전쟁의 상처에 허덕일 때 미국은 세계 최대의 채권국이자 수출국으로 명실상부 최고 호황기를 누렸다. ‘광란의 20년대Roaring 20s‘라고 불릴 만큼 이 시기 미국은 새로운 산업과 문화의 잭팟을 팡팡 터트렸다. 2차 산업 기술 혁신으로 자동차를 비롯한 새로운 제조업이 융성했고, 유전의 잇따른 발견으로 버젓한 산유국이 되었으며, 높아진 삶의 질을 따라 스포츠, 영화, 음악 등 대중문화가 꽃폈다. 1920년대의 분위기는 재즈음악에 몸을 맡기고 신나게 파티를 즐기는 젊은이들로 대변된다. - P57
그러나 호화로운 외관의 이면에는 반드시 어둠이 존재한다. 소득불균형과 양극화, 인종·지역·성별 간의 불평등, 버블 붕괴의 위험 등 지금은 우리가 예견할 수 있는 급격한 팽창의 부작용이 당시 미국 사회에 편재해 있었다. 결국 ‘광란의 20년대는 1929년 10월 29일 ‘검은 화요일‘의 주가폭락으로 막을 내리며, 그동안의 징조와 불안이 괜한 망상이 아니었음을 확인시켰다. 대공황의 최고조에서 미국의 실업률은 25퍼센트까지 치솟았고, 전 세계 GDP는 15퍼센트 이상 하락했다. 미국은 비교적 이른 1933년부터 회복세를 보였지만, 불과 10년 사이 최절정과 밑바닥을 오간 미국인들의 정신 상태는 혼미할 수밖에 없었다. - P58
사회학자 데이비드 리스먼의 명명에 따르면, 이 시대 미국인들은 집단으로부터 고립되지 않기 위해 애쓰면서도 결국 내면의 고립감으로 번뇌하는 ‘고독한 군중‘이었다. 이들이 호퍼의 작품에서 소외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 것은 꽤 필연적인 수순이었다. - P58
밤을 지새우는 사람들이 공개된 1942년의 상황은 더 극단적이었다. 그때 미국은 제2차세계대전(1939~45)의 한중심에 놓여 있었다. 미국 참전의 도화선이 된 일본의 진주만공습이 1941년 12월이었으니 그다음해의 분위기는 상상 이상으로 살벌했다. 사실 결과적으로 세계대전은 미국 경제의 돌파구이자 진정한 ‘팍스 아메리카나‘ 시대를 연 일등공신이었지만 그렇다고 전쟁의 긴장과 공포까지 비껴갈 수는 없었다. 특히 1942년은 미국 본토가 공격당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그 시대 정서를 더 피폐하게 만들 때였다. - P59
이토록 불안정한 시대에 밤을 지새우는 사람들이 등장했다. 호퍼의 그림은 당시 대세였던 추상주의 회화보다 훨씬 쉽고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덕분에 대중에게 접근성이 좋았고, 강한 정서적 몰입감을 유발했다. 첫 전시 때부터 관객들은 당대의 불안과 단절이 투영된 듯한 작품에 아낌없는 관심을 보냈다. 각종 미디어를 통해 작품이 재생산되며 호퍼는 쏟아지는 국민적 사랑을 한몸에 받았다. 그렇게 미국인들의 마음속에 호퍼는 감추어진 미국의 진실을 그려내는 ‘가장 미국적인 화가‘로 각인되었다. - P59
나로서 나답게 존재하기 위해 가끔 사람들을 떠나 안으로 침잠해야 했다. 그 고요함 속에서만 들리는 진짜 내 목소리가 있었다. 그 진실 위에 중심을 잡고 설 때 나는 비로소 ‘주체‘가 되어 관계의 풍랑에서도 요동하지 않았다. 나에게 좋은 사람들을 더 잘 알아보았고, 그들을 위해 더 좋은 사람이 되고자 했다. 나를 갉아먹는 관계에 집착하거나 나를 바꾸면서까지 사랑받으려 하지 않았다. 고독은 나를 나로 만들었고, 그런 나를 지키고 사랑할 이들이 누구인지 알려주었다. 그래서 여전히 자기를 위해서나, 자기 곁의 사람들을 위해서나 때때로 고독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 P67
내게 진정한 휴식은 산책과 독서다. 이 둘을 합쳐 좋아하는 길을 따라 걷다가 서점에 들러 이 책 저 책 훑어보는 시간이 최고의 휴식이다. 늘 입버릇처럼 ‘한양에 살고 싶다‘라는 말을 하고는 하는데, 종로의고즈넉한 길을 거닐다가 잠시 고궁에도 들렀다, 새로운 독립서점을 발견하기도 하고, 광화문 교보문고까지 다녀오는 이 코스를 너무나 사랑한다. 무념무상으로 걷다보면 굳이 애쓰지 않아도 생각이 정리되고, 우연히 펼친 책에서 잔잔한 위로와 새로운 아이디어를 얻는다. 그렇게 새책을 몇 권 안고 집으로 돌아오면 크고 작은 휴식시간을 채워줄 양식이 책장에 추가된 데 만족감을 느낀다. - P70
성 제롬을 주제로 한 작품들은 대개 비슷한 분위기를 풍긴다. 제롬은 정말로 ‘골방‘이라 불릴 법한 공간에서 책 읽기에 몰두하고 있다. 그곳은 비좁고 흐트러진, 세상과 단절된 듯한 장소다. 제롬에게서 학자로서의 고뇌와 예민함이 느껴진다. 성경을 번역하고, 수많은 책을 쓰기 위해 그는 종일 난해한 텍스트에 골머리를 앓았을 것이다. 그의 사명과 위치를 생각할 때 이런 어두운 골방이 나름 잘 어울린다. - P72
그러니 누구보다 더 많은 책에 시달렸을 성 제롬이 책과 함께 휴식하는 모습이 아주 낯설고도 부러웠다. 마음의 쫓김 없이 읽고 싶은 책을 읽을 때 채워지는 기분좋은 에너지를 안다. 그러나 온갖 핑계로 그러한 시간을 갖지 못한 지 얼마나 오래되었던가. - P76
서양사에서 독서의 대중화를 논할 때마다 언급되는 두 가지 사건이 있다. 하나는 기술적인 사건인 금속활자 인쇄술의 발명이고 다른 하나는 이 기술의 힘을 빌려 발생한 종교개혁이다. 인쇄술이 책의 신속한 대량생산을 가능하게 했다면, 종교개혁은 실제로 그 기술이 사용되는 수요를 만들었다. 기술의 등장으로만 보면 아시아가 유럽보다 앞섰지만, 인쇄술을 향한 대중적 수요가 존재한 유럽에서 인쇄술은 훨씬 더 급격하고 강한 충격을 일으켰다. - P80
시작은 종교적 관심이었더라도 대중의 독서는 곧 종교 지도자들이 바라는 한계선을 넘어 훨씬 더 세속적인 영역으로 들어갔다. 그들 손에 잡힌 책의 종류가 무엇이었든, 과거처럼 타인의 말에 고개만 끄덕이지 않고 스스로 읽고, 생각하고, 즐기고 판단한다는 점이 중요했다. 외부의 정보와 이야기를 자기 내면에서 처리해, 그로부터 추출되는 사유와 감정을 온전한 자기 것으로 삼을 수 있었다는 점. 이것이 중대한 변화였다. - P85
‘독서가 휴식이 될 수 있을까?‘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놀랍게도 휴식이 된다. 집중을 방해하는 것들을 물리치고 서서히 문장에 빠져들다보면, 뇌리가 번쩍이고 심장이 쿵 하는 순간을 맞닥뜨린다. 그때 감도는 진한 엔도르핀은 다른 어떤 휴식보다 더 상쾌하고 또렷한 쉼을 건넨다. 거기서 얻은 비전과 용기로 내 앞을 가로막은 문제의 장벽을 가볍게 넘어서기도 한다. - P87
19세기 말 파리 예술계에서 ‘가장 친구로 사귀고 싶지 않은 화가‘ 를 투표한다면 에드가르 드가Edgar Degar가 1위 후보에 오를 확률이 높다. 대쪽 같고 괴팍한 성미로 유명한 드가는 편히 다가갈 수 있는 유형의 사람은 아니었다. 모두가 인정을 갈망하는 세계에서 그는 어떤 인정도, 성공도, 명예도 바라지 않았다. 그런 그에게 당연히 사교성이나 처세술은 없었다.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 촌철살인 돌직구로 어디를가나 분위기를 싸하게 만드는 그였다. 그의 기준에서 ‘무늬만 예술가‘인이들에게는 우월의식을 갖고 티를 팍팍 내며 모멸감을 안길 정도였다. - P91
드가는 친구들에게 따로 또 같이, 여러 번 포즈를 취하게 하며 그의 작품 중 가장 복잡하고 정교한 초상화를 완성했다. 독립된 환경을 선호하는 그가 여섯 모델을 데리고 통제가 어려운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것만으로도 친구들을 향한 애정의 깊이를 가늠할 수 있다. 내 예상과 달리 작품은 멀어지는 우정과 전혀 관련이 없었다. 그토록 즐거웠던 기억을 이렇게나 서먹하게 그려낸다는 게 한편으로는 너무 ‘드가‘다워 웃음이 난다. - P93
드가의 사연을 접하며 이 상황에 정서적으로 완전히 몰입했다. 드가는 내 마음에 드는 사람은 아니지만 어쩔 수 없이 그에게 가장 감정이입이 되었다. 인간관계에 미숙하고 빈틈없이 야박하면서도 자신을 포용해주는 이에게 약하고 그에게 깊이 의지하는 모습이 어딘가 나와 닮았다. 나의 성격이 드가만큼 괴팍하지는 않다고 믿고 싶지만 나 또한 그리 개방적이거나 처세술이 좋은 사람은 아니다. 한번 아니라고 판단되면 두 번의 고민 없이 마음에서 잘라내는 냉정함도 가지고 있다. - P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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