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데 틸다 스윈튼은 이례적인 경우다. 그는 영화가 신화의 지위를 포기한 이후, 현대 영화에서 사라지다시피 한 피안彼岸을 상징하는 얼굴, 말하자면 우리가 소유한 적 없는 얼굴을 갖고 있다. 오래전 그레타 가르보와 마를레네 디트리히가 점했던 자리에 ‘시대착오적으로’ 서 있다고 해도 좋다. 그를 묘사함으로써 나는 이 환영幻影 같은 배우의 소매 끝을 잡아보려 한다. 어떤 대상에 대해 아무것도 쓸 수 없는 상태와 무엇이든 쓸 수 있을 것 같은 환각은 기묘하게 닮아 있는데, 이는 많은 글쟁이들이 걸려드는 끈끈이주걱이다.

-알라딘 eBook <묘사하는 마음> (김혜리 지음) 중에서 - P46

틸다 스윈튼이라는 배우를 휘감은 백색은 많은 색채 중 하나라기보다 채색되지 않은 여백의 그것이며, 『모비딕』 이스마엘의 표현대로 "모든 색의 부재인 동시에 모든 색의 종합"으로서의 초월하고 포용하는 흰색이다(『색의 수수께끼』마가레테 브룬스, 조정옥 옮김, 세종연구원, 1999, 213쪽에서 재인용).

-알라딘 eBook <묘사하는 마음> (김혜리 지음) 중에서 - P50

남성과 여성을 포괄하고 자유롭게 오가는 완전체를 뜻하는 앤드로지니는, 생물학적으로 남녀의 생식기관을 한 몸에 가진 사람을 일컫는 헤르마프로디테hermaphrodite와 달리 추상적 개념이다. 그러나 앤드로지니가 영화 속에서 배우의 육체를 통해 제시되는 순간—예컨대 우리가 여성임을 아는 배우가 극 중에서 남성을 연기하고 화면 안에서 양성을 모두 매혹할 때—그것은 더 이상 투명한 관념일 수만은 없으며 특별한 에로티시즘을 발산한다. 수전 손택이 썼듯이 "가장 정제된 형태의 성적인 매력, 그리고 가장 세련된 형태의 성적 쾌락은 자기 성에 역행하는 부분에서 나온다. 강한 남자에게서 가장 아름다운 부분은 여성적인 면이고 여성스러운 여자의 가장 아름다운 부분은 남성적인 요소다"(「캠프에 관한 단상」에서).

-알라딘 eBook <묘사하는 마음> (김혜리 지음) 중에서 - P52

말하자면 <The Maybe>는 "연기하는 순간 관객이 부재하는 공연"인 영화 연기의 본질에 대한 그의 사색이기도 했다.

-알라딘 eBook <묘사하는 마음> (김혜리 지음) 중에서 - P59

그처럼 틸다 스윈튼은 본인의 비범한 몸을 남성과 여성, 게이와 스트레이트, 인간과 신성, 추상과 리얼리티 사이에서 관객이 주체적으로 교섭을 벌이는 장소로 제공하는 희한한 배우다. 평범한 화면 속에서도 연초점으로 촬영된 듯 미스터리를 안개처럼 두르고 있는 그의 ‘미친’ 존재감은 <케빈에 대하여>에서 케빈이 이혼을 논의하는 부모에게 던졌던 "내가(이혼의) 맥락이잖아!(I’m the context!)"라는 한마디와 짓궂은 우연처럼 들어맞는다. 틸다 스윈튼, 그가 바로 컨텍스트다.

-알라딘 eBook <묘사하는 마음> (김혜리 지음) 중에서 - P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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