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라는 말은 한번도 생각한 적이 없었지만 밀림에서 자신의 자유를 마음껏 누렸다. 그사이 차츰 밀림의 세계에 눈을 뜬 그는 주인 없는 푸른 세계에 매료되어 마음속에 간직해 오던 증오심을 잊었다.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3031530 - P82
다시 세월이 흘러가고 있었다. 난가리트사 강을 바라보면 세상의 모든 시간이 아마존 유역 어딘가로 달아나 버린 것 같은 고즈넉한 느낌이 들었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하늘을 나는 새들은 무지막지한 문명이 서쪽으로부터 아마존의 거대한 몸집을 파헤치며 그들 가까이로 다가서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거대하고 육중한 기계들이 길을 낼 때마다 수아르 족은 그만큼 바쁘게 움직여야 했다. 그들은 이미 한곳에서 3년 동안 머물던 관습을 지키지 못하고 있었다. 3년이란 기간은 자연이 다시 회복할 수 있는 최소한의 시간적 여유였지만 달리 방도가 없었다. 그들은 오두막을 철거하고 죽은 영혼들의 유골을 챙겨 여전히 처녀림을 간직하고 있는 은밀한 지역을 찾아서 동쪽으로 이동했다.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3031530 - P98
난가리트사 강 유역으로 이주민들이 불어나고 있었다. 그들은 이주 정책 초기와 달리 목축지와 임업지를 불하한다는 정부의 약속을 믿고 온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그들 중에는 일정한 목표도 없이 오로지 일확천금을 노리고 찾아 든 노다지꾼이나 술을 들여와 의지가 약한 이주민들을 타락시키는 사람들도 많았다.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3031530 - P99
수아르 족은 아니었지만 그들과 생활했기에 수아르 족이나 다름없던 안토니오 호세 볼리바르 프로아뇨는 그렇게 해서 마침내 그곳을 떠나게 되었다. 그들은 만일 그가 백인인 노다지꾼에게 용감하게 싸울 수 있는 기회를 준 다음 독화살로 끝장냈더라면 죽은 백인의 얼굴에 그 용기가 남아 누시뇨가 평온하게 눈을 감을 수 있었지만 총을 맞았기에 백인의 얼굴이 놀라움과 고통에 일그러져 저 세상으로 떠날 수 없다고 생각했고, 그로 인해 누시뇨의 영혼은 눈이 먼 앵무새로 날아다니다 나뭇가지에 부딪히거나 잠이 든 보아뱀의 꿈자리를 사납게 만들어서 그들의 사냥을 방해할 것으로 믿고 있었다. 결국 그는 자신과 수아르 족의 명예를 더럽혔을 뿐만 아니라 그로 인해 친구 누시뇨에게 영원한 불행을 가져다주고 말았던 것이다.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3031530 - P106
밀림은 새로이 정착한 이주민이나 금을 찾는 노다지꾼들 때문에 심한 몸살을 앓고 있었다. 그로 인해 사나워지는 것은 짐승들이었다. 조그만 평지를 얻고자 무차별하게 벌목을 해대는 바람에 보금자리를 잃은 매가 노새를 물어뜯고 번식기에 접어든 멧돼지가 사나운 맹수로 돌변하기도 했다.
코카의 원전 회사에서 근무하는 양키들까지 짐승들을 괴롭히는 것에 한몫 거들었다. 그들은 마치 큰 전투라도 치를 듯한 화기로 무장한 채 떠들썩하게 나타나서 눈앞에 보이는 것은 가차 없이 갈겨 댔다. 특히 살쾡이 사냥을 나설 때면 어미건 새끼건 가릴 것 없이 사살 ─ 무려 열 마리 이상을 죽인 적도 있었다 ─ 한 뒤에 그 가죽을 벗겨 말뚝에 걸어 놓고 사진기 앞에서 포즈를 취하기도 했다. 그들이 떠나고 나면 짐승의 가죽은 누군가 그것을 강으로 던지기 전까지 그대로 썩어 갔고, 그사이 살아남은 살쾡이들은 마치 보복이나 하듯 황소들의 내장을 드러내고 있었다.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3031530 - P109
나는 글을 읽을 줄 알아.
그것은 그의 평생에서 가장 중요한 발견이었다. 그는 글을 읽을 줄 알았다. 그는 늙음이라는 무서운 독에 대항하는 해독제를 지니고 있었다. 그는 읽을 줄 알았다. 하지만 읽을 것이 없었다.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3031530 - P114
신부의 무릎으로 떨어진 책은 성 프란체스코의 전기였다. 그는 마치 어설픈 좀도둑이 된 기분을 느끼면서 슬쩍 페이지를 훔쳐보았다. 그는 한 음절 한 음절, 한 단어 한 단어를 조합하며 책장을 들여다보다 그 뜻을 완전히 이해하고 싶다는 기분에 빠져 들었고, 나중에는 자신도 모르게 그것을 소리 내어 또박또박 읽고 있었다.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3031530 - P116
안토니오 호세 볼리바르는 책 한 권 갖지 못한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며 우기를 보냈다. 그는 생애 처음으로 자신이 고독이라는 짐승에게 잡혀 있음을 절감했다. 그것은 조금이라도 방심하면 쓸쓸한 강당에 찾아와서 하고 싶은 말을 몽땅 내뱉은 뒤에 유유히 사라지는 교활하기 이를 데 없는 짐승 같았다.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3031530 - P121
그는 기하학 책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지만 나름대로 과연 그 책이 머리를 싸매고 들여다볼 만한 책인지 진지하게 고민했다. 그는 그 책 속에서 아주 긴 문장 하나를 기억했는데, 그것은 〈직각삼각형에서 빗변은 직각의 맞은편에 있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이따금 기분이 좋지 않을 때 혼자 중얼거리게 되는 말이자 나중에는 엘 이딜리오 주민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드는 말이 되었다. 그들에게는 기이한 욕설이나 주문처럼 들렸던 것이다. 역사에 관한 책은 마치 거짓말을 꾸며 놓은 것 같았다.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3031530 - P130
그는 기하학 책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지만 나름대로 과연 그 책이 머리를 싸매고 들여다볼 만한 책인지 진지하게 고민했다. 그는 그 책 속에서 아주 긴 문장 하나를 기억했는데, 그것은 〈직각삼각형에서 빗변은 직각의 맞은편에 있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이따금 기분이 좋지 않을 때 혼자 중얼거리게 되는 말이자 나중에는 엘 이딜리오 주민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드는 말이 되었다. 그들에게는 기이한 욕설이나 주문처럼 들렸던 것이다. 역사에 관한 책은 마치 거짓말을 꾸며 놓은 것 같았다. 팔꿈치까지 올라가는 긴 장갑과 곡예사처럼 착 달라붙은 바지 차림에 잘 말려 올린 머리칼이 바람에 나부끼는 그런 연약한 인물들이 전쟁에서 승리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아무리 이해하려 해도 그런 자들은 파리 한 마리도 죽일 수 없는 존재처럼 여겨졌다. 그리하여 역사 이야기도 그가 좋아하는 책에서 제외되었다.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3031530 - P131
노인은 잠이 없는 편이었다. 다섯 시간의 수면과 두 시간 정도의 낮잠 외에 나머지 시간은 주로 소설을 읽고 그 이야기에 등장하는 사랑의 신비를 찾거나 무대가 되는 곳을 상상하며 보냈는데, 파리니 런던이니 제네바니 하는 지명이 나오면 그 도시들을 상상하기 위해 온 정신을 집중해야 했다.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3031530 - P134
노인은 〈낮에는 인간과 밀림이 별개로 존재하지만, 밤에는 인간이 곧 밀림이다〉는 수아르 족 인디오의 말을 떠올리며 어둠을 응시하고 있었다.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3031530 - P197
그들은 죽음을 죽음 자체의 행위라고 믿었다. 죽음은 참혹한 것이지만 피할 수 없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그들이 말하는 죽음은 이른바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밀림 세계의 냉혹한 원칙에서 나온 죽음이었다. 그때서야 노인은 눈앞의 현실을 되짚어 볼 수 있었다.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3031530 - P231
노인은 그렇게 중얼거렸지만 어느새 깊은 잠에 빠져 들어가고 있었다. 어느덧 그는 기이한 꿈을 꾸었다.
누군가가 강가에 앉아 있었다. 보아뱀의 현란한 색깔로 온몸이 치장된 그 사람은 다름 아닌 그 자신이었다. 그는 강가에 앉은 채 차츰차츰 밀려오는 환각의 세계를 받아들이고 있었다.
무엇인가가 그의 눈앞에 펼쳐진 허공과 숲 사이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깊은 강물 속과 고요한 수면 위로 왔다 갔다 하고 있었다. 그것은 모든 형태이자 동시에 모든 형태가 합쳐진 듯한 그 어떤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환각 상태에 있는 그의 시선이 어느 한 곳에 정지할 수 없을 만큼 쉴 새 없이 뒤바뀌고 있었다. 그것은 잉꼬로 보이는가 싶더니 갑자기 입을 쫙 벌린 채 허공으로 솟아오르면서 달을 삼키는 금강앵무새메기로 바뀌었고, 금강앵무새메기로 보이는가 싶더니 갑자기 물 위로 떨어지면서 인간을 향해 사납게 달려드는 수염수리매로 바뀌고 있었다. 그것은 딱히 뭐라고 규정할 수 없는 것이었지만 어떤 것으로 변하든 두 눈동자만큼은 노란빛을 띠며 반짝이고 있었다. 그때 모습을 드러낸 수아르 족 주술사가 기력이 떨어진 그의 몸에 차가운 재를 바르며 입을 열었다.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3031530 - P264
안토니오 호세 볼리바르 프로아뇨는 틀니를 꺼내 손수건으로 감쌌다. 그는 그 비극을 시작하게 만든 백인에게, 읍장에게, 금을 찾는 노다지꾼들에게, 아니 아마존의 처녀성을 유린하는 모든 이들에게 저주를 퍼부으며 낫칼로 쳐낸 긴 나뭇가지에 몸을 의지한 채 엘 이딜리오를 향해, 이따금 인간들의 야만성을 잊게 해주는, 세상의 아름다운 언어로 사랑을 얘기하는, 연애 소설이 있는 그의 오두막을 향해 걸음을 떼기 시작했다.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3031530 - P274
일순 노란빛을 띤 두 눈동자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사방으로 흩어지던 노란빛을 띤 두 눈동자가 차츰 멀어지며 긴 초록색 지평선으로 빨려 들어가자, 어디선가 다시 나타난 새들이 안락함과 충만함이 깃든 메시지를 전하며 허공을 날아다녔다. 하지만 그 순간도 잠시, 노란빛을 띤 두 눈동자가 먹구름 밑에서 다시 나타나는가 싶더니 이글이글 타오르는 비가 되어 온갖 나뭇가지와 칡넝쿨로 뒤얽힌 밀림 위에 떨어졌고, 동시에 밀림을 활활 타오르는 불바다로 만들고 있었다. 그는 노란 혀를 날름거리는 화마를 보는 순간 두려움과 공포에 떨었다. 악을 쓰고 싶었다. 하지만 설치류들이 그의 혀를 물어뜯었다. 도망치고 싶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날아다니는 실뱀들이 그의 다리를 휘감았다. 그는 자신의 오두막으로 가고 싶었다. 벽에 걸린 그림 속으로 들어가 돌로레스 엔카르나시온 델 산티시모 사크라멘토 에스투피냔 오타발로 곁에 머물고 싶었다. 화마에 휩싸인 그곳을 벗어나고 싶었다. 그렇지만 그가 가는 곳마다 나타난 노란빛을 띤 두 눈동자가 길을 막았다. 노란빛을 띤 두 눈동자는 그가 누워 있는 카누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카누가 흔들리고 있다는 느낌이 든 것은 그 순간이었다. 아니 실제로 흔들리고 있었다. 순간 노인은 숨을 죽였다.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3031530 - P266
노인은 상처 입은 수컷에게 다가가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수컷은 눈꺼풀조차 들어 올릴 힘도 없는지 인간의 손길에 자신을 내맡기고 있었다. 고통스런 짐승의 최후를 반기는 것은 늘 그렇듯 흰개미들이었다. 노인은 수컷의 가슴팍을 향해 총구를 겨누었다. 그리고 방아쇠를 당기며 중얼거렸다.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3031530 - P260
생각보다 훨씬 큰 몸집을 지닌 짐승의 자태는 굶어서 야위긴 했지만 너무나 아름다워 도저히 인간의 상상으로는 만들어질 수 없는 존재처럼 보였다. 죽은 짐승의 털을 어루만지던 노인은 자신이 입은 상처의 고통을 잊은 채 명예롭지 못한 그 싸움에서 어느 쪽도 승리자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 부끄러움의 눈물을 흘렸다.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3031530 - P273
루이스 세풀베다는 1949년 칠레의 북부 오바예에서 출생했다. 그는 피노체트 군사 정권하에서 반독재 반체제 운동에 주도적으로 활동하다 수감되었으나 국제 사면 위원회의 도움으로 석방된 후 망명길에 올랐고, 주변국인 페루, 에콰도르, 콜롬비아에서 연극 단체를 이끌며 유네스코 기자로 활동하다 1980년부터 독일에 정착했다. 지금은 스페인에 거주하고 있다.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3031530 - P277
그는 소설의 문체나 구조보다는 변덕스럽다고 느껴질 정도로 장르의 변화에 역점을 두는데, 실제로 그가 모색한 소설 장르의 실험은 짧은 기간에 여러 작품에서 다양하게 드러난다. 리얼리즘에 마술주의적 요소를 가미한 『연애 소설 읽는 노인』(1989), 최초의 환경 소설로 평가받는 『지구 끝의 사람들』(1994), 역시 환경 소설이라고 할 수 있는 동화 『어린 갈매기에게 나는 법을 가르쳐 준 고양이』(1996), 자전적 여행 소설 『파타고니아 특급 열차』(1995), 본격적인 흑색 소설에 추리 기법을 담고 있는 『귀향』(1994), 「감상적 킬러의 고백」(1996), 「악어」(1997)가 좋은 예라고 할 것이다.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3031530 - P2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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