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8월 4일의 봉건제도 폐기 선언은 하나의 큰 사회혁명이었다. 이는 농노제, 영주적 특권과 독점권, 신분별 불평등 과세, 10분의 1세, 관직 매매제, 길드 제도 등 신분과 지방과 도시의 모든 특권을 폐지하고 무료 재판제, 법 앞에서의 만민평등의 원칙을 제정했으며, 낡은 앙시앵레짐의 파괴이자 새 프랑스의 출발이었다. - P184
이것이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이었다. 흔히 〈인권선언〉이라고 부르는 이 선언은 봉건제도의 폐기를 규정한 직후 의회가 8월 12일부터 토론하기 시작하여 26일에 채택하였다. - P185
인권선언을 부르주아지의 산물이라고 비난하기도 한다. 소유권의 신성불가침은 말하면서 소유가 없는 자에 대해서는 말이 없고, 결사의 자유를 위험시하여 그 자유를 아주 묵살하였고, 발언의 자유를 법률로 제한할 수 있게 만들었다는 것 등이 비난의 이유이다. - P194
인권선언은 인류 역사가 시작된 이래 최초로 민중이 역사의 주인임을 선언한 문서이다. 민중의 첫 승리를 축하하는 기념탑이다. - P195
자코뱅은 선서 성직자를 지지했을 뿐만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가톨릭교회 자체를 공격하고 국가와 교회의 분리를 주장하여, 종교 헌장이 제정한 국가에 의한 교회 예산의 폐지를 강조하였다. 자코뱅의 이 주장은 앞으로 반교권론이라는 형태로 19세기를 통하여 내내 중요한 정치 문제로 등장하게 된다. 반교권론은 국가를 종교와의 관계에서 완전히 끊어버리자는 주장이다. - P213
당시 의회 밖에서 의회에 영향을 미치는 가장 유력한 정치 집단은 ‘헌법의 벗Amis de la constitution’과 ‘1789년 협회’ 및 ‘입헌 왕정 클럽’의 셋이었다. - P217
특히 각종 권력의 남용과 온갖 종류의 인권침해를 세론의 법정에 고발하는 것이 창립 목적이라고 언명한 혁명파의 코르들리에Cordeliers 클럽이 여론 형성에 미친 영향은 매우 컸다. 그 주요한 발언자들은 마라Jean Paul Marat, 당통Georges Jacques Danton, 데물랭Camille Desmoulins, 에베르Jacques René Hébert, 모모로Antoine François Momoro, 데글랑팅Fabre d’Eglantine 등인데, 이들은 1793년에 이르면 혁명의 주역이 되는 사람들이다. - P225
권력은 푀양 클럽의 수중으로 옮겨졌다. 의회를 좌우하는 힘은 이른바 삼두파−라메트, 바르나브, 뒤포르Adrien Jean Francois Duport−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 P236
역사가들 가운데는 왕정 몰락의 근본 원인을 왕의 도망 사건과 샹 드 마르스 학살 사건에서 찾는 사람도 있다. - P236
이리하여 바렌 사건과 샹 드 마르스 사건에다 헌법의 반민주성이라는 요인이 하나 더 덧붙어 민중의 불만은 더욱 커져갔다. - P239
1789년 5월 초 특권 신분이 자신들의 특권을 보유하면서 재정 위기를 해결해 보려는 간교한 생각에서 소집되었던 삼부회가 근대적 국민 대표 기관으로서의 국민의회로 발전하여 헌법 제정의 의무를 스스로 짐으로써 제헌의회의 기능을 완수하였다. - P241
이 의회가 드디어 만들어낸 근대 프랑스 헌법의 정식 명칭은 ‘프랑스 헌법, 1791년 9월 3일 국민의회령Décret de l’assemblée nationale du trois Septembre, 1791: La Constitution Française’이다. 이 헌법은 인권선언을 맨 앞에 싣고 봉건제도 폐기의 성과들을 나열한 전문 17조와 본문 7장 201조로 되어 있다. - P242
1791년 헌법에 의한 프랑스 왕국은 겉보기로는 왕국이 틀림없었으나 알맹이는 공화국이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1791년 헌법은 삼권분립의 원칙에 따른 것 같으나 실은 의회 만능이라는 권력 구조로 무장된 헌법이었다. - P251
그러나 코뮌은 강력한 자치정부municipalité를 가지고 있었다. 코뮌 정부는 임기 2년의 코뮌 평의회와 그 의장 및 동장maire으로 구성되었는데, 이들은 모두 주민의 직접선거로 선출되었기 때문에 어느 기관보다도 가장 민주적이었다. 더구나 코뮌 평의회는 국민 방위대와 무장군의 동원 요구권이 있었고 누구에 의해서도 해산되지 않았다. 앞으로 혁명이 과격화하여 정치적 위기가 커지면 이 행정상의 지방분권은 국민적 통일에 위협이 되는 한편 파리와 같은 대도시에서는 코뮌의 민주적 자치 기구가 혁명의 과격화를 더욱 촉진시키게 될 것이다. - P253
1791년 헌법은 근대 시민국가 헌법으로서는 미국 헌법과 함께 세계에서 가장 일찍 제정된 모범적인 헌법이다. 그러나 미국 헌법은 제정된 후 200년이 넘도록 아직까지 한 번도 폐기된 일이 없는데 프랑스의 1791년 헌법은 1년 만에 폐기되고 말았다. 입헌군주국가의 기도가 1년 만에 실패했던 것이다. - P255
헌법 전문의 첫머리를 장식한 인권선언 제1조는 "법률은 공공 의지의 표현이므로 모든 시민은 개인적으로 또는 대표자에 의하여 입법에 협력할 권리를 갖는다"고 못 박아놓고서, 최소한 3일간의 노동임금에 상당하는 직접세를 납부하지 못하는 국민을 수동 시민이라고 하여 일체의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 P258
제헌 국민의회는 1791년 9월 30일 해산하고 이튿날 10월 1일 입법의회가 성립되었다. 745명의 대의원은 정치적 경험이 없는 30세 미만의 젊은이가 대부분이었다. - P261
프랑스 혁명에 참가한 시민들의 모습. 귀족들이 입는 ‘퀼로트culotte’라는 바지를 입지 ‘않는sans’다고 하여 ‘상퀼로트sans-culotte’라 불렸다. - P282
8월 10일 사건의 주동 세력은 온건한 부르주아가 아니라 파리의 노동자와 빈민과 영세 상인이었다. 이들이 앞으로 혁명을 한결 더 과격하게 만든다. 이들은 귀족이 입는 퀼로트라는 바지를 입지 않는다고 하여 상퀼로트sans−culotte라 불렸는데, 이제 이 상퀼로트가 파리 코뮌의 실권자로 나타났다. - P284
의회와 코뮌의 대립은 합법적인 힘과 혁명적인 힘의 대립이며 부르주아와 민중의 대립이었다. 이 대립은 앞으로 국민공회가 소집되어 왕정을 폐지하고 공화정을 선포하기까지 6주일간 계속된다. - P285
파리 코뮌이란 무엇일까? 그 뜻은 파리 시의회City Council라는 뜻이었다. - P285
새 헌법의 원리는 보통선거의 원리였다. 그런데 이 보통선거의 원리를 입법의회로 하여금 승인케 한 것은 파리 코뮌이었으니, 입법의회는 파리 코뮌의 실력에 종속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 P286
그런데 파리 코뮌의 지도자는 코뮌을 대표하여 임시정부에 입각한 법무장관 당통이었다. 당시 당통은 자코뱅 클럽의 좌파로서 로베스피에르와 단짝이었다. 그리고 코뮌에 신설된 감시 위원회comité de surveillance의 실력자 마라도 한패였다. - P287
9월 학살 후부터 지롱드당이 보수화하여 자코뱅당 좌파에 정면으로 대립하게 되었다. - P294
자코뱅당은 브리소의 지롱드파와 당통, 마라, 로베스피에르의 산악파Montagnards로 분열하기 시작하였다. 이 분열은 왕권의 소멸과 함께 우익의 푀양이 실각함으로써 집권파 내부에서 일어난 권력 싸움이라는 정치적 분열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혁명의 이념과 목표의 차이에서 비롯되는 사회적·계급적 분열이었다. 지롱드파의 혁명 이념이 부르주아의 경제적 자유와 사유권의 절대를 비롯한 시민적 자유에 있었다면, 산악파의 혁명 이념은, 그런 사유권을 자유로이 행사하려고 하여도 소유한 것이 없는 민중에게도 그런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소유를 보장하려는 것이었다. 산악파의 이념은 자유와 함께 그 자유를 누릴 수 있는 물질적·정치적 평등의 실현에 있었다. 두 파의 혁명 이념의 차이는 앞으로 혁명과 전쟁의 진행에 따라 한결 더 명백히 드러나게 되고, 특히 국내외 반혁명을 분쇄하는 현실적 방법론에서 구체적인 형태로 나타나게 되거니와 1792년 9월 국민공회의 선거 과정에서 이미 그 기본적 차이가 드러나게 된다. - P2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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