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욱아. 너 하염없다는 말이 먼 말인 중 아냐?"
아버지는 말문이 막혔고 박선생은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먹은 소주가 죄 눈물이 되어 나오는 것 같았다고, 생전 처음 취했던 아버지가 비틀비틀, 내 몸에 기대 걸으며 해준 말이다. 고2 겨울이었다. 자기 손으로 형제를 죽였을지도 모른다는 자책감을 안고 사는 이에게 하염없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열일곱 여린 감수성에 새겨진 무늬는 세월 속에 더욱 또렷해져 나는 간혹 하염없다는 말을 떠올리곤 했다. 아직도 나는 박선생이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알지 못한다. 다만 하염없이 남은 인생을 견디고 있을, 만난 적 없는 아버지 친구의 하염없는 인생이 불쑥불쑥 내 삶에 잔잔한 파문을 일으키곤 했다.

-알라딘 eBook <아버지의 해방일지> (정지아 지음) 중에서 - P38

아버지가 매일 술을 마시기 시작한 것은 『새농민』이 시키는 대로 문자 농사를 짓던 시절부터였다. 아버지는 시골 태생이긴 하지만 농사를 지어본 적이 없었다. 노동자와 농민이 주인 되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싸웠지만 정작 자신은 노동과 친하지 않았던 것이다. 아버지에게 노동은 혁명보다 고통스러웠다. 얼어 죽고 굶어 죽고 총 맞아 죽는다는 전직 빨치산이 고추밭 김매는 두시간을 참지 못해 쪼르르 달려와 맥주컵으로 소주를 원샷할 때마다 나는 내심 비웃으며 생각했다. 혁명가와 인내의 상관관계에 대하여. 인내할 줄 아는 자는 혁명가가 되지 않는다는 게 고등학생 무렵의 내 결론이었다.

-알라딘 eBook <아버지의 해방일지> (정지아 지음) 중에서 - P51

나를 가만 보던 오빠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괜찮다. 괜찮아."
자기 상태가 괜찮다는 것인지, 죽음이란 것도 괜찮다는 것인지, 살아남은 자들은 그래도 살아질 테니 괜찮다는 것인지 알 수 없는 채로 불현듯 눈물이 솟구쳤다. 그 눈물의 의미도 나는 알 수 없었다. 오빠는 우는 나를 가만히 지켜보기만 했다. 고요한 눈빛으로. 아버지의 죽음뿐만 아니라 곧 닥칠 자신의 죽음까지 덤덤하게 수긍한, 아니 죽음 저편의 공허를 이미 봐버린 눈빛이었다. 그 눈빛 앞에서 차마 더는 울어지지 않았다. 내 울음이 사치스럽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본디 눈물과는 친하지 않기도 했다.

-알라딘 eBook <아버지의 해방일지> (정지아 지음) 중에서 - P64

오빠가 테이블에 손을 짚은 채 몸을 일으켰다. 왔을 때처럼 오빠는 휘적휘적 힘겨운 걸음을 옮겼다. 허리띠를 졸라맸는지 허리춤에서 엉덩이까지 어른 주먹 몇개는 들락거릴 정도의 주름이 잡혀 있었다. 삶이란 것이 오빠의 몸에서 빠져나가고 있는 듯했다. 나는 오빠가 밝은 햇빛 속으로 사라져가는 뒷모습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오빠는 자기 인생의 마지막 조문을 마치고 자신의 죽음을 향해 걸어가는 중이었다.

-알라딘 eBook <아버지의 해방일지> (정지아 지음) 중에서 - P6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