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연재가 생각하기에 아무리 철저하게 관리한다고 해도 마사는 말들에게 감옥일 뿐이었다. 긴 복도를 따라 말 한 마리가 들어갈 수 있을 만큼의 마방이 교도소의 방처럼 늘어서 있었다. 좌우로 다섯 발자국씩 이동할 수 있는, 사면이 콘크리트로 된 공간이었다. - <천 개의 파랑>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496644 - P57

민주가 숨 가쁘게 말을 마치자, 연재는 무심히 반박했다.

"그래도 갇혀 있는 거 맞잖아요."

민주는 더 이상 항변하지 못했다. 아무리 스트레스를 받지 않도록, 초원과 비슷한 환경으로 꾸몄다고 할지라도 초원은 아니었다. 연재는 마방 사이를 지나는 것을 늘 답답해했는데, 자신을 쳐다보는 말들의 눈빛이 퍽 슬퍼 보였기 때문이었다. 은혜는 말들의 눈이 무언가를 그리워하는 것처럼 보인다고 했다. 하지만 연재는 은혜의 말이 틀렸다고 생각했다. 그리움을 느끼려면 그리워할 대상이 분명하게 존재해야 했다. 말들이 실체를 기억할까. 한 번도 초원을 밟아보지 못할 말들은 원인을 알 수 없는 답답함만 느낄 것이다. 갇혀 있지만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 모르는 상태. 문명사회 이후 쌓아온 말들의 기억 DNA는 초원보다 마방에 더 많을 것 같았다. - <천 개의 파랑>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496644 - P59

"경기 도중에 떨어졌는데 바로 뒤에 오던 선수에게 밟혔어요. 제 실수죠. 딴생각을 하면 안 됐는데 문득 하늘이 푸르다는 생각을 했어요." - <천 개의 파랑>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496644 - P64

"날이 맑은 날 초원을 뛰고 있다는 상상을 했거든요. 스크린으로 보이는 가짜 말고 진짜요. 진짜 초원을 달려본 적 있나요?" - <천 개의 파랑>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496644 - P64

경마경기의 약점은 기수가 인간이라는 점에 있었고, 이는 말이 최고 속도를 내지 못하게 하는 방해요인 중 하나였다. 인간보다 작고 가벼우며, 떨어진다 한들 생명과 연관되지 않는 새로운 기수가 필요했다. 기수 휴머노이드는 평균 150센티미터의 신장과 탄소섬유로 이루어진 몸체 덕분에 인간보다 훨씬 가벼웠다. 말이 달릴 때의 충격을 완화할 수 있는 부드러운 관절, 말의 목덜미를 매만질 수 있도록 상체보다 길게 제작된 팔. 색으로 기수를 구분하기 위해 만든 투구. 존재 자체가 말을 타기 위해 만들어졌으므로 낙마해 부서진 기수는 그대로 폐기처분 됐고 머지않아 새로운 기수가 등장할 거였다. 민주는 단지 콜리가 하는 말들이 다른 기수와는 조금 달라 기수방에서 콜리를 빼두었던 것뿐이었다. 아주 잠시 동안만, 하늘이 보고 싶다고 해서…. - <천 개의 파랑>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496644 - P68

하늘이 어땠느냐고 물으면 콜리는 마치 비가 온 후 날이 갠 것처럼 푸르고 창백했다고 대답했다.

"왜 말을 타다가 하늘을 바라본 거야?"

"하늘이 그곳에서 그렇게 빛나는데 어떻게 바라보지 않을 수가 있겠어요?"

그 다름을 연재도 느꼈을 것이다. 민주도 어렴풋이 예상하고 있었다. 그 말을 듣고서도 콜리를 모르는 척할 수 없을 연재를, 그리고 끝내 자신이 가진 전 재산을 내놓으며 콜리를 사겠다고 말하리라는 것을. - <천 개의 파랑>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496644 - P68

모친은 인생의 2막이란 원래 아무도 모르게 찾아오는 것이라고 말했지만 보경이 보기에는 시대의 흐름에 탑승하지 못한 예견된 추락일 뿐이었다. 길거리에 어느 순간 모습을 드러낸 휴머노이드를 보고도 자신과는 엮이지 않을 거라는 안일한 생각이 도태의 씨앗이 된 게 분명했다. 물론 보경에게는 해당 사항 없는 말이었다. 아무리 휴머노이드가 만능이라고 하더라도 고철이 연기하는 드라마는 아무도 보고 싶어 하지 않을테니 말이다. 하지만 그 시대의 역풍과는 전혀 다른 바람이 불어와 보경을 낭떠러지로 밀었다. - <천 개의 파랑>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496644 - P73

결혼 4년 차에 첫째 딸 은혜가 생겼고, 그 후 2년 뒤에 둘째 딸 연재가 생겼다. 은혜는 일곱 살이 되던 해 척수에 폴리오바이러스가 침범하며 수족 마비 증상이 일어났고 끈질긴 치료에도 불구하고 결국 척수성소아마비로 두 다리를 쓸 수 없게 됐다. 의사는 은혜가 만 16세가 되면 인간의 뼈대와 관절을 그대로 재현하는 생체 적합성 소재로 새 다리를 만들어주면 된다고 간단하게 말했다. 비용에 관한 이야기는 일절 없었으므로 보경은 푼돈으로 누구나 받을 수 있는 수술인 줄만 알았다. - <천 개의 파랑>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496644 - P80

보경은 한 번도 찾아가보지 않았던 점집에 찾아가 부적도 하나 만들었다. 소방관의 베개 밑에 두면 불운을 쫓을 거라는 부적이었다. 미신은 믿지 않으며 살아왔지만 함께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평온함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더불어 보경은 내내 그 3%가 불안했다. 3%의 수치가 이토록 멀쩡히 살 수 있었던 보경의 삶을 포기하라고 했던 것처럼 언젠가 소방관에게도 그런 3%가 올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었다. - <천 개의 파랑>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496644 - P80

은혜에게 첫 휠체어를 사주던 날, 소방관은 연재에게 똑같이 세발자전거를 사줬다. 둘은 소방관에게 안전교육을 1시간 이상 들었으며 그날 한강 공원에서 멈추지 않는 질주를 했다. - <천 개의 파랑>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496644 - P80

소방관이 놓지 않았던 보경의 3%에는 실로 많은 것들이 담겨 있었다. 보경은 언젠가, 한강 노을을 바라보며 바퀴를 열심히 굴리는 아이들이 멈추지 않고 달렸으면 좋겠다고 소방관에게 말했다. 삶이 이따금씩 의사도 묻지 않고 제멋대로 방향을 틀어버린다고 할지라도, 그래서 벽에 부딪혀 심한 상처가 난다고 하더라도 다시 일어나 방향을 잡으면 그만인 일이라고. 우리에게 희망이 1%라도 있는 한 그것은 충분히 판을 뒤집을 수 있는 에너지가 될 것이라고. - <천 개의 파랑>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496644 - P82

모친의 요리 솜씨로 시작됐던 인생은 긴 레일을 돌고 돌아 다시 모친의 요리로 돌아왔다. 보경은 과천 경마장이 다시 살아난다는 부동산 업자의 말을 듣고 일찍이 그 근방의 망해가던 식당을 인수했다. 큰돈 들이지 않고 가게를 새 단장하고는 뒤편에 주택을 지어 그곳에 터를 잡았다. 요리는 연구하지 않아도 혀가 시키는 대로 따라가면 금세 모친이 내던 맛이 났다. TV에 소개되어 명성을 얻을 만한 유명한 집은 되지 못했지만 아는 사람들은 찾아오는, ‘닭요리 전문점’의 주인이 되었다. - <천 개의 파랑>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496644 - P85

사람은 이따금씩 강렬하게 무언가에 끌렸다. 그게 사람일 수도, 사랑일 수도, 음악일 수도, 물건일 수도 있었다. 그 강렬한 끌림 앞에서는 무엇도 걸림돌이 될 수 없다. 마지막 월급을 전부 꼬라박을 정도의 강렬한 끌림을, 어제 연재는 다 망가진 콜리를 보고 느꼈으리라. - <천 개의 파랑>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496644 - P92

세상이 조금만 더 자신을 남들처럼만 대해준다면 은혜는 사이보그 따위 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다. 몇천만 원을 웃도는 기계 다리 부착 수술보다 더 필요했던 건 인도에 오를 수 있는 완만한 경사로와 가게로 들어갈 수 있는 리프트, 횡단보도의 여유로운 보행자 신호, 버스와 지하철을 누구의 도움 없이도 탈 수 있는 안전함이었다. 휠체어를 끌어주는 휴머노이드나 사이보그 다리가 아니라. 하지만 그렇게 되려면 지구가 너무 많이 바뀌어야 했다. 다수의 입장에서는 한 사람에게 모든 것을 전가하면 그만인 일이었으니까. 은혜는 사람들이 전가한 ‘한 사람의 몫’을 아직 책임질 수 없는 사람이다. 한 사람이 아니라 반쪽짜리 사람이랄까. 보호자를 동반하지 않고서는 혼자 다니기 위험한 영유아처럼 은혜에게도 반쪽의 몫을 보충해줄 보호자가 늘 필요했다. 하지만 이마저도 은혜의 판단이 아닌 은혜를 지켜보는 타인의 판단이었다. - <천 개의 파랑>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496644 - P96

거리가 꽤 멀었지만 은혜는 이팝나무 사이로 반짝이는 경기장 내부를 볼 수 있었다. 잔디가 깔린 주로를 내달리는 출전마들이 보였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색이 다른 복면을 쓰고 눈가리개를 찬 말들이 오롯이 앞만 보고 힘차게 내달리는 모습을 봤다. 그때 말을 몰고 가는 기수가 휴머노이드라는 사실은 은혜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오로지 말만 보였을 뿐이었다. 말의 매력에 사로잡힌 날이었다. 1초가 100프레임처럼 펼쳐졌다. 말이 달릴 때 요동치던 갈기와 꿈틀거리던 근육, 바람에 흩날리던 이팝나무의 백색 꽃잎, 말을 향해 내던지던 사람들의 함성. 그 모든 것이 인상파의 그림처럼 강렬하게 자리 잡았다. 은혜는 그날 이후로 눈만 감으면 주로 위의 말을 꿈꿨다. - <천 개의 파랑>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496644 - P98

스물한 명이 한 반인 교실에서도 아이들 사이에서의 급이 있었는데 지수로 치자면 영어유치원을 다녔고, 한국에서 중학교를 나오는 대신 캐나다인가 호주인가에서 3년을 살다 돌아온 A급이었고 그에 반해 연재는… 딱히 설명을 말자. - <천 개의 파랑>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496644 - P110

연재는 타인의 삶이 자신의 삶과 다르다는 걸 깨달아가는 것이, 그리고 그 상황을 수긍하고 몸을 맞추는 것이 성장이라고 믿었다. 때때로 타인의 삶을 인정하는 과정은 폭력적이었다. - <천 개의 파랑>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496644 - P112

세상에는 끊임없이 새로운 물건들이 각기 다른 몸값을 지니고 나왔다. 연재는 그것이 정말로 필요해서 생긴 것인지 생김으로써 필요해진 것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하지만 세상은 연재와는 상관없이 빠른 속도로 많은 것을 탄생시켰다. 그제야 삶의 격차가 어느 틈을 비집고 생겼는지 이해되기 시작했다. 그건 연재의 균열이라기보다 부모님, 그리고 그 부모님보다 더 먼 부모님의 삶 어디에선가부터 천천히 시작된 균열일 것이다. 연재가 스스로 절대 여밀 수 없는 크기로 말이다. - <천 개의 파랑>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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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수도 딱히 어울리는 친구가 없다는 건 그때 깨달았다. 빵을 입에 물고, 연재는 홀로 자리에 남아 급식실에 가지 않는 지수의 뒷모습을 봤다. 허리와 목을 꼿꼿하게도 펴 앉았구나. 근데 외로워 보인다.

그렇지만 자신이 신경 쓸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고, 연재는 7교시를 마치자마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밖으로 내달렸다. 달리기라면 내로라할 자가 없지 않았던가. 하지만 인간의 원초적인 힘은 결국 문명 앞에서 무릎을 꿇고 말았다. 지수가 전동킥보드를 타고 유유히 옆에 섰을 때 연재는 하마터면 불공평한 세상에 침을 뱉을 뻔했다. - <천 개의 파랑>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496644 - P114

"너 근데 달리기 더럽게 빠르더라."
지수가 말했고 연재가 한 귀로 흘려보냈다.
"너 그렇게 안 보이는데 공부 빼고 잘하는 거 되게 많구나."
"…욕 같은데."
"욕 맞아. 요즘 세상에 공부만 잘해도 모자랄 판에 공부 빼고 다른 거 다 잘해서 뭐 먹고 살 건데?"
사실이라 반박할 말이 없었다. - <천 개의 파랑>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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