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구분선은 장교들과 나머지 모든 사람들을 나누는 그것과 정확히 일치했다. 〈항상 그랬지, 뭐〉라고 알베르는 속으로 삐죽댔다. 윗대가리들은 협상 테이블에서 칼자루를 쥐기 위해, 최대한의 땅을 확보해 두기를 원한다. 30미터만 더 정복하면 이 전쟁의 결과가 완전히 바뀐다고, 어제 죽는 것보다 오늘 죽는 게 더 값진 일이라고 주장하지 않는 게 오히려 이상한 사람들 아닌가. - <오르부아르>, 피에르 르메트르 / 임호경 옮김 - 밀리의 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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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단지 죽는다는 두려움만이 아니라, 하필 지금 죽어야 하는가 하는 생각이었다. 막판에 죽는 것은 맨 처음에 죽는 거나 마찬가지야, 세상에 이보다 더 멍청한 일은 없지, 이게 알베르의 지론이었다.

그런데 지금 바로 그 일이 일어나려 하고 있었다. - <오르부아르>, 피에르 르메트르 / 임호경 옮김 - 밀리의 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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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베르 마야르. 호리호리한 체구에, 약간 느릿하고도 조심스러운 성격의 친구다. 말이 별로 없고, 숫자에 강하다. 전쟁이 일어나기 전에는 위니옹 파리지엔 은행의 한 지점에서 출납원으로 일했다. 그 일을 별로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어머니 때문에 붙어 있었다. - <오르부아르>, 피에르 르메트르 / 임호경 옮김 - 밀리의 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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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떠나고 싶었고, 통킹[4]으로 가고 싶었다. 사실 아주 막연한 동경에 불과했지만, 어쨌든 이 회계직을 떠나 다른 일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알베르는 그렇게 행동이 빠른 친구가 아니었다. 어떤 일에든 시간이 필요했다. 그리고 아주 빨리 세실이 생겼다. 그는 곧바로 열정에 사로잡혔다. 세실의 눈, 세실의 입, 세실의 미소, 그다음에는 물론 세실의 젖가슴, 세실의 엉덩이……. 이러니 어떻게 다른 걸 생각할 수 있겠는가? - <오르부아르>, 피에르 르메트르 / 임호경 옮김 - 밀리의 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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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무엇인고 하면…… 그리하여 그녀는 전쟁은 한 입 거리밖에 안 된다고 주장할 수 있었고, 알베르는 자신이 세실의 그 한 입 거리가 될 수 있기를 너무도 간절히 꿈꿔 왔었다……. - <오르부아르>, 피에르 르메트르 / 임호경 옮김 - 밀리의 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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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 왜 그랬는지 알 수 없지만, 어떤 직감 때문일까, 알베르는 늙은이의 어깨를 잡아 옆으로 힘껏 민다. 시체는 기우뚱 무겁게 돌아가 배를 땅에 깔고 털썩 엎어진다. 몇 초가 지나서야 알베르는 비로소 이해한다. 그러고는 그 이해된 진실이 얼굴을 거세게 후려친다. 적진을 향해 나아갈 때는 등짝에 총알 두 발을 맞고 죽지는 않는 법이다……. - <오르부아르>, 피에르 르메트르 / 임호경 옮김 - 밀리의 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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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몸을 일으킨 알베르는 아직도 얼이 빠져 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로 인해서 말이다. 휴전이 며칠 남지 않은 시점에서 병사들은 독일 놈들을 건드리고 싶은 마음이 별로 없었다. 병사들을 밀어붙일 유일한 방법은 그들의 분노를 돋우는 것이었다. 이 두 사람이 등짝에 총을 맞았을 때 프라델은 과연 어디에 있었던가?

맙소사……. - <오르부아르>, 피에르 르메트르 / 임호경 옮김 - 밀리의 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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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컨대 질식사는 그가 가장 무서워하는 죽음일 것이다. 다행히 그는 지금 여기에 대해 생각하지는 않고 있다. 지금 그를 기다리고 있는 일에 비하면, 세실의 매끄러운 허벅지에 갇히는 것은 머리통이 이불 밑에 있다 해도 오히려 천국이라 할 수 있다. 만일 그 생각을 한다면, 알베르는 차라리 죽고 싶으리라. - <오르부아르>, 피에르 르메트르 / 임호경 옮김 - 밀리의 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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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의 알베르의 모습은, 그림으로 비유해 보자면, 틴토레토가 그리는 초상화와 비슷하다. 선명한 입매, 주걱턱, 그리고 활처럼 휜 눈썹 때문에 돋보이는 어둡고도 움푹한 눈언저리, 그리고 항상 침울한 표정이었다. 그런데 이 순간, 시선을 하늘로 돌려 죽음이 다가오는 것을 바라보는 그의 모습은 오히려 성 세바스티아누스를 닮았다. 얼굴의 윤곽은 갑자기 늘어지고, 얼굴 전체가 고통과 공포로 일그러진다. 또 신에게 애원하는 듯한 표정도 엿보이는데, 그게 아무 쓸모없는 것이, 알베르는 평생 아무것도 믿지 않았을 뿐 아니라, 지금 어떤 고난이 닥쳤다고 해서 뭔가를 믿기 시작할 리는 없기 때문이다. 설사 그에게 시간이 있더라도 말이다. - <오르부아르>, 피에르 르메트르 / 임호경 옮김 - 밀리의 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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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무엇인지를 깨닫는 데는 약간의 시간이 필요하다.

눈이 점차 어둠에 적응하면서, 그는 자기 앞에 있는 것이 무엇인지 파악한다. 끈적거리는 점액이 흘러나오는 어마어마한 입술, 거대하고 싯누런 이빨들, 녹아내리는 푸르스름한 커다란 눈깔…….

구역질 나는 거대한 말 대가리, 괴물처럼 흉측한 말 대가리다. - <오르부아르>, 피에르 르메트르 / 임호경 옮김 - 밀리의 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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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말 대가리를 부여잡는다. 살덩이들이 자꾸만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그 미끌미끌한 주둥이를 간신히 붙잡은 알베르는 그 커다랗고 누런 이빨들을 틀어쥐고는 초인적인 노력으로 아가리를 쫙 벌리고, 그 속에 남은 한 줌의 썩은 숨결을 허파 가득 들이마신다. 이렇게 그는 몇 초 동안 더 목숨을 부지할 수 있게 된다. 속이 뒤집히고, 구토를 하고, 온몸이 다시 격하게 떨리지만, 그는 실낱만큼의 산소를 찾아 다시 몸을 뒤집으려 해본다. 희망은 없다. - <오르부아르>, 피에르 르메트르 / 임호경 옮김 - 밀리의 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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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머릿속에서는 현실과 데생들과 회화 작품들이 한데 뒤섞였다. 마치 삶이란 것이 그의 상상의 미술관 속에 추가된 멀티미디어 작품에 지나지 않은 듯이 말이다. 보티첼리의 덧없는 아름다움들이며 카라바조의 작품에서 도마뱀에 물린 소년의 얼굴에 갑작스레 떠오르는 두려움 등은, 볼 때마다 그 엄숙한 얼굴이 가슴을 뒤흔들었던 마르티르 가의 과일행상 여인, 혹은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약간 붉은빛이 감돌던 아버지의 부착식 칼라에 뒤이어 나타나곤 했다. - <오르부아르>, 피에르 르메트르 / 임호경 옮김 - 밀리의 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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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의 평범한 것들과 히로니뮈스 보스의 그림 속 인물들과 나신들과 광폭한 전사들로 채워진 이 단색화의 한가운데, 쿠르베의 「세상의 기원」이 불쑥 출현했다. 그는 단 한 번 이 그림을 본 적이 있다. 부모님의 친구 집에서, 몰래 숨어서. 자세히 얘기하자면, 전쟁이 발발하기 훨씬 전, 그가 열한 살이나 열두 살 정도 되었을 무렵이다. 그는 아직 성 클로틸드 사립 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에두아르는 힐페리히와 크레테나의 딸 성 클로틸드를 발정 난 여자로 상상하여, 갖가지 체위로 그려 놓았다. 숙부 고데지실과 자고, 클로비스와는 후배위를 즐기고 493년 무렵에는 부르군트 왕을 빨아 주는 동시에 뒤로는 랭스의 대주교 레미에게 박히고…….[8] 이 그림 덕분에 그는 세 번째로 정학을 당했고, 이는 바로 퇴학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상당히 공들인 작품이라는 것을 모두가 인정했으며, 심지어는 너무나 디테일이 살아 있어서 그 어린 나이에 어디서 모델들을 구했을까 궁금해질 정도였다. 미술을 매독 환자의 타락한 활동 정도로 여기는 그의 아버지는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 <오르부아르>, 피에르 르메트르 / 임호경 옮김 - 밀리의 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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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전성기〉라 부를 만한 이 시기의 정점은 유디트로 분장한 음악 교사 쥐스트 양이 수학 교사 라퓌르스 씨와 헷갈릴 정도로 닮은 홀로페르네스[9]의 잘린 머리를 탐욕스럽게 흔들어 보이는 그림이었다. 이 두 사람이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것은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이 감탄스러운 참수 장면으로 상징된 두 교사가 결별하기까지 두 사람을 소재로 한 에두아르의 연재 만평 덕분에 사람들은 칠판에서, 벽에서, 종이 위에서 상당수의 외설적인 작품들을 감상할 수 있었다. 교사들조차 압수한 그림들을 교장에게 넘기기 전에 자기네끼리 돌려 볼 정도였다. 이제 누구든지 교정을 지나가는 후줄근한 수학 선생을 보면 그 위로 입이 딱 벌어지는 남근을 지닌 음탕한 호색한의 모습을 떠올리게 되었다. 이때 에두아르는 겨우 여덟 살이었다. 이 엄청난 그림 덕분에 아이는 높은 사람들에게 불려 다녔다. 하지만 면담이 상황을 호전시키지는 못했다. 교장이 격하게 그림을 흔들며 노한 어조로 유디트를 언급하자 아이는 대꾸했다. 물론 이 여자가 참수된 이의 머리채를 쥐고 있긴 하지만 이 머리가 쟁반에 담겨 있기 때문에 여기서는 유디트보다는 살로메로, 그리고 홀로페르네스보다는 세례 요한으로 보는 게 더 적절하지 않을까요……? 에두아르에겐 이런 현학적인 구석도 있었고, 이처럼 반사적으로 재주를 부리려 드는 성향은 사람들을 상당히 짜증 나게 만들었다. - <오르부아르>, 피에르 르메트르 / 임호경 옮김 - 밀리의 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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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를 들면 함께 묻혀 있던 말 대가리가 종종 생각났다. 이상하게도 시간이 감에 따라 말 대가리는 그 흉물스러운 성격을 잃어 갔다. 심지어는 살아남기 위해 들이마셨던, 말 대가리에서 뿜어져 나오던 그 역한 공기마저도 더 이상 혐오스럽거나 메스껍게 느껴지지 않았다. 구덩이 언저리에 서 있던 프라델의 영상이 사진처럼 선명하게 나타날수록, 세세한 부분까지 간직하고 싶은 말 대가리는 스르르 녹아내리며 그 색채와 윤곽을 상실해 갔다. 집중하려고 애써 봤지만 그 이미지는 스러져 갔고, 왠지 불안한 상실감이 들었다. 전쟁은 끝나 가고 있었다. 지금은 결산의 시간이 아니고, 참극의 현장 한가운데 앉아 있는 끔찍한 현재의 시간이었다. - <오르부아르>, 피에르 르메트르 / 임호경 옮김 - 밀리의 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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