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가운 공기가 허파를 가득 채웠다. 열린 창문을 향해 몸을 기울이자 겨울밤의 침묵이 들려왔다. 섬세하고 복잡하며 조직이 성긴 눈(雪)이라는 존재에 흡수된 소리가 느껴지는 것 같았다. 그 하얀 풍경 위에서 움직이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그 죽음 같은 풍경이 그를 잡아당기고, 그의 의식을 빨아들이는 것 같았다. 공기 중의 소리를 끌어당겨 차갑고 하얗고 부드러운 눈 밑에 묻어버릴 때처럼. 그는 자신이 그 하얀 풍경을 향해 끌려가는 것을 느꼈다. 눈앞에 한없이 펼쳐진 하얀 풍경은 어둠의 일부가 되어 반짝였다. 그것은 높이도 깊이도 가늠할 수 없는,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의 일부였다. 순간적으로 그는 창가에 꼼짝도 않고 앉아 있는 몸에서 자신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그 순간 모든 것이, 그러니까 그 하얗기만 한 풍경과 나무들과 높은 기둥들과 밤과 저 멀리의 별들이 믿을 수 없을 만큼 작고 멀어 보였다. 마치 그것들이 무(無)를 향해 점차 졸아들고 있는 것 같았다. 그때 등 뒤에서 라디에이터가 쩡 하는 소리를 냈다. 그가 몸을 움직이자 풍경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알라딘 eBook <스토너 (초판본)> (존 윌리엄스 지음, 김승욱 옮김) 중에서 - P261

그해에, 특히 겨울에 그는 자신이 그처럼 비현실적인 상태를 맛보는 시간이 점점 더 늘어나고 있음을 깨달았다. 마음만 먹으면 몸에서 의식을 분리시킬 수 있는 것 같았다. 그는 자신을 지켜보았다. 잘 모르는 사이인데도 묘하게 친숙한 누군가가 자신이 해야 하는 묘하게 친숙한 일들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전에는 이런 식으로 자신이 분리되는 느낌을 겪은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는 이 일이 고민거리가 되어야 마땅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냥 멍하기만 했다. 이 일이 중요하다고 자신을 납득시킬 수 없었다. 이제 마흔두 살인 그의 앞날에는 즐겁게 여길 만한 것이 전혀 보이지 않았고, 뒤를 돌아보아도 굳이 기억하고 싶은 것이 별로 없었다.

-알라딘 eBook <스토너 (초판본)> (존 윌리엄스 지음, 김승욱 옮김) 중에서 - P263

처음에는 불안하게 곤두선 마음만이 원고를 건드렸다. 하지만 점차 단어들이 강력하게 그를 향해 다가왔다. 그는 얼굴을 찌푸리며 더욱 주의 깊게 읽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빠져들었다. 그는 처음으로 되돌아갔고, 글을 따라 그의 시선이 흘러갔다. 그래, 그렇겠지. 그는 혼잣말을 했다. 그녀가 세미나 발표 때 말했던 내용 중 많은 부분이 여기에 포함되어 있었지만, 그때와는 다른 방식으로 배열되어서 그 자신도 어렴풋하게 언뜻 엿보기만 했던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 세상에. 그는 놀라움에 차서 혼잣말을 했다. 종이를 넘기는 그의 손가락이 흥분으로 가늘게 떨렸다.

-알라딘 eBook <스토너 (초판본)> (존 윌리엄스 지음, 김승욱 옮김) 중에서 - P269

이제 나이를 먹은 그는 압도적일 정도로 단순해서 대처할 수단이 전혀 없는 문제가 점점 강렬해지는 순간에 도달했다. 자신의 생이 살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지, 과연 그랬던 적이 있기는 한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자기도 모르게 떠오르곤 했다. 모든 사람이 어느 시기에 직면하게 되는 의문인 것 같았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도 이 의문이 이토록 비정하게 다가오는지 궁금했다. 이 의문은 슬픔도 함께 가져왔다. 하지만 그것은 그 자신이나 그의 운명과는 별로 상관이 없는 일반적인 슬픔이었다(그의 생각에는 그런 것 같았다). 문제의 의문이 지금 자신이 직면한 가장 뻔한 원인, 즉 자신의 삶에서 튀어나온 것인지도 확실히 알 수 없었다. 그가 생각하기에는 나이를 먹은 탓에, 그가 우연히 겪은 일들과 주변 상황이 강렬한 탓에, 자신이 그 일들을 나름대로 이해하게 된 탓에 그런 의문이 생겨난 것 같았다. 그는 보잘것없지만 지금까지 자신이 배운 것들 덕분에 이런 지식을 얻게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 우울하고 역설적인 기쁨을 느꼈다. 결국은 모든 것이, 심지어 그에게 이런 지식을 알려준 배움까지도 무익하고 공허하며, 궁극적으로는 배움으로도 변하지 않는 무(無)로 졸아드는 것 같다는 생각도 마찬가지였다.

-알라딘 eBook <스토너 (초판본)> (존 윌리엄스 지음, 김승욱 옮김) 중에서 - P260

캐서린 드리스콜이 문을 열었을 때 윌리엄 스토너는 하마터면 그녀를 알아보지 못할 뻔했다. 머리카락을 전부 높이 쓸어올려서 뒤통수에 아무렇게나 묶어두었기 때문에 작은 분홍색 귀가 완전히 드러나 있었다. 어두운 색의 뿔테안경을 쓴 그녀의 검은 눈이 놀라서 휘둥그레졌다. 그녀가 입은 남자 같은 셔츠는 목 부위가 열려 있었고, 검은 바지는 그녀를 평소보다 우아하고 날씬하게 보이게 했다.

-알라딘 eBook <스토너 (초판본)> (존 윌리엄스 지음, 김승욱 옮김) 중에서 - P271

"그렇게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살다 보면 그런 일도 있는 법이죠. 세월이 흐르면 다 잘 풀릴 겁니다. 별로 중요한 일이 아니에요."
이 말을 하고 나자 갑자기 그것이 정말로 중요하지 않은 일이 되었다. 순간적으로 자기 말에 담긴 진실을 느낀 그는 몇 달 만에 처음으로 자신을 무겁게 짓누르던 절망이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그는 그동안 자신의 절망이 그토록 무거웠다는 것조차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마음이 들뜨다 못해 현기증이 날 것만 같고, 금방이라도 웃음이 터질 것 같은 기분으로 그는 다시 말했다. "별로 중요한 일이 아닙니다."

-알라딘 eBook <스토너 (초판본)> (존 윌리엄스 지음, 김승욱 옮김) 중에서 - P274

그렇게 그는 연애를 했다.

-알라딘 eBook <스토너 (초판본)> (존 윌리엄스 지음, 김승욱 옮김) 중에서 - P274

그렇게 그는 연애를 했다.
그는 캐서린 드리스콜에게 자신이 품고 있는 감정을 서서히 깨달았다. 어느새 그는 자기도 모르게 오후에 그녀의 집을 찾아갈 핑계를 찾아내고 있었다. 어떤 책이나 논문 제목이 떠오르면 그것을 적어두고는 일부러 제시 홀 복도에서 그녀를 만나지 않으려고 피해 다녔다. 그래야 오후에 그녀의 집에 들러서 커피를 마시며 그 제목을 알려주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기 때문이었다.

-알라딘 eBook <스토너 (초판본)> (존 윌리엄스 지음, 김승욱 옮김) 중에서 - P275

그는 자신을 조금 바보 같은 인물로 생각하고 있었다. 누구든 일반적인 감정 외에 특별한 감정을 품기 힘든 사람. 그는 캐서린 드리스콜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인정한 뒤, 남들이 쉽사리 알아차릴 만큼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필사적으로 주의를 기울였다.

-알라딘 eBook <스토너 (초판본)> (존 윌리엄스 지음, 김승욱 옮김) 중에서 - P276

스토너는 자신이 그녀를 찾아가는 것이 슬슬 그녀에게 짐이 되고 있으며, 그녀가 예의 때문에 그 사실을 드러내지 못하고 있다고 속으로 말하면서 미처 예상치 못했던 강렬한 슬픔을 느꼈다. 그는 이미 예상했던 대로 결정을 내렸다. 자신이 그녀의 동요를 눈치챘다는 사실을 그녀가 알아차리지 못하게 조금씩 천천히 그녀에게서 멀어지자고. 그가 그녀에게 줄 수 있는 도움을 모두 주고 멀어지는 것처럼 보이자고.

-알라딘 eBook <스토너 (초판본)> (존 윌리엄스 지음, 김승욱 옮김) 중에서 - P276

그는 자신이 떨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는 소년처럼 서투르고 어색하게 커피 탁자 옆을 돌아가서 그녀 옆에 앉았다. 서투르고 조심스럽게 두 사람의 손이 서로를 향해 뻗어 나갔고, 두 사람은 어색하고 긴장한 표정으로 서로를 꼭 끌어안았다. 그렇게 오랫동안 가만히 앉아 있었다.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두 사람이 함께 품고 있는 이 기묘하고 무서운 것이 도망쳐 버릴 것만 같았다.

-알라딘 eBook <스토너 (초판본)> (존 윌리엄스 지음, 김승욱 옮김) 중에서 - P282

나이 마흔셋에 윌리엄 스토너는 다른 사람들이 훨씬 더 어린 나이에 이미 배운 것을 배웠다. 첫사랑이 곧 마지막 사랑은 아니며, 사랑은 종착역이 아니라 사람들이 서로를 알아가는 과정이라는 것.

-알라딘 eBook <스토너 (초판본)> (존 윌리엄스 지음, 김승욱 옮김) 중에서 - P282

스토너는 거의 매일 수업이 끝난 오후에 그녀의 집으로 왔다. 두 사람은 사랑을 나누고, 이야기를 나누고, 또 사랑을 나눴다. 아무리 놀아도 지치지 않는 아이들 같았다. 그렇게 봄날이 흘러갔고, 두 사람은 여름을 고대했다.

-알라딘 eBook <스토너 (초판본)> (존 윌리엄스 지음, 김승욱 옮김) 중에서 - P283

젊다 못해 어렸을 때 스토너는 사랑이란 운 좋은 사람이나 찾아낼 수 있는 절대적인 상태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른이 된 뒤에는 사랑이란 거짓 종교가 말하는 천국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재미있지만 믿을 수 없다는 시선으로, 부드럽고 친숙한 경멸로, 그리고 당황스러운 향수(鄕愁)로 바라보아야 하는 것. 이제 중년이 된 그는 사랑이란 은총도 환상도 아니라는 것을 조금씩 깨닫기 시작했다. 사랑이란 무언가 되어가는 행위, 순간순간 하루하루 의지와 지성과 마음으로 창조되고 수정되는 상태였다.

-알라딘 eBook <스토너 (초판본)> (존 윌리엄스 지음, 김승욱 옮김) 중에서 - P284

열정에서 시작된 감정이 욕망을 거쳐 깊은 관능으로 자라나 순간마다 계속 새로워졌다.

-알라딘 eBook <스토너 (초판본)> (존 윌리엄스 지음, 김승욱 옮김) 중에서 - P288

그해 여름 두 사람의 시간이 온통 정사와 이야기로만 채워진 것은 아니었다. 두 사람은 말하지 않고도 함께 있는 법을 터득했으며, 편안히 쉬는 데에 익숙해졌다. 스토너는 캐서린의 집에 책들을 가져다놓았다. 나중에는 책꽂이를 새로 들여놓아야 할 정도였다. 그녀와 함께 나날을 보내면서 스토너는 거의 팽개치다시피 했던 공부를 자신도 모르게 다시 시작했음을 깨달았다. 캐서린도 자신의 논문이 될 책을 계속 썼다. 그녀는 벽에 붙인 자그마한 책상에 몇 시간 동안 계속 앉아서 고개를 수그린 채 책과 논문에 열중하곤 했다. 그녀가 자주 입는 암청색 로브에서 가늘고 창백한 목이 구부정하게 흐르듯이 이어졌다. 스토너는 의자에 널브러지거나 침대에 누운 자세로 역시 그녀처럼 공부에 몰두했다.

-알라딘 eBook <스토너 (초판본)> (존 윌리엄스 지음, 김승욱 옮김) 중에서 - P289

그는 의지력을 동원해야 비로소 자신이 이디스를 속이고 있음을 떠올릴 수 있었다. 그가 영위하고 있는 두 개의 삶은 완전히 별개의 것처럼 떨어져 있었다. 그는 자신이 자기성찰에 약하고 자기기만 또한 가능하다는 점을 알고 있었지만, 누구든 자신이 책임을 져야 하는 사람에게 피해를 주고 있다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알라딘 eBook <스토너 (초판본)> (존 윌리엄스 지음, 김승욱 옮김) 중에서 - P291

때 이른 서리가 내린 뒤 강렬한 늦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9월에 가을학기가 시작되었다. 스토너는 오랜만에 열정을 느끼며 강의에 임했다. 100여 명의 신입생들을 대면해야 한다는 사실에도 그의 새로운 열정은 누그러지지 않았다.

-알라딘 eBook <스토너 (초판본)> (존 윌리엄스 지음, 김승욱 옮김) 중에서 - P294

날이 추운데도 두 사람은 거의 매일 숲 속을 산책했다. 눈밭을 배경으로 녹색이 감도는 검은색을 띤 커다란 소나무들이 구름 한 점 없는 연한 푸른색 하늘을 향해 육중하게 솟아 있었다. 가끔 가지에서 눈덩이가 미끄러져 떨어지는 소리에 사방을 채운 침묵이 한층 더 강렬해졌다. 가끔 새 한 마리가 외로이 지저귀는 소리 또한 두 사람이 숲 속을 걸으며 느끼는 고적함을 한층 더 강렬하게 만들어주었다.

-알라딘 eBook <스토너 (초판본)> (존 윌리엄스 지음, 김승욱 옮김) 중에서 - P298

두 사람은 빛이 절반밖에 들지 않는 세상에 살면서 자신들의 좋은 점들을 드러냈다. 그래서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자 사람들이 살고 있는 바깥세상, 변화와 지속적인 움직임이 있는 그 세상이 비현실적인 거짓 세상처럼 보였다. 두 사람의 삶은 이 두 세계에 철저하게 나눠져 있었다. 이렇게 분열된 삶을 사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인 것 같았다.

-알라딘 eBook <스토너 (초판본)> (존 윌리엄스 지음, 김승욱 옮김) 중에서 - P307

존재의 작은 중심에서 자라난 무감각한 공간 속 어딘가에서 자기 인생의 일부가 끝나버렸음을. 자신의 일부가 거의 죽음을 맞이하기 직전이라서 다가오는 죽음을 거의 차분한 태도로 지켜볼 수 있을 정도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알라딘 eBook <스토너 (초판본)> (존 윌리엄스 지음, 김승욱 옮김) 중에서 - P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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