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에는 당나귀 배처럼 불룩한 먹장구름이 무겁게 드리워 있고, 밀림을 휩싸고 도는 끈끈하고 칙칙한 공기가 금방이라도 들이닥칠 폭풍우를 예고하고 있었다. 이미 우기에 접어든 날씨였다. 사위가 잔뜩 흐린 가운데 어디선가 불어 닥친 사나운 바람이 읍사무소 앞을 장식한 바나나나무를 흔들어 대며 땅에 떨어진 잎사귀들을 휩쓸어 갔다.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3031530 - P13
그들은 하나같이 추기경이 걸치는 가운 모양의 보드라운 보랏빛 융단 위에 가지런히 정렬된 틀니를 끼워 보고 싶어 안달이었다.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3031530 - P17
그러나 환자들 틈에서 절대자나 다름없는 치과 의사의 욕지거리를 들으면서도 재미있다는 듯이 키득키득 웃는 이들이 있었다. 그들은 진종일 진료소 주위에 앉아 있던 히바로 족 ─ 스페인 정복자들이 야만인이라는 뜻으로 붙여 준 별칭을 별다른 저항 없이 받아들인 인디오 ─ 원주민들로 북미의 아파치들처럼 백인들의 관습에 물들고 타락했다고 해서 같은 원주민인 수아르 족에 의해 쫓겨난 자들이었다. 수아르 족과 히바로 족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었다. 비밀스런 아마존 유역에 대해 정통한 수아르 족이 콧대가 세고 자부심이 강하다면, 백인들의 누더기 옷을 걸친 떠돌이 히바로 족은 술이나 한잔 얻어먹을까 하고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는 부류였다.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3031530 - P21
노인은 조심스럽게 틀니를 끼우고 혀를 끌끌 차더니 침을 뱉으며 아구아르디엔테가 가득 담긴 술병을 내밀었다.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3031530 - P26
뚱보의 전횡이 심해질수록 주민들은 전임 읍장을 그리워했다. 실제로 뚱보에 비하면 전임 읍장은 주민들의 전폭적인 지지와 신임을 받았다. 그는 밀림에선 누구에게나 살아가는 방식이 있고, 그렇게 살아가도록 내버려 두는 게 최선책이라고 믿는 사람이었다. 따지고 보면 엘 이딜리오에 배가 들어오고 우편집배원과 치과 의사가 정기적으로 들르게 된 것도 그의 덕분이었다. 하지만 그의 임기는 오래가지 못했다. 어느 날 노다지꾼들과 말다툼을 벌인 그가 이틀 후에 시체 ─ 밀림용 낫칼에 두개골이 열린 그 몸뚱이의 절반은 이미 개미들이 갉아먹어 형체조차 없었다 ─ 로 발견되었다.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3031530 - P38
젠장! 이 모든 게 저 불쌍한 양키 자식 때문에 생긴 일이란 말입니다. 아시겠소? 이 가죽들을 잘 보시오. 손바닥만도 못 되는 걸 벗겨서 뭘 어쩌자는 건지! 우기가 들이닥치는데 사냥을 나서다니 그게 어디 말이나 될 짓이오? 어린 짐승의 가죽에 뚫린 총구멍을 보시오. 당신은 수아르 족을 의심했지만 정작 욕을 얻어먹을 놈은 그들이 아니라 여기 뒈져 있는 양키 놈이오. 이 빌어먹을 백인은 사냥이 금지된 기간에 사냥을 나섰고, 사냥이 금지된 짐승까지 총으로 쏴 죽였단 말이오. 게다가 나는 수아르 족이 무기를 사용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소.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3031530 - P53
「안토니오 호세 볼리바르, 나는 왜 여태까지 당신이 멋진 탐정이라는 생각을 못했지? 아무튼 영감은 오늘 위대한 뚱보 각하를 벙어리로 만들었소. 뚱보 자식은 그 많은 사람들 앞에서 무안을 당했으니 당분간은 민망해서 고개도 들지 못할 거요. 사실 난 진작부터 히바로 족이 그 자식 배에 창이라도 꽂아 주길 은근히 기대하고 있었소.」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3031530 - P58
루비쿤도 로아차민은 노인이 책을 가져다 달라고 부탁하자 처음에는 그저 아무거나 가져다주면 되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사랑하는 사람들이 만나서 고통과 불행을 겪다가 결국은 행복하게 되는 내용을 원한다는 노인의 독서 취향을 듣게 되자 난감한 기분이 들었다. 과야킬에 있는 서점에 들러 〈연인들이 사랑으로 인해 고통을 겪지만 결국은 해피 엔드로 끝나는 소설책을 주시오〉라고 말하는 자신의 모습이 우스꽝스럽게 여겨졌던 것이다.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은 보나마나 그를 주책없는 노인네라고 비웃을 게 틀림없었다.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3031530 - P60
흑인 여자는 그 이유를 묻는 치과 의사의 질문에 안토니오 호세 볼리바르와 똑같은 식으로 대답했다. 그리하여 그날 이후로 호세피나는 치과 의사의 침실 파트너와 문학 비평가라는 두 가지 역할을 번갈아 가며 담당했고, 6개월마다 한 번씩 나름대로 눈물 없이 볼 수 없다고 생각되는 두 권의 연애 소설을 골랐다.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3031530 - P61
안토니오 호세 볼리바르 프로아뇨는 글을 읽을 줄은 알아도 쓸 줄은 몰랐다. 그가 쓸 줄 아는 글자라고는 그의 이름이 전부였다. 하지만 선거철에 선거인 명부 같은 공문서에 기입하는 서명 외에 사용할 기회가 없다 보니, 글을 쓴다라기보다는 그림을 그린다는 표현이 더 어울렸고 이제는 그 글 쓰는 방법조차 거의 잊고 있었다.
노인은 천천히, 아주 천천히 책을 읽었다. 그의 독서 방식은 간단치 않았다. 먼저 그는 한 음절 한 음절을 음식 맛보듯 음미한 뒤에 그것들을 모아서 자연스러운 목소리로 읽었다. 그리고 그런 식으로 단어가 만들어지면 그것을 반복해서 읽었고, 역시 그런 식으로 문장이 만들어지면 그것을 반복해서 읽고 또 읽었다. 이렇듯 그는 반복과 반복을 통해서 그 글에 형상화된 생각과 감정을 자기 것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음절과 단어와 문장을 차례대로 반복하는 노인의 책 읽기 방식은 특히 자신의 마음에 드는 구절이나 장면이 나올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도대체 인간의 언어가 어떻게 해서 그렇게 아름다울 수 있는가를 깨달을 때까지, 마침내 그 구절의 필요성이 스스로 존중될 때까지 읽고 또 읽었다. 그러기에 그에게 책을 읽을 때 사용하는 돋보기가 틀니 다음으로 아끼는 물건이 되는 것은 너무나 당연했다.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3031530 - P68
그중에서 눈에 띄는 것은 기이하게 느껴질 정도로 다리가 긴 탁자였다. 그것은 그가 난생 처음으로 등에 통증을 느끼던 순간에 어찌할 수 없는 세월의 무게를 절감하고서 가능한 한 의자에 앉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하며 만든 식탁이자 책상이었다. 그는 강가로 난 창문을 통해 푸른 강물을 쳐다보며 그 탁자 위에 음식을 차려 선 채로 먹거나 연애 소설을 읽었다.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3031530 - P69
그 그림은 산간 지방 출신의 어떤 화가가 그린 젊은 남녀의 인물화였다. 그 속에 있는 남자는 안토니오 호세 볼리바르 프로아뇨였다. 그는 오로지 초상화가의 상상 속에서만 존재했던 하얀 와이셔츠와 넥타이를 맨 정장 차림이었다. 반면에 그의 여자인 돌로레스 엔카르나시온 델 산티시모 사크라멘토 에스투피냔 오타발로는 그 당시에 존재했고, 지금도 뇌리에 둥지를 튼 고독의 등에처럼 노인의 기억 속의 한 귀퉁이에 여전히 존재하는 의상과 장신구 차림으로 묘사되어 있었다. 그녀의 얼굴은 머리에 두른 청색 벨벳 수건과 두 갈래로 나누어 길게 늘어뜨린 뒤에 식물성 기름을 발라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검은 머리칼 그리고 귀에 달린 원형의 귀걸이며 목에 두른 여러 개의 띠 모양의 목걸이와 나름대로 조화를 이루면서 자못 위엄 있게 보였다. 또한 그녀의 조그맣고 붉은 입술은 오타발로 지방풍의 화려한 색실로 자수가 놓인 가슴을 강조하는 블라우스 위에서 살짝 미소 짓고 있었다.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3031530 - P71
두 사람 앞에 일단의 무리들이 나타난 것은 모든 것을 운명에 내맡기고 마지막 순간을 기다리던 참이었다. 반쯤 벌거벗은 몸에 얼굴과 머리와 팔을 여러 가지 과즙으로 색칠한 그들은 그곳의 원주민인 수아르 족 인디오들이었다. 두 사람을 보다 못한 인디오들이 동정심을 느낀 나머지 구원의 손길을 뻗쳤던 것이다.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3031530 - P79
그때부터 두 사람은 사냥하는 법, 물고기를 잡는 법, 폭우에 견딜 수 있는 튼튼한 오두막을 짓는 법, 먹을 수 있는 과일을 고르는 법을 배웠다.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밀림의 세계에서 자연과 더불어 사는 기술을 터득한 일이었다.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3031530 - P79
돌로레스 엔카르나시온 델 산티시모 사크라멘토 에스투피냔 오타발로는 두 번째 해를 넘기지 못했다. 그녀는 말라리아에 걸려 뼈를 태울 듯한 고열로 신음하다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 순간 안토니오 호세 볼리바르 프로아뇨는 자신이 고향에 돌아갈 수 없음을 알았다. 가난한 사람들은 모든 것을 용서해도 실패만큼은 용서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그곳에 남아서 사라진 기억들을 보듬고 살아야 한다고 결심했다. 저주받은 땅을 증오한 그는 그의 사랑과 꿈을 빼앗아 간 푸른 지옥의 세계에 복수하고 싶었다. 눈을 감으면 아마존 밀림이 거대한 불길에 휩싸이다 잿더미로 변하는 꿈을 꾸었다. 그러나 그가 밀림을 증오한 만큼이나 밀림을 모르고 있다는 자신의 무력함을 깨닫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3031530 - P81
안토니오 호세 볼리바르 프로아뇨는 밀림에서 5년을 지내고 나자 그곳을 떠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것은 어느 날 예기치 않은 두 개의 이빨이 전해 준 메시지가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3031530 - P85
그들은 축제가 끝나자 나테마를 권했다. 그가 생전 처음 마신 달콤한 그 액체는 야우아스카나무 뿌리를 삶아서 만든 일종의 환각제였다. 이내 의식이 몽롱해진 그는 그 상태에서 끊임없이 변하는 세계로부터 떼려야 뗄 수 없는 부분이 되어 있는, 저 무한한 녹색 밀림 세계의 일원이 되어 있는, 마치 수아르 족처럼 생각하고 느끼고 있는 자신을 보았다. 그는 수많은 장신구와 사냥 도구를 몸에 걸친 노련한 사냥꾼이 되어 형체도 크기도 없는, 냄새도 소리도 없는, 오로지 두 개의 노란 눈이 번득이는, 뭐라고 설명할 수 없는 어떤 동물의 발자국을 뒤쫓고 있었다. 결국 X뱀 사건은 그를 밀림의 세계에 머물게 만든 해독할 수 없는 암시가 되었던 것이다.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3031530 - P9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