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이 막힌다. 눈이 맵다. 뜨거운 불길이 넘실댄다. 독한 연기가 코를 찌른다. 소름끼치는 비명소리가 들린다. 시커먼 연기가 눈앞을 가린다. 기둥이 쓰러진다. 불꽃이 날아오른다. 앞이 보이지 않는다. 불기둥이 치솟는다. 천장이 무너져내린다. 불길이 덮친다. 순간, 눈을 뜬다. 온몸이 차갑게 식어 있다. 쇠창살의 그림자가 튼튼한 그물처럼 벽에 드리워져 있다. 어둠 속에서 누군가 숨죽여 운다. 멀리 간수의 구둣발 소리가 들린다. 우는 이에게 누군가 윽박지르는 소리도 들린다. 몸을 잔뜩 웅크린다. 울음소리가 잦아든다. 눈을 감는다. 발소리가 멀어진다. 무덤 같은 정적이 찾아온다. 잠시 후, 춘희는 다시 까무룩 잠이 든다.
-알라딘 eBook <고래 - 한국문학전집 019> (천명관 지음) 중에서 - P338
언제나 그랬듯이 그녀는 자신의 주변에서 일어난 상황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그녀는 사라진 사람들을 하나씩 머릿속에 떠올렸다. 금복과 文, 점보와 쌍둥이자매, 생선장수와 애꾸, 그리고 공장에서 일하던 인부들……
-알라딘 eBook <고래 - 한국문학전집 019> (천명관 지음) 중에서 - P339
그것은 해바라기가 아니었다. 그날 춘희가 종이 위에 정성스럽게 그려넣은 것은 바로 공장 주변에 지천으로 피어 있던 개망초였다. 춘희가 서명란에 왜 개망초를 그려넣었는지 그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녀가 기차를 타고 평대에 처음 도착할 때부터 단숨에 그녀의 눈길을 사로잡은 이후, 개망초는 언제나 그녀에게 가장 친근한 이미지로 각인되어 있던 터라 그녀가 조서에 개망초를 그려넣었다고 해서 이상할 건 하나도 없었다. 경찰 또한 서명의 모양이야 어찌됐든 피의자에게 직접 서명을 받았다는 사실에 매우 흡족해하며 마침내 긴 심문과정을 모두 끝냈다.
-알라딘 eBook <고래 - 한국문학전집 019> (천명관 지음) 중에서 - P342
춘희는 차창 밖을 내다보며 그 옛날, 자신의 엄마인 금복과 함께 기차를 타고 평대에 올 때의 기억을 떠올렸다. 당시 기차 안에서 보았던 광활한 하늘과 황토색의 밭고랑, 그리고 기찻길 옆에 피어 있는 개망초는 여전히 그대로였다. 그녀는 그때의 풍경을 하나도 빠짐없이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알라딘 eBook <고래 - 한국문학전집 019> (천명관 지음) 중에서 - P348
춘희는 평등하게 다뤄지지 않았다. 최초의 여성 법관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담당판사는 춘희를 보자마자 단숨에 결론을 내렸다. —세상에 저런 형상을 가진 여자는 없어. 저건 사람이 아니라 괴물이야.
-알라딘 eBook <고래 - 한국문학전집 019> (천명관 지음) 중에서 - P344
처음에 그녀는 자신이 또다른 벽돌공장으로 왔다고 생각했다. 사방으로 둘러싸인 붉은 벽돌이 낯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당연히 그녀는 교도소에 대한 개념이 전혀 없었다. 때문에 벽돌을 굽는 가마가 보이지 않는 것을 의아하게 여겼는데, 이상한 점은 또 있었다. 언제나 거친 사내들로 들끓던 공장이 어찌된 일인지 여자들로만 가득 채워진 것이었다. 춘희는 여덟 명의 여죄수들이 있는 한 수용실에 수감되고 나서야 그곳이 벽돌공장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았다.
-알라딘 eBook <고래 - 한국문학전집 019> (천명관 지음) 중에서 - P346
춘희가 수감된 감방에는 수술용 메스로 변심한 애인의 경동맥을 잘라 살해한 간호사와 화장실에서 아이를 낳아 변기에 흘려버린 어린 미혼모, 두 딸과 남편에게 청산가리가 든 음식을 먹여 독살한 주부, 이십 년 동안 두 집 살림을 하며 정부의 아이를 여덟 명이나 낳은 파렴치한 간통녀, 외로운 홀아비만을 골라 돈을 뜯어낸 꽃뱀 등 온갖 부류의 범죄자들이 수감되어 있었다. 때문에 비록 서너 평에 불과한 좁은 공간임에도 불구하고 감방 안은 조용할 날이 없었다.
-알라딘 eBook <고래 - 한국문학전집 019> (천명관 지음) 중에서 - P347
그해 가을, 그녀는 비밀수첩을 한 번도 써먹어보지도 못한 채 사형대에 목이 달리고 말았다. 그녀는 마지막으로 할말이 없냐는 사형집행인의 말에 다음과 같이 중얼거렸다. —개새끼들, 이제 네깟놈들이 박을 구멍은 아무데도 없어.
-알라딘 eBook <고래 - 한국문학전집 019> (천명관 지음) 중에서 - P349
한편, 청산가리는 언제나 감방 안을 쉴새없이 쓸고 닦았다. 그리고 입버릇처럼 ‘인생을 살아간다는 건 끊임없이 쌓이는 먼지를 닦아내는 거나 다름이 없다’는 철학적인 말로 단순한 죄수들의 머리를 복잡하게 만들었다. 그녀는 왜 두 딸과 남편을 독살했는지에 대해서는 한 번도 입을 열지 않았다. 그러다 사라지기 며칠 전, 문득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 일이 그들에게 꼭 나쁜 것만은 아니었어.
-알라딘 eBook <고래 - 한국문학전집 019> (천명관 지음) 중에서 - P349
이때부터 간호사의 이상한 적대감은 미혼모 대신에 춘희에게로 향했다. 그녀는 동료들 앞에서 언젠가 반드시 자신의 손으로 춘희를 죽이겠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춘희를 죽일 때는 자신이 알고 있는 수십 가지 방법 가운데 가장 악독한 방법을 쓰겠다고 했는데, 그것이 무엇인지는 끝내 밝히지 않았다. 다만, 다른 죄수들에게 혹시 아침에 일어났을 때 춘희가 죽어 나자빠져 있더라도 놀라지 말라고 늘 경고하곤 했다.
-알라딘 eBook <고래 - 한국문학전집 019> (천명관 지음) 중에서 - P350
한편, 그는 하느님이 주신 특별한 소명을 실천하고 인류의 유전적 소질을 향상시키기 위해 자신의 영지에서 주어진 권한 이상의 업무를 수행했다. 그것은 수감자들을 상대로 단종수술斷種手術을 시행한 것이었다. 그는 강제로 남자 죄수들의 정관을 잘라내고 여죄수들의 나팔관을 묶어 생식능력을 제거함으로써 그들이 더이상 세상에 범죄의 씨앗을 퍼뜨리지 못하도록 조처했다. 그것을 그는 ‘매립’이라고 불렀다.
-알라딘 eBook <고래 - 한국문학전집 019> (천명관 지음) 중에서 - P354
교도소장은 정년퇴임을 할 때까지 꾸준히 소각과 매립을 계속했고 여든두 살의 나이로 세상을 뜰 때까지 국가에서 연금이 지급되었다.
-알라딘 eBook <고래 - 한국문학전집 019> (천명관 지음) 중에서 - P357
그는 보호색을 띤 무당벌레처럼 사람들 눈에 잘 띄지 않는 소극적인 성격의 소유자였다. 이 때문에 간수들 사이에선 별 주목을 못 받는 인물이었지만 그의 내면엔 난폭한 권력에 대한 강렬한 욕망과 상대방의 고통을 자신의 즐거움으로 삼을 줄 아는 잔인한 습성이 숨어 있었다.
-알라딘 eBook <고래 - 한국문학전집 019> (천명관 지음) 중에서 - P359
무당벌레는 가까운 동료 간수에게 말하곤 했다. —나는 사람들이 나를 두려워하는 게 좋아. 그건 왠지 내가 중요한 사람이라는 기분이 들게 해주거든.
-알라딘 eBook <고래 - 한국문학전집 019> (천명관 지음) 중에서 - P360
그 자리에서 그는 춘희에게 그가 작은 체구로 큰 덩치들을 상대하면서 익힌 잔혹한 기술을 한 가지 가르쳐주었다. —자, 나를 똑똑히 봐. 일단 상대를 잡으면 머리를 옆으로 비틀어서 관자놀이를 주먹으로 내리치는 거야. 그러면 아무리 장사라도 잠깐 정신을 잃게 돼 있어. 그다음엔 그놈이 정신을 차리기 전에 머리를 잡고 사정없이 얼굴을 물어뜯는 거야. 왜냐하면 사람들은 얼굴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거든. 그놈이 정신을 차리더라도 코가 없어진 걸 알고 나면 그 충격 때문에 대개는 싸움이고 뭐고 전의를 상실하게 마련이지. 무슨 말인지 알겠어, 바크셔?
-알라딘 eBook <고래 - 한국문학전집 019> (천명관 지음) 중에서 - P362
그러나 춘희가 죽을 일은 없었다. 철가면은 춘희가 정신을 잃지 않도록 각성제를 먹이기도 하고 혹시라도 그녀가 갑작스럽게 죽을까봐 온갖 구급약들을 준비해두었다. 건강을 유지시키기 위해 영양제가 든 주사를 놓기도 했다. 춘희는 희귀한 임상 동물처럼 철저하게 관리가 되었다. 그리고 동물이 느낄 수 있는 모든 종류의 고통이 주어졌다.
-알라딘 eBook <고래 - 한국문학전집 019> (천명관 지음) 중에서 - P374
춘희와 점보의 문답은 끝이 없었다. 그리고 광막한 어둠 속에서 한줄기 빛을 찾아냈다. 그녀는 기억 속으로 여행을 떠남으로써 끔찍한 고통과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었으며 칠흑같이 어둡고 좁은 징벌방 안에서 마침내 자유를 찾아냈던 것이다.
-알라딘 eBook <고래 - 한국문학전집 019> (천명관 지음) 중에서 - P376
그녀는 부서진 가마를 손보고 굴뚝을 다시 일으켜세웠다. 그리고 진흙을 이기기 시작했다. 진흙을 다시 만지는 순간, 춘희는 처음 그것을 만졌을 때 느꼈던 운명적인 일체감을 단숨에 회복했다. 알싸한 흙냄새와 손에 와 닿는 진흙의 촉감은 여전히 그녀의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혔으며 그 옛날 자신이 태어나던 순간의 마구간 풍경을 떠올리게 했다.
-알라딘 eBook <고래 - 한국문학전집 019> (천명관 지음) 중에서 - P402
애꾸는 춘희의 온몸 구석구석에 차례로 벌침을 놓았다. 춘희는 본능적으로 침을 놓는 애꾸의 행위가 치료행위라는 것을 깨닫고 통증을 참았다. 이윽고 애꾸는 침을 다 놓고 나서 춘희의 팔을 풀어주었다. —이제 내가 네년의 목숨을 구해주었으니 다시는 이 계곡에 얼씬도 말거라. 한 번만 더 이 계곡을 시끄럽게 한다면 내 벌들이 그냥 놔두지 않을 것이야.
-알라딘 eBook <고래 - 한국문학전집 019> (천명관 지음) 중에서 - P406
춘희의 나이는 어느덧 삼십대 중반에 이르렀다. 그동안 야성은 무뎌지고 젊음은 모두 지나가버려 젖가슴은 늘어지고 상처투성이인 피부엔 주름이 잡혔다. 그것은 다시 중력의 법칙이었다. 또한 오랜 노동으로 온몸은 검게 그을리고 손발엔 나무껍질처럼 딱딱한 굳은살이 박였다.
-알라딘 eBook <고래 - 한국문학전집 019> (천명관 지음) 중에서 - P410
진흙은 따가운 햇볕으로부터 피부를 보호해주고 더위도 막아줄 뿐만 아니라 모기나 등에 같은 해충을 막아주어 더없이 실용적이었다. 춘희는 아무도 가르쳐준 적이 없는 코끼리의 습성을 야생에서 살아가는 동안 스스로 터득했던 것이다.
-알라딘 eBook <고래 - 한국문학전집 019> (천명관 지음) 중에서 - P410
그리고 두 사람은 팔을 맞잡은 채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순간, 춘희는 사내가 누구인지를 알아보았다. 그는 바로 어릴 때 공장 마당에서 팔씨름을 벌였던 바로 그 소년이었다. 춘희는 팔을 놓았다. 전혀 뜻밖의 인물과 마주친 그녀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사내를 쳐다보았다.
-알라딘 eBook <고래 - 한국문학전집 019> (천명관 지음) 중에서 - P412
트럭 운전사는 미련 없이 운전석에 올라타 시동을 걸었다. 그리고 차를 돌리며 말했다. —어쨌든 살아 있는 걸 보니 반가워. 가끔 놀러와도 되겠지? 하지만 언제 오겠다는 약속은 못해. 내가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게 바로 약속이거든.
-알라딘 eBook <고래 - 한국문학전집 019> (천명관 지음) 중에서 - P416
그가 시동을 걸고 떠나려 하자, 그제야 정신을 차린 춘희가 황급히 트럭 앞을 막아섰다. 그리고 마당에 가득 쌓인 벽돌과 트럭의 짐칸을 번갈아 가리켰다. 그래도 트럭 운전사가 무슨 뜻인지 몰라 의아한 듯 쳐다보자 트럭이 떠날세라 다급하게 자신이 직접 트럭에 벽돌을 싣기 시작했다. 그제야 트럭 운전사는 차에서 내려 빙그레 웃었다.
-알라딘 eBook <고래 - 한국문학전집 019> (천명관 지음) 중에서 - P420
춘희의 삶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십 년간의 혹독한 교도소 생활을 마친 후 다시 수년간 세상으로부터 고립되어 살아온 그녀에게 트럭 운전사와 함께 지낸 몇 달간은 놀라운 축복의 시간이라 아니할 수 없었다. 두 사람이 그렇게 더불어 한생을 보냈더라면 그녀가 겪은 고통을 모두 보상받고도 남음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여왕의 인생은 그리 간단하게 끝나지 않았다. 가혹한 운명은 아직도 그녀 앞에 더욱 모질고 혹독한 시련을 남겨두고 있었다.
-알라딘 eBook <고래 - 한국문학전집 019> (천명관 지음) 중에서 - P428
첫눈이 내릴 때까지도 트럭 운전사는 돌아오지 않았다. 춘희의 배는 점점 불러왔다. 교미가 끝나면 배가 불러오고 그뒤에 새끼를 낳는다는 것은 야생동물들의 생태를 통해 그녀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녀는 언제나 진입로 쪽을 쳐다보며 트럭 운전사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춘희의 귀엔 사내가 떠날 때마다 하던 작별인사가 맴돌았다. —좋아, 병아리. 또 만나자고. 하지만 언제 오겠다는 약속은 못해. 내가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게 바로 약속이거든.
-알라딘 eBook <고래 - 한국문학전집 019> (천명관 지음) 중에서 - P430
그해 늦은 봄, 춘희는 혼자 계집아이를 출산했다. 아이는 작고 힘이 없었으며 울지도 않았다. 그 옛날, 자신이 쌍둥이자매의 마구간에서 태어날 때처럼 지독한 상황이었다. 춘희는 탯줄을 이빨로 물어 끊어내고 태반을 삶아 먹었다. 그것은 한 어미 된 자의 준엄한 본능이었다. 그녀는 아이에게 젖을 물렸다. 겨우 묽은 젖이 나와 아이는 가까스로 숨이 트였다. 자신이 만들어낸 한 생명체가 젖을 빠는 모습을 보며 춘희는 가슴이 벅차올랐다. 아무도 가르쳐준 적이 없는 어미의 기쁨이었다.
-알라딘 eBook <고래 - 한국문학전집 019> (천명관 지음) 중에서 - P431
그녀의 머릿속엔 죽음이 떠올랐다. 그리고 어디선가 희미하게 그녀가 태어났을 때 맡았던 마구간의 냄새가 나는 듯했다. 그러는 동안 고운 눈가루는 두 모녀의 지친 몸뚱이를 서서히 덮어주었다.
-알라딘 eBook <고래 - 한국문학전집 019> (천명관 지음) 중에서 - P434
—미안해, 병아리. 너한테 싫증이 나서 떠났던 건 아냐. 난 그냥 자유롭고 싶었을 뿐이야. 하지만 이젠 다 끝났어. 난 지금까지 아무에게도 약속을 하지 않았지만 너에겐 처음으로 한 가지 약속을 하겠어. 앞으로는 무슨 일이 있어도 네 곁을 떠나지 않겠다고.
-알라딘 eBook <고래 - 한국문학전집 019> (천명관 지음) 중에서 - P435
—다음번엔 벽돌을 더 많이 실어오지요. 하지만 언제 오겠다는 약속은 못해요. 내가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게 바로 약속이거든요. 그것이 괴력의 사내가 벽돌을 내려놓고 가면서 한 작별인사였다.
-알라딘 eBook <고래 - 한국문학전집 019> (천명관 지음) 중에서 - P444
그녀는 벽돌을 틀에 넣고 찍어낸 후 아직 구워내기 전의 부드러운 진흙 위에 나뭇가지로 아이의 얼굴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림은 단순하고 서툴렀지만 그녀는 쉬지 않고 아이의 얼굴을 그려댔다. 그리고 언젠가부터 그녀는 아이뿐만 아니라 그녀가 알고 있던 사람들, 그녀가 겪은 일들, 언젠가 눈앞을 스쳐간 풍경들을 그림에 담아내기 시작했다. 그림은 그녀에게 커다란 위안이 되었다. 그녀는 벽돌 위에 그림을 그려 구워낸 다음 나란히 늘어놓고 앉아 하염없이 바라보는 것을 좋아했다. 그림을 보는 동안만큼은 고통과 외로움을 잊을 수 있었다. 그녀는 벽돌 위에 점점 더 많은 기억들을 담아내기 시작했다. 개망초와 뱀, 메뚜기와 잠자리, 고라니 등 주변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대상에서부터 대장간의 모루, 벽돌을 실어나르던 트럭 등 그녀의 인생을 스쳐간 온갖 물상들, 다방의 풍경과 평대역에서 날뛰던 점보의 모습 등 수많은 장면들이 그 대상이 되었다.
-알라딘 eBook <고래 - 한국문학전집 019> (천명관 지음) 중에서 - P453
그리고 어느 순간 춘희는 문득 자신의 몸이 점보처럼 광채에 휩싸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녀는 빛에 둘러싸여 점점 투명해지는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여기는 아주 고요해.
그런데 이때, 문득 춘희는 자신의 입에서 실제로 목소리가 흘러나오는 것을 듣고 깜짝 놀랐다. 그것은 틀림없이 지상에서 한마디도 한 적이 없는 그녀 자신의 목소리였다. 목소리는 마치 나뭇잎을 스치는 바람처럼 부드럽고 희미했다. 점보는 그녀가 자신의 목소리에 놀라는 것을 알고 빙그레 웃었다.
-알라딘 eBook <고래 - 한국문학전집 019> (천명관 지음) 중에서 - P4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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