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들이 물가에서 어슬렁어슬렁 시간을 보내고 있다. 이들은 더없이 이례적인 방식으로, 그러니까 큰 덩치와 관능성과 풍만함과 즐거워하는 모습으로 눈부신 매력을 발산한다. 강기슭을 따라 느긋하게 자리 잡은 채 태양을 향해 팔을 들어올리고, 유연하면서 널찍하고 튼튼한 등 뒤로 머리카락이 물결치듯 흘러내린다. 움직임에 부드러움과 더불어 힘과 육감肉感이 배어 있는 걸 보면, 이들은 자신의 중량과 물질적 실체가 주는 감각을 한껏 즐기는 듯하다.

-알라딘 eBook <욕구들> (캐럴라인 냅 지음, 정지인 옮김) 중에서 - P11

캔버스에서 물러서서 관찰하고 생각하고 느껴보라. 이것은 넉넉함의 이미지이며 여성의 육체성이 펼쳐지는 한 장면이다. 이 광경 속에서 여성의 갈망들은 칭송되는 동시에, 마치 그 모든 욕구가 한 덩어리인 듯 육체적 욕구와 정서적 욕구가 한데 얽히고 똑같은 비중을 차지해 서로 구별되지 않는다. 이 풍경에서 음식은 사랑이고, 사랑은 섹스이며, 섹스는 연결이고, 연결은 음식이다. 욕구들은 하나의 완결된 순환 속에, 혹은 각기 독립된 화음인 먹기와 만지기와 사랑하기와 가까이 느끼기가 한데 어우러져 서로 보완하는 소나타 속에 존재한다.

-알라딘 eBook <욕구들> (캐럴라인 냅 지음, 정지인 옮김) 중에서 - P11

이 이미지를 창조한 르누아르는 여성의 육체가 없었다면 자신은 결코 화가가 되지 못했을 거라고 했다. 그건 보기만 해도 알 수 있다. 캔버스를 채운 요소 하나하나에 여자들에 대한 사랑과 자아에 대한 사랑이 있고 기쁨이 있으니까. 너무나 아름다워 보이지만 나는 도저히 가질 수 없는, 보고만 있어도 울고 싶어질 만큼 완전하게 조화로운 관능이 배어 있으니까.

-알라딘 eBook <욕구들> (캐럴라인 냅 지음, 정지인 옮김) 중에서 - P12

옛날 옛적, 지구와 목성이 다른 만큼이나 르누아르의 세계와는 다른 세계에 살던 시절 내 몸무게는 37킬로그램이었다. 스물한 살이었고 키는 162센티미터였으며 허벅지가 무릎보다 가늘었다. 표준 체중이 54킬로그램 정도이니 17킬로그램을, 그러니까 몸의 3분의 1가량을 깎아낸 그 일은 헤라클레스의 과업에 비견할 어마어마한 노력이자 삶을 뒤바꿀 정도의 노력이었고, 엄밀히 생각해보면 여자들만 하는 노력이었다.

-알라딘 eBook <욕구들> (캐럴라인 냅 지음, 정지인 옮김) 중에서 - P13

르누아르의 세계에서 여성의 욕구는 풍요롭고 왕성하고 강력한 것으로 그려지고, 여성 존재의 핵심은 쾌락에 깊이 맞추어진 감각적인 것으로 칭송된다. 나의 세계—의심할 여지 없이 지금도 존재하며, 집중의 강도는 저마다 다르지만 여전히 너무나 많은 여자들이 살고 있는 세계—에서 욕구는 아예 정반대의 의미를 지녔다. 육체는 위험하고 불온하고 그릇된 것으로 경험되었고, 육체의 갈망들은 낱낱이 구분되었으며, 각각의 갈망에는 상충하는 여러 의미가 부여되었고, 갈망 하나하나가 부담스러운 의미의 짐과 심란함을 짊어지고 있었다. 두 세계의 이런 차이를 당시의 나는 알지 못했다.

-알라딘 eBook <욕구들> (캐럴라인 냅 지음, 정지인 옮김) 중에서 - P13

3년 동안 나는 매일 같은 것을 먹었다. 아침은 아무것도 바르지 않은 참깨 베이글 하나, 점심은 다농에서 나온 커피향 요거트 한 개, 저녁은 사과 한 알과 작은 치즈 큐브 하나였다. 그리고 나는 달렸다. 작대기 같은 몸으로 얼굴을 잔뜩 찡그린 채 몇 킬로미터씩. 늘, 심지어 여름에도 추위를 탔고 지독히 암울했으며 이 모든 일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굶기 강박은 어디서 생겨나 이리도 나를 몰아대는지, 그 강박이 나에 관해 혹은 여자들 전반에 관해, 혹은 인간의 갈망이라는 더 큰 문제에 관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나는 그저 그렇게 행동하고 반응했다.

-알라딘 eBook <욕구들> (캐럴라인 냅 지음, 정지인 옮김) 중에서 - P14

식욕은 내 모든 부수적 괴로움을 끌어다 걸어두는 걸이이며(나 자신과 수많은 여자들의) 내면에 흐르는 모든 강이 생겨난 바다다. 물론 식욕/욕구appetite란 단어는 우선 먹는 일에 관한 것이다. 먹는 일과 관련된 이 부분은 수많은 여자들의 삶을 결정하고, 나 역시 너무나 잘 아는 부분이지만, 이 단어는 갈망과 동경과 필요로 이루어진 훨씬 폭넓은 범위도 아우른다. 욕구는 세계에 참여하고자 하는, 삶에서 풍요의 감각과 가능성을 느끼고자 하는, 쾌락을 경험하고자 하는 더욱 깊은 수위의 소망에 관한 것이다. 여자들에게는 이 소망이 종종 유난히 강렬하고 고통스러운 방식으로 펼쳐진다.

-알라딘 eBook <욕구들> (캐럴라인 냅 지음, 정지인 옮김) 중에서 - P15

나는 평생 식욕 문제와 씨름해왔다고 할 수 있지만(나뿐 아니라 많은 여자들이 그렇다. 우리는 어려서부터 자신의 욕망들과 싸우도록 훈육되고, 세월이 흐르는 동안 사실상 모든 전선에 그 싸움을 위한 증원군이 파병된다) 나의 역사에서 결정적 순간을 딱 하나 찾아야 한다면, 어찌 보면 딱히 기억할 것도 없는 평범한 뭔가를 샀을 뿐, 그 외에는 전혀 기억할 거리도 없는 23년 전 11월의 어느 저녁을 지목할 것이다. 내가 산 건 바로 코티지치즈였다.

-알라딘 eBook <욕구들> (캐럴라인 냅 지음, 정지인 옮김) 중에서 - P16

세상에는 삶을 완전히 바꿔놓는 일인데도 겉보기에 너무 평범하고 무해해 보여서 좀처럼 그런 일로 인지되지 않는 일들이 있다.

-알라딘 eBook <욕구들> (캐럴라인 냅 지음, 정지인 옮김) 중에서 - P16

나는 열아홉 살이었고, 로드아일랜드주 프로비던스에 있는 브라운대학 3학년생이었으며, 어렴풋이 불안하고 어렴풋이 우울했다. 그리고 그리 어렴풋하지 않게 배가 고팠다.

-알라딘 eBook <욕구들> (캐럴라인 냅 지음, 정지인 옮김) 중에서 - P16

코티지치즈는 신이 여자들을 고문하기 위해, 여자들의 열망을 더욱 간절하게 만들기 위해 특별히 개발한 음식임이 분명하다.

-알라딘 eBook <욕구들> (캐럴라인 냅 지음, 정지인 옮김) 중에서 - P17

코티지치즈는 우리 문화권에서 자기부정의 가장 가시적인 상징 중 하나다. 마케팅이 솔직했다면 코티지치즈 포장 용기에 이런 경고 문구가 붙었을 것이다. "이 제품은 자기 징벌용이니 섭취 시 유의하시오."

-알라딘 eBook <욕구들> (캐럴라인 냅 지음, 정지인 옮김) 중에서 - P17

그랬더니 씨앗 하나가 움텄다. 이 씨앗은 어쩌면 오랫동안 거기 있었지만 그때까지 휴면 상태로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길도 하나 닦였다. 이 길은 궁극적으로 음식보다는 감정과 관련이 있었고, 허기보다는 허기를 충족시키는 데 필요한 마음가짐과 더욱 깊은 관련이 있었다.

-알라딘 eBook <욕구들> (캐럴라인 냅 지음, 정지인 옮김) 중에서 - P18

그리고 그 길에 아주 오래 머물렀다. 사흘간의 코티지치즈와 쌀 뻥튀기는 3년간의 거식증으로 이어졌고 다시 3년이 이어졌다. 그 세월 내내 따라다녔던 영양 공급과 쾌락을 둘러싼 투쟁은 나의 체중이 마침내 안정화된 후로도 오래도록 남아 음식의 영역을 뛰어넘은 다른 영역들에서, 연애 관계와 운동 문제나 물질적 탐닉 문제에서, 아니 사실상 갈망과 억제가 맞부딪칠 수 있는 거의 모든 영역에서 그 정도는 덜 극단적이더라도 계속해서 존재감을 드러냈다.

-알라딘 eBook <욕구들> (캐럴라인 냅 지음, 정지인 옮김) 중에서 - P18

식사장애의 중심에는 언제나 가족이 있으며, 내 거식증의 중심에도 특유의 복잡성을 띤 가족이 있었다. 가족의 중심이었던 부모님은 총명하고 내성적이고 대체로 불행했으며, 두 사람의 결혼 생활은(아버지 쪽의) 양가감정과(어머니 쪽의) 좌절감으로 점철되었다. 자애롭고 너그럽지만 속을 전혀 알 수 없을 만큼 겉으로 내색하지 않는 성격들로, 애정 표현이 대체로 암호화되고 베일에 가려 있어서 나는 30대에 접어들고도 한참이 지나서야 그 표현의 의미를 해독할 수 있게 되었다. 그전까지 나는 자주 혼란스러웠고 홀로 뚝 떨어져 있는 느낌이었으며 확신을 가질 수 없어 불안했다.

-알라딘 eBook <욕구들> (캐럴라인 냅 지음, 정지인 옮김) 중에서 - P19

나는 조용하고 수줍고 깔끔한 아이에 완벽주의자였다. 성적도 A만 받았다. 시키지 않아도 주방을 박박 닦았다. 분명 가족 역학과 뇌 화학의 지극히 복잡 미묘한 조합에서 생겨났을 내 가장 오래된 기억들은, 관계 맺기의 실패와 허함에 대한 감각, 이름 없고 어쩌면 이름 붙일 수 없는 무언가에 대한 갈망의 감각과 관련되어 있다.

-알라딘 eBook <욕구들> (캐럴라인 냅 지음, 정지인 옮김) 중에서 - P20

생애 초기의 이런 경험에 어느 정도 무게를 두어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이 이야기는 내게 아주 익숙한 울림을 준다. 허기의 가닥, 그리고 포만이라는 개념을 마음 놓고 믿지 못하는 마음의 가닥은 저 최초의 날들부터 이미 내 삶이라는 직물 속으로 물려들어왔던 것이다.

-알라딘 eBook <욕구들> (캐럴라인 냅 지음, 정지인 옮김) 중에서 - P21

욕구와 관련된 모든 장애가 그러하듯이 굶는 행위는 너무도 다양한 갈등과 두려움에 대한 해결책으로서, 적어도 처음에는 해결책처럼 보이는 것으로서 시작된다.

-알라딘 eBook <욕구들> (캐럴라인 냅 지음, 정지인 옮김) 중에서 - P21

굶기에는 정도에 어긋날 만큼 좋은 느낌, 옳은 느낌, 혹은 만족스러운 느낌을 주는 무언가가 있다. 열쇠가 제자리에 딱 맞아 들어가는 듯한 느낌이 있고, 어떤 괴로움을 가라앉혀주는 면이 있다. 굶기가 주는 이런 혜택들은 수치심, 혼란, 배고픔 등 굶기가 불러일으키는 부정적이거나 고통스러운 느낌을 모두 넘어설 만큼 강력하며 마치 악령이 유혹하는 손짓처럼 아주 매혹적이다.

-알라딘 eBook <욕구들> (캐럴라인 냅 지음, 정지인 옮김) 중에서 - P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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