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앞을 향해 살아가야 하지만 이해하기 위해서는 뒤돌아봐야 한다."

_키르케고르Kierkegaard - <온 더 무비>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5787915 - P7

크로스컨트리를 잘 끝낸 뒤 여객선을 타고 잉글랜드로 돌아오는 길에 면세점에서 아쿠아비트Aquavit(스칸디나비아 반도에서 생산되는 전통 증류주: 옮긴이) 2리터를 사서 노르웨이 세관을 통과했다. 노르웨이 세관원들은 술은 얼마든지 들고 타도 되지만(그들이 알려주기를) 잉글랜드로는 한 병만 갖고 들어갈 수 있다고 했다. 영국 세관이 한 병은 압수할 거라고. 나는 두 병을 옆구리에 끼고서 배에 타 상갑판으로 올라갔다. - <온 더 무비>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5787915 - P18

읽을 책(당시 나는 《율리시스Ulysses》를 아주 더디 읽고 있었다)에 목 축일 아쿠아비트까지, 더이상 바랄 것 없었다. 게다가 속 덥히는 데 알코올만 한 게 또 있으랴. 최면이라도 걸 듯 잔잔하게 흔들리는 배에 몸을 맡긴 채 아쿠아비트를 한 모금씩 홀짝거리며 상갑판에 앉아 책에 열중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그렇게 홀짝거린 것이 반 병 가까이 되는 것을 보고는 깜짝 놀랐다. 하지만 취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아 계속 책을 읽으며 이제 절반이 빈 병을 거꾸로 세워가며 남은 술을 마저 홀짝였다. 배가 부두로 들어서자 소스라치게 놀랐다. 얼마나 《율리시스》에 빠져들었던지 시간이 흐르는 줄도 몰랐다. 술병은 깨끗이 비었고 여전히 취기는 느껴지지 않았다. 병에 "100프루프proof"(약 57도: 옮긴이)라고 표시돼 있었지만 실제로는 훨씬 약한가 보다 생각했다. 아무 문제도 못 느꼈다. 자리에서 일어났다가 그대로 고꾸라질 때까지는. 배가 갑자기 기우는 줄 알고 얼마나 놀랐던지…. 나는 벌떡 일어났다가 바로 다시 쓰러지고 말았다.

그제야 내가 취했다는 걸 깨닫기 시작했다. 그것도 아주 심하게. 술이 나머지 머리는 말짱히 놔두고 소뇌로 직행한 듯했다. 승객이 다 내렸는지 확인하던 승무원이 스키 지팡이에 의지해 걷느라 안간힘 쓰는 나를 보고는 조수를 불러 한쪽씩 부축해 하선을 도와주었다. 심하게 비틀대면서 사람들의(우스워 죽겠다는) 시선을 끌긴 했으나, 두 병을 들고 나와 한 병만 들고 입국함으로써 체제를 골탕 먹였다는 승리감에 도취했다. 나한테서 나머지 한 병을 찾아내지 못해 영국 세관이 아주 안달 났겠지, 상상하면서. - <온 더 무비>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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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모두는 자신이 받은 교육과 자신이 속한 사회의 문화, 자신이 사는 시대의 산물이다. - <온 더 무비>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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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네다섯 살 때는 학교 생물 선생님과 스타인벡의 《통조림공장 골목Cannery Row》(1945; 문학동네, 2008)에 감화받아 해양생물학자가 되고 싶었다. - <온 더 무비>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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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운의 과장된 고전어가 지나치다 싶을 때면 예리하고 저돌적인 스위프트로 갈아타면 되었다. 물론 그의 작품들 역시 초판본이 모두 소장돼 있었다. 부모님이 좋아한 19세기 저작들이 나의 성장 배경이었다면 새뮤얼 존슨에서 데이비드 흄, 에드워드 기번, 알렉산더 포프에 이르는 17·18세기 거장들의 세계로 입문시켜준 것은 퀸스칼리지 도서관의 지하 서고였다. 그곳에서는 이들의 모든 저작을 언제든 읽을 수 있었다. - <온 더 무비>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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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나하게 취해 화이트호스에서 나오는데 뻔뻔하기 짝이 없는 정신 나간 생각이 떠올랐다. 해부학 최종 시험의 참담한 성적을 학교에서 주는 아주 명성 높은 상(인체해부학 시어도어 윌리엄스 장학금Theodore Williams Scholarship in Human Anatomy)으로 벌충해보겠노라고. 시험은 이미 시작된 뒤였지만 술김에 과감해진 나는 비틀걸음으로 강의실로 들어가 빈 책상을 골라 앉아 시험지를 바라보았다.

풀어야 하는 문제는 7개 문항이었다. 나는 한 문제("구조적 차이가 기능적 차이를 수반하는가?")에 달려들어 이 주제로 논지에 살이 될 성싶은 것이라면 동물학 지식, 식물학 지식 가리지 않고 총동원하여 두 시간을 쉬지 않고 적어 내려갔다. 시험 시간이 끝나려면 아직 한 시간이 남아 있었지만 나머지 여섯 문제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그대로 자리를 떴다.

시험 결과는 그 주말 <타임스The Times>에 실렸다. 수상자는 나, 올리버 울프 색스였다. 모두가 놀라서 입을 다물지 못했다. 해부학 최종 시험에서 꼴찌를 한 사람이 대체 무슨 수로 시어도어 윌리엄스 상을 받을 수 있었다는 거야? 나는 별로 놀라지 않았다. 그건 옥스퍼드대학교 예비시험에서 일어났던 일의 재판 같은 상황이었다. 다만 거꾸로였을 뿐. 나는 ‘예-아니요’를 묻는 지식 시험에는 형편없었지만 에세이라면 물 만난 고기였다.

시어도어 윌리엄스 상에는 부상으로 상금 50파운드가 따라왔다. 50파운드라니! 그렇게 큰돈이 한목에 생긴 것은 난생처음이었다. 이번에는 화이트호스로 가지 않고(그 술집 옆에 있는) 블랙웰서점으로 가서 44파운드를 주고 12권짜리 《옥스퍼드 영어사전Oxford English Dictionary》을 구입했다. 내게는 세상에서 가장 멋진, 그 무엇보다 갖고 싶었던 책이었다. 나는 의학부 시절 내내 이 사전을 통독했고, 지금까지도 이따금씩 책꽂이에서 한 권을 뽑아들고 잠자리로 가곤 한다. - <온 더 무비>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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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서로 그렇게 다를 수가 없는 사람들인데도 죽이 아주 잘 맞았다. 칼먼은 엉뚱하게 뻗어나가기 일쑤인 나의 연상 능력에 매료되었고, 나는 고도의 집중력을 보여주는 그의 정신에 매료되었다. 나는 칼먼을 통해 수리논리학의 거장인 힐베르트(1862~1943, 독일의 수학자: 옮긴이)와 브라우어르(1881~1966, 네덜란드의 수학자·철학자: 옮긴이)를 만났고, 칼먼은 내게서 다윈을 비롯한 19세기의 위대한 자연주의자들을 소개받았다. - <온 더 무비>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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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먼은 브라우어르의 플라톤적 직관주의와 힐베르트의 아리스토텔레스적 형식주의라는, 판이하나 수학적 실재를 상호 보완하는 두 학설을 어떻게든 조화시키고 싶어했다. - <온 더 무비>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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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대생이 되자 강의나 정규수업에 지나치게 치일 일이 없었다. 실질적인 가르침은 환자의 머리맡에서 이루어졌고, 실질적인 공부는 환자의 말을 귀 기울여 듣고 그로부터 ‘현재 질환의 역사’를 알아내고 세부 사항을 채울 정확한 질문을 던지는 것이었다. 우리는 눈과 귀를 크게 뜨고 열고, 손으로 만져 느끼고, 냄새도 맡아야 한다고 배웠다. 심장박동을 듣고 가슴을 타진하고 복부를 만져보거나 또다른 식으로 신체 접촉을 하는 것 역시 환자의 이야기를 듣고 이야기를 나누는 것 못지않게 중요한 일이었다. 이로써 일종의 접촉을 통한 깊은 유대감이 형성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예컨대 의사의 손 자체가 하나의 치료 기구가 되는 셈이었다. - <온 더 무비>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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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스퍼드대학교 의예과에서 한 해부학과 생리학 공부는 실전에 전혀 도움이 되지 못했다. 환자들을 만나고, 환자들 이야기를 경청하고, 환자의 경험과 곤경 속으로 들어가려고(또는 최소한 상상하려고) 애쓰고, 환자들을 염려하고, 환자들을 책임지는, 이 모든 것을 다 처음부터 배워야 했다. 환자들은 진짜 문제를 아주 고통스럽게 겪는(그리고 종종 중대한 기로에 선) 저마다 절절한 사정을 지닌 진짜 사람들이었다. 그렇기에 의료 행위는 단순히 진단과 치료에서 끝나는 문제가 아니며, 훨씬 더 중대한 문제에 직면하기도 한다. 삶의 질 문제를 물어야 하는 상황이 있고, 심지어는 생명을 이어가는 것이 의미가 있는 것인가를 물어야 하는 상황도 있다. - <온 더 무비>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5787915 - P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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