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라는 것은 왜 하루 삼시 세끼 밥을 먹는 것일까. 정말 모두 엄숙한 얼굴로 먹고 있군. 이것도 일종의 의식 같은 것이어서, 가족이 삼시 세끼 시간을 정해 놓고 어두컴컴한 방에 모여서 밥상을 순서대로 늘어놓고, 먹고 싶지 않아도 고개를 숙이고 말없이 밥알을 씹는 것은 집 안에서 꿈틀거리고 있는 영혼들에게 기도하는 의식인 것은 아닐까. - <인간 실격>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429283 - P14
즉 저에게는 ‘인간이 목숨을 부지한다.’라는 말의 의미가 지금껏 전혀 이해되지 않았다는 얘기가 될 것 같습니다. 제가 가진 행복이라는 개념과 이 세상 사람들의 행복이라는 개념이 전혀 다를지도 모른다는 불안. 저는 그 불안 때문에 밤이면 밤마다 전전하고 신음하고, 거의 발광할 뻔한 적도 있었습니다. 저는 과연 행복한 걸까요? 저는 어릴 때부터 정말이지 자주 참 행운아다, 라는 말을 들어왔습니다. 하지만 저 자신은 언제나 지옥 가운데서 사는 느낌이었고, 오히려 저더러 행복하다고 하는 사람들 쪽이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훨씬 더 안락해 보였습니다. - <인간 실격>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429283 - P15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익살이었습니다.
생각하면 할수록 사람이란 것이 알 수가 없어졌고, 저 혼자 별난 놈인 것 같은 불안과 공포가 엄습할 뿐이었습니다. 저는 이웃 사람하고 거의 대화를 못 나눕니다. 무엇을 어떻게 말하면 좋을지 몰랐던 것입니다. - <인간 실격>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429283 - P17
그야 누구든 남이 비난을 퍼붓거나 화를 낼 때 기분이 좋을 사람은 없겠습니다만, 저는 화를 내는 인간의 얼굴에서 사자보다도, 악어보다도, 용보다도 더 끔찍한 동물의 본성을 보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평상시에는 본성을 숨기고 있다가 어떤 순간에, 예컨대 소가 풀밭에서 느긋하게 잠자고 있다가 갑자기 꼬리로 배에 앉은 쇠등에를 탁 쳐서 죽이듯이, 갑자기 무시무시한 정체를 노여움이라는 형태로 드러내는 모습을 보면 저는 언제나 머리털이 곤두서는 듯한 공포를 느꼈습니다. 이 본성 또한 인간이 되는 데 필요한 자격 중 하나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저 자신에 대한 절망감에 휩싸이곤 했습니다. - <인간 실격>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429283 - P19
늘 인간에 대한 공포에 떨고 전율하고 또 인간으로서의 제 언동에 전혀 자신을 갖지 못하고 자신의 고뇌는 가슴속 깊은 곳에 있는 작은 상자에 담아두고 그 우울함과 긴장감을 숨기고 또 숨긴 채 그저 천진난만한 낙천가인 척 가장하면서, 저는 익살스럽고 약간은 별난 아이로 점차 완성되어 갔습니다. - <인간 실격>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429283 - P19
뭐든 상관없으니까 웃게만 만들면 된다. 그러면 인간들은 그들이 말하는 소위 ‘삶’이라는 것 밖에 내가 있어도 그다지 신경 쓰지 않을지도 몰라. 어쨌든 인간들의 눈에 거슬려서는 안 돼. 나는 무(無)야. 바람이야. 텅 비었어. 그런 생각만이 강해져서 저는 익살로 가족을 웃겼고, 또 가족보다 더 불가사의하고 무시무시한 머슴이랑 하녀들한테까지도 필사적으로 익살 서비스를 했던 것입니다. - <인간 실격>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429283 - P20
싫은 것을 싫다고 하지도 못하고, 또 좋아하는 것도 쭈뼛쭈뼛 훔치듯이 전혀 즐기지 못하고, 그러고는 표현할 길 없는 공포에 몸부림쳤습니다. 즉 저에게는 양자택일하는 능력조차도 없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뒷날 저의 소위 ‘부끄럼 많은 생애’의 큰 원인이 되기도 한 성격의 하나였던 것 같습니다. - <인간 실격>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429283 - P21
저는 학교에서 존경을 받을 뻔했습니다. 존경받는다는 개념 또한 저를 몹시 두렵게 했습니다. 거의 완벽하게 사람들을 속이다가 전지전능한 어떤 사람한테 간파당하여 산산조각이 나고 죽기보다 더한 창피를 당하게 되는 것이 ‘존경받는다’는 상태에 대한 제 정의였습니다. 인간을 속여서 ‘존경받는다’해도 누군가 한 사람은 알고 있다. 그리고 인간들도 그 사람한테서 듣고 차차 속은 것을 알아차리게 되었을 때, 그때 인간들의 노여움이며 복수는 정말이지 도대체 어떤 것일까요. 상상만 해도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것이었습니다. - <인간 실격>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429283 - P25
그렇지만 제 본성은 장난꾸러기 같은 것하고는 도대체가 정반대의 것이었습니다. 그 당시 이미 저는 하녀와 머슴한테서 서글픈 일을 배웠고 순결을 잃었습니다. 어린아이한테 그런 짓을 하는 것은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범죄 가운데서도 가장 추악하고 천박하고 잔인한 범죄라고 지금은 생각합니다. 그러나 저는 참았습니다. 그것으로 또 한 가지 인간의 특질을 알게 됐다는 생각까지 들었고, 힘없이 웃었습니다. - <인간 실격>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429283 - P27
인간에게 호소한다. 저는 그런 수단에는 조금도 기대를 걸 수가 없었습니다. 아버지한테 호소해도, 어머니한테 호소해도, 순경한테 호소해도, 정부에 호소해도 결국은 처세술에 능한 사람들의 논리에 져버리는 게 고작 아닐까. 틀림없이 편파적일 게 뻔해. 필경 인간에게 호소하는 것은 헛일이다. 나는 역시 아무것도 사실대로 말하지 않고 참고, 그리고 익살꾼 노릇을 계속해 갈 수밖에 없다는 마음이 되었습니다. - <인간 실격>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429283 - P28
서로 속이면서, 게다가 이상하게도 전혀 상처를 입지도 않고, 서로가 서로를 속이고 있다는 사실조차 알아차리지 못하는 듯, 정말이지 산뜻하고 깨끗하고 밝고 명랑한 불신이 인간의 삶에는 충만한 것으로 느껴집니다. - <인간 실격>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429283 - P30
인간이 저 요조에게 신용이라는 껍질을 단단히 닫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 <인간 실격>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429283 - P30
그리고 아무한테도 호소하지 못하는 저의 이 고독한 냄새를 많은 여성들이 본능적으로 맡게 된 것이, 훗날 그녀들이 저의 약점을 틈타 접근하게 된 이유 중 하나인 것같이 느껴집니다. 즉 저는 여성들이 보기에 사랑의 비밀을 지켜줄 사나이였다는 얘기입니다. - <인간 실격>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429283 - P31
이제는 내 정체를 완벽하게 은폐할 수 있나 보다 하고 마음을 놓으려던 참에 저는 실로 불의에 등 뒤에서 칼을 맞았습니다. 그것은 등 뒤에서 남을 찌르는 사나이의 예에 어긋나지 않게 반에서 가장 빈약한 몸집에 얼굴도 시퍼렇고, 아버지나 형한테 물려받은 것이 분명하고 소매가 쇼토쿠 태자의 옷처럼 긴 윗도리를 입은, 공부는 전혀 못하고 교련이나 체육 시간에는 언제나 견학을 하는 백치 비슷한 학생이었습니다. 저조차도 미처 그 학생까지 경계할 필요성은 못 느끼고 있었던 것입니다. - <인간 실격>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429283 - P34
다케이치가 제 등을 찌르면서 낮은 목소리로 이렇게 속삭였습니다.
"부러 그랬지?"
세상이 뒤집히는 것 같았습니다. 일부러 실패했다는 사실을 다른 사람도 아닌 다케이치한테 간파당하리라곤 전혀 생각도 못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온 세상이 일순간에 지옥의 업화에 휩싸여 불타오르는 것을 눈앞에 보는 듯하여 왁 하고 소리치면서 발광할 것 같은 기색을 필사적으로 억눌렀습니다.
그때부터 계속된 나날의 불안과 공포. - <인간 실격>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429283 - P35
아름답다고 느낀 것을 아름답게만 표현하려고 노력하는 안이함과 어리석음. 대가들은 아무것도 아닌 것을 주관에 의해 아름답게 창조하고, 혹은 추악한 것에 구토를 느끼면서도 그에 대한 흥미를 감추지 않고 표현하는 희열에 잠겼던 것입니다 - <인간 실격>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429283 - P48
여자가 홀딱 반할 거야, 라는 예언과 위대한 화가가 될 거야, 라는 예언, 이 두 가지 예언을 바보 다케이치는 제 이마에 새겨주었고 저는 이윽고 도쿄로 상경했습니다. - <인간 실격>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429283 - P50
저는 이윽고 화방에서 어떤 미술 학도로부터 술과 담배와 창녀와 전당포와 좌익 사상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묘한 배합입니다만 사실입니다. - <인간 실격>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429283 - P52
호리키하고 교제하면서 또 좋았던 점은 호리키가 상대방의 생각 따위는 완전히 무시하고 그의 소위 정열이 분출하는 대로(혹은 정열이란 상대방의 입장을 무시하는 것인지도 모르지요.) 온종일 시시한 얘기를 계속 지껄여대서, 둘이서 걷다가 지쳐도 어색한 침묵에 빠지게 될 염려가 전혀 없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사람과 접할 때면 끔찍한 침묵이 그 자리에 나타날 것을 경계하느라 원래는 입이 무거운 제가 죽기 아니면 살기로 익살을 떨었던 것입니다만, 지금은 호리키 이 바보가 무의식적으로 그 익살꾼 역할을 자진해서 대신해 주었기 때문에 저는 대답도 제대로 하지 않고 그저 흘려들으면서 가끔 설마, 라는 둥 맞장구치면서 웃기만 하면 되었던 것입니다. - <인간 실격>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429283 - P57
술, 담배, 창녀, 그런 것들이 인간에 대한 공포를 잠시나마 잊게 해주는 상당히 괜찮은 수단이라는 사실을 저도 이윽고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 수단들을 구하기 위해서라면 제 소유물을 모두 팔아치워도 후회하지 않을 것 같은 마음까지 들었습니다. - <인간 실격>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429283 - P57
저한테 창녀라는 것은 인간도 여성도 아닌 백치 혹은 미치광이처럼 느껴져서 그 품 안에서는 완전히 안심하고 푹 잘 수 있었습니다. 그들 모두가 서글플 만큼, 정말이지 티끌만큼도 욕심이라는 것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저에게서 동류로서의 친근감 같은 것을 느끼는지, 저는 언제나 창녀들로부터 거북살스럽지 않을 정도의 자연스러운 호감을 샀습니다. - <인간 실격>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429283 - P57
저는 백치 아니면 미치광이 같은 그 창녀들한테서 마리아의 후광을 실제로 본 적도 있습니다. - <인간 실격>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429283 - P58
비합법. 저는 그것을 어렴풋하게나마 즐겼던 것입니다. 오히려 마음이 편했던 것입니다. 이 세상의 합법이라는 것이 오히려 두려웠고(그것에서는 한없는 강인함이 느껴졌습니다.) 그 구조가 불가해해서, 도저히 창문도 없고 뼛속까지 냉기가 스며드는 그 방에 앉아 있을 수가 없어서 바깥이 비합법의 바다라 해도 거기에 뛰어들어 헤엄치다 죽음에 이르는 편이 저한테는 오히려 마음이 편했던 것 같습니다. - <인간 실격>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429283 - P62
‘음지의 사람’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인간 세상에서는 비참한 패자, 또는 악덕한 자를 지칭하는 말 같습니다만, 저는 태어날 때부터 음지의 존재였던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 이 세상에서 떳떳하지 못한 놈으로 손가락질당하는 사람들을 만나면 언제나 다정한 마음이 되곤 했습니다. 그리고 저의 그 ‘다정한 마음’은 저 자신도 황홀해질 정도로 정다운 마음이었던 것입니다. - <인간 실격>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429283 - P62
또 ‘범인(犯人) 의식’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저는 이 인간 세상에서 평생 동안 범인 의식으로 괴로워하겠지만 그것은 조강지처 같은 나의 좋은 반려자니까 그 녀석하고 둘이 쓸쓸하게 노니는 것도 내가 살아가는 방식 중 하나일지도 모릅니다. - <인간 실격>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429283 - P63
이 세상 인간들의 ‘삶’이라는 것을 두려워하면서 매일 밤 잠 못 이루며 지옥에서 신음하기보다는 오히려 감옥 쪽이 편할지도 모른다고까지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 <인간 실격>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429283 - P65
그러나 그 내켜하지 않는 성격은 결코 제가 교활해서가 아니고, 여자라는 것이 함께 잔 일과 아침에 일어나고 나서부터의 일 사이에 조금도, 티끌만큼도 연결짓지 않고 완전히 잊어버린 듯 완벽하게 두 세계를 단절시키며 살아가는 그 불가사의한 현상이 잘 이해되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 <인간 실격>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429283 - P80
저한테는 원래 소유욕이라는 것이 적었고, 또 어쩌다 미약하게 아깝다는 마음이 드는 일이 있어도 감히 그 소유권을 당당히 주장하며 남하고 다툴 만한 기력은 없었습니다. - <인간 실격>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429283 - P81
"진짜야?" 조용한 미소였습니다. 진땀이 석 되 흘렀습니다. 아니, 지금 생각해도 콱 죽고 싶어집니다. 중학교 시절, 저 바보 다케이치한테서 부러 그랬지, 라는 말로 등에 칼을 맞아 지옥으로 굴러 떨어졌던 때의 느낌 이상이라고 해도 결코 과장이 아닌 기분이었습니다. 그 일과 이 일, 이 두 가지는 제 생애의 연기 중 대실패의 기록입니다. 검사의 그런 조용한 모멸에 맞닥뜨리느니 차라리 십 년 형을 구형받는 편이 나았다고 생각할 때조차 가끔 있을 정도입니다. - <인간 실격>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429283 - P93
다케이치의 예언 중 하나는 들어맞았고, 하나는 빗나갔습니다. 여자들이 쫓아다닐 거라는 불명예스러운 예언 쪽은 맞았습니다만, 틀림없이 훌륭한 화가가 될 거라는 축복의 예언은 빗나갔습니다. - <인간 실격>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429283 - P94
어차피 들킬 게 뻔한데도 솔직하게 말하기가 무서워서 반드시 거기에 뭔가 꼬리를 다는 것이 저의 서글픈 버릇의 하나인데, 그것은 세상 사람들이 ‘거짓말쟁이’라고 부르며 멸시하는 성격과 비슷하지만 저는 무슨 득이라도 보려고 그런 꼬리를 단 적은 거의 없습니다. 그저 흥이 깨지면서 분위기가 일변하는 것이 질식할 만큼 끔찍해서, 나중에 저한테 불이익이 되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예의 ‘필사적인 서비스’, 그것이 비록 잘못되고 시원찮고 우스꽝스러운 것이라 할지라도 그 서비스 정신에서 저도 모르게 한마디 덧붙이게 되는 경우가 많았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 습성 또한 세상의 소위 ‘정직한 사람들’에게 이용당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 <인간 실격>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429283 - P104
안팎 구별 없이, 그저 끊임없이 인간의 삶에서 도망쳐 다니는 바보 멍청이인 저 혼자만이 완전히 뒤에 처져 호리키한테조차 저버려진 것 같은 느낌에 당황했고, 칠 벗겨진 젓가락을 움직이면서 견딜 수 없는 쓸쓸함을 맛보았다는 사실을 기록해 두고 싶을 뿐입니다. - <인간 실격>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429283 - P109
저는 하느님조차도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믿지 못하고 하느님의 벌만을 믿었던 것입니다. 신앙, 그것은 단지 하느님의 채찍을 받기 위해 고개를 떨구고 심판대로 향하는 일로 느껴졌습니다. 지옥은 믿을 수 있었지만 천국의 존재는 아무래도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 <인간 실격>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429283 - P116
세상이란 게 도대체 뭘까요. 인간의 복수(複數)일까요. 그 세상이란 것의 실체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 <인간 실격>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429283 - P119
그리고 세상이라는 것이 개인이 아닐까, 라고 생각하기 시작하면서 저는 예전보다는 다소 제 의지대로 움직일 수 있게 되었습니다. - <인간 실격>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429283 - P120
세상. 저도 그럭저럭 그것을 희미하게 알게 된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세상이란 개인과 개인 간의 투쟁이고, 일시적인 투쟁이며 그때만 이기면 된다. 노예조차도 노예다운 비굴한 보복을 하는 법이다. 그러니까 인간은 오로지 그 자리에서의 한판 승부에 모든 것을 걸지 않는다면 살아남을 방법이 없는 것이다. 그럴싸한 대의명분 비슷한 것을 늘어놓지만, 노력의 목표는 언제나 개인. 개인을 넘어 또다시 개인. 세상의 난해함은 개인의 난해함. 대양(大洋)은 세상이 아니라 개인이다, 라며 세상이라는 넓은 바다의 환영에 겁먹는 데서 다소 해방되어 예전만큼 이것저것 한도 끝도 없이 신경 쓰는 일은 그만두고, 말하자면 필요에 따라 얼마간은 뻔뻔하게 행동할 줄 알게 된 것입니다. - <인간 실격>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429283 - P126
그야 분명히 몇십만이나 되는 세균이 돌아다니고 우글거리고 있다는 것은 ‘과학적’으로 정확한 사실이겠죠. 그러나 동시에 그 존재를 완전히 묵살해 버리기만 하면 그것은 저와 전혀 상관없는, 금방 사라져버리는 ‘과학의 유령’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저는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 <인간 실격>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429283 - P128
말은 그렇게 하지만 저는 역시 인간이라는 것이 여전히 무서워서 가게 손님들을 만나려면 술을 한 컵 벌컥 마시고 나서가 아니면 안 되었습니다. 무서운 것을 보고 싶어 하는 마음. 그래도 저는 매일 밤 가게에 나가서, 어린아이가 두려움을 느낄 때 손안의 작은 동물을 오히려 더 꽉 움켜쥐는 것처럼 가게 손님들에게 술에 취해 유치한 예술론을 펼칠 정도가 되었습니다. - <인간 실격>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429283 - P129
처녀의 아름다움이라는 건 바보 같은 시인들의 달콤하고 감상적인 환영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 세상에 정말로 존재하는 것이었구나. - <인간 실격>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429283 - P136
호리키와 나. 서로 경멸하면서 교제하고 서로를 쓸모없는 인간으로 만들어가는 그런 것이 이 세상의 소위 ‘교우’라는 것이라면, 저와 호리키의 관계도 교우였음은 틀림없습니다. - <인간 실격>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429283 - P137
죄와 벌. 도스토예프스키. 언뜻 그 생각이 머리 한쪽 구석을 스치자 흠칫했습니다. 만일 저 도스토 씨가 죄와 벌을 유의어로 생각한 것이 아니라 반의어로 병렬한 것이었다면? 죄와 벌, 절대 서로 통할 수 없는 것. 얼음과 숯처럼 융화되지 않는 것. 죄와 벌을 반의어로 생각했던 도스토예프스키의 바닷말, 썩은 연못, 난마(亂麻)의 그 밑바닥…… 아아, 알 것 같다. 아냐, 아직…… 하며 머리에서 주마등이 빙글빙글 돌고 있을 때였습니다. - <인간 실격>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429283 - P149
저의 새치는 그날 밤부터 나기 시작하였으며 점점 더 모든 일에 자신감을 잃게 되었고, 점점 더 인간을 한없이 의심하게 되었고, 이 세상에서 삶에 대한 일체의 기대, 기쁨, 공명 등에서 영원히 멀어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실로 그것은 제 생애에 있어서 치명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저는 정면에서 정수리에 치명타를 입었고 그 뒤로 그 상처는 어떤 인간에게 접근하더라도 그때마다 쓰라린 것이었습니다. - <인간 실격>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429283 - P151
저처럼 비루하게 쭈뼛쭈뼛 남의 안색만 살피고 남을 믿는 능력에 금이 가버린 자에게 요시코의 순결무구한 신뢰심은 그야말로 아오바 폭포처럼 상큼하게 느껴졌던 것입니다. 그것이 하룻밤 사이에 누런 오수로 변해 버렸습니다. - <인간 실격>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429283 - P152
무구한 신뢰심은 죄인가? 유일하게 믿었던 장점에조차 의혹을 품게 된 저는 더 이상 뭐가 뭔지 알 수 없게 되었고, 그저 알코올에 손을 뻗칠 뿐이었습니다. - <인간 실격>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429283 - P155
약방 부인한테 그런 말을 듣고 나니 저는 이미 상당히 심각한 중독자가 되어버린 것 같은 느낌이 들었고 (저는 남의 암시에 정말이지 쉽게 걸리는 성격이었습니다. 이 돈은 쓰면 안 돼, 라고 하면서 "너니까 알 수 없지만" 따위의 말을 덧붙이면 왠지 쓰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기대를 저버리는 것 같은, 묘한 착각이 들어서 꼭 그 돈을 써버리는 것이었습니다.) 중독에 대한 불안 때문에 약품을 더 많이 찾게 된 것입니다. - <인간 실격>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429283 - P165
이 약품 또한 소주처럼, 아니 그 이상으로 불결하고 저주스러운 것이라는 사실을 마음속에서 절감하게 된 것은 이미 완전한 중독자가 되어버린 후였습니다. - <인간 실격>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429283 - P167
"아니. 이젠 필요 없어." 정말 신기한 일이었습니다. 누가 무언가를 주었을 때 그것을 거절한 것은 제 생애에서 그때 단 한 번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제 불행은 거절할 능력이 없는 자의 불행이었습니다. 권하는데 거절하면 상대방 마음에도 제 마음에도 영원히 치유할 길 없는 생생한 금이 갈 것 같은 공포에 위협당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때 저는 그렇게 반미치광이처럼 원하던 모르핀을 실로 자연스럽게 거절했습니다. 말하자면 ‘하느님 같은’ 요시코의 무지에 감동한 것일까요. 저는 그 순간 이미 중독자가 아니게 되었던 것은 아닐까요. - <인간 실격>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429283 - P171
인간 실격.
이제 저는 더 이상 인간이 아니었습니다. - <인간 실격>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429283 - P172
진정한 폐인.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알고 난 뒤 저는 점점 더 얼간이가 되어갔습니다. 아버님이 이젠 안 계신다. 내 마음에서 한순간도 떨어지지 않았던 그 그립고도 무서운 존재가 이젠 안 계시다. 제 고뇌의 항아리가 텅 빈 것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제 고뇌의 항아리가 공연히 무거웠던 것은 아버지 탓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조차 들었습니다. 모든 의욕을 상실했습니다. 고뇌할 능력조차도 상실했습니다. - <인간 실격>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429283 - P173
지금 저에게는 행복도 불행도 없습니다.
모든 것은 지나간다는 것.
제가 지금까지 아비규환으로 살아온 소위 ‘인간’의 세계에서 단 한 가지 진리처럼 느껴지는 것은 그것뿐입니다.
모든 것은 그저 지나갈 뿐입니다.
저는 올해로 스물일곱이 되었습니다. 백발이 눈에 띄게 늘어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마흔 살 이상으로 봅니다. - <인간 실격>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429283 - P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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