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 2019 제43회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
김초엽 지음 / 허블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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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은 SF를 처음 공부하면서 재미있다고 생각했던 초광속 항법에 대한 관심이 반영된 글이다. 어떤 물질도 빛보다 빠를 수 없다는 우주적 한계를 뛰어넘기 위해 물리학자들과 작가들은 다양한 방법을 고안해냈다. 보통은 그 기술 중 하나를 채택해서 소설에 쓰곤 하지만, 초광속 항법의 패러다임이 바뀌는 시기에 일어나는 일을 다루어보고 싶었다. 우주 정거장에서 우주선을 기다리는 안나의 이야기는 ‘가짜 버스 정류장’에 대한 기사를 보고 떠올렸다. 독일에 있는 이 정류장은 아무리 기다려도 버스가 오지 않는데, 요양원 노인들이 시설을 나와 길을 잃는 것을 막기 위해 설치되었다고 한다. 해가 저물고 노인들을 데려가는 것은 버스가 아닌 시설 직원이다.
(337-338, 작가의 말)

나는 사람이 물질에 기반을 둔 존재라는 것에 항상 흥미를 느꼈다. 화학을 전공했던 이유 중 상당 부분도 그 때문이었다. 감정의 물질성, 추상적인 것과 구체적인 것의 전환을 자주 생각하곤 한다. 사람들이 어떤 물질을 소유하고 그것으로부터 정서적 욕구를 충족한다면, 어쩌면 감정 그 자체를 소유하고 싶어 할 수도 있지 않을까? 그 질문에서 시작된 글이 「감정의 물성」이다. 나중에는 이 주제로 긴 글도 써보려고 한다.
(338p, 작가의 말)

「스펙트럼」을 쓰던 시기에는 기술로 인해 변형된 인간의 감각에 관심이 많았다. 과학 교과서에는 늘 지식의 발견과 더불어 그 지식을 발견 가능하게 했던 도구, 장치, 실험 설계가 함께 제시된다. 우리가 여러 가지 도구들–망원경과 현미경, 현대 실험실의 주축인 실험장비들–을 통해 어떻게 세계를 탐구하고 확장해왔는지를 생각하면 흥미롭다. 그리고 그렇게 확장된 감각에만 익숙했던 한 과학자가, 인간의 감각만으로는 인지할 수 없는 세계와 타인을 만난다면 어떤 감정을 느낄지가 궁금했다.
(349p, 작가의 말)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는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를 나누어 쓰는 기획 단편선에 참여했던 작품이다. 처음에 별 고민 없이 유토피아를 쓰겠다고 했다가, 유토피아의 모습을 도저히 상상할 수 없어서 고민에 빠졌다. 누군가를 배제하지 않는 기술이라는 것이 가능할까? 이 글을 쓰며 그런 질문을 거듭했다. 여전히 답은 내리지 못했지만, 계속 그 답을 찾아보고 싶다.
(339p, 작가의 말)

「공생 가설」은 가장 즐겁게 썼던 글이다. SF에서 인간이 외계인을 만나면 보통은 큰 갈등이 생기는데, 생각해보면 당연한 결과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완전히 다른 존재들이 공생 관계를 맺는 글을 써보고 싶었다.
(339-340p, 작가의 말)

「나의 우주 영웅에 관하여」는 소설집에 수록하기 위해 새로 쓴 단편이다. 심각한 이야기는 이미 여러 편 실었으니 산뜻한 글을 써보려고 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이 글을 쓰던 시기에는 이야기가 그렇게 흘러가지 않았다. 재경은 가상의 한 인물이지만, 어딘가 실제로 존재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쓴 인물이기도 하다. 지금도 정말로 재경이 심해 어딘가를 유영하고 있을 것처럼 느껴진다.
(340p, 작가의 말)

언젠가 도서관 안에서 책이 분실되면 찾기 쉽지 않다는 이야기를 본 적이 있다. 그 메모에 ‘관내분실’이라는 제목을 달아둔 채 잊고 있었다. 공모전 마감을 앞두고 메모를 보며 구상한 글이 「관내분실」이다. 인간의 마음을 데이터로 저장할 수 있다는 발상은 SF에서 아주 흔히 쓰이는 소재이지만, 데이터의 분실을 실제 세계에서의 분실과도 연결 지어볼 수 있을 것 같았다. 분명히 세상 어딘가 존재하지만 찾을 수 없는 사람이 있다면 누구일까. 그런 생각을 따라가다 보니 지금과 같은 이야기로 완성되었다.
(337p, 작가의 말)

나는 이모셔널 솔리드의 물건들이 효과가 있다는 말을 믿지 않았다. 마음 치유 효과를 가진다는 아로마 오일이나 향초처럼 어디까지나 쓰는 사람의 기분에 달린 물건이라고 생각했다. 그보다는 ‘왜 그런 물건들을 굳이 사려는 사람들이 존재하는가’ 쪽이 나의 주된 의문이었다. 어쨌거나 ‘행복’, ‘침착함’ 같은 감정이 주로 팔리고 있다면 대중들이 플라시보 효과에 의존하여 위안을 얻으려는 것이라고 이해해볼 수 있을 텐데, 부정적인 감정들조차도 잘 팔려나가고 있다는 것이 정말 이상했다.
(200p, 감정의 물성)

"그냥 실재하는 물건 자체가 중요한 거죠. 시선을 돌려도 사라지지 않고 계속 그 자리에 있는 거잖아요. 물성을 감각할 수 있다는 게 의외로 매력적인 셀링 포인트거든요."
(206p, 감정의 물성)

감정의 물성 제품들의 실체는 놀라웠다. 감정의 물성은 일반적인 생활용품들에 소량의 효능 물질을 섞은 것이었는데, 그 물질이 실제로는 향정신성 약물들과 유사한 새로운 종류의 화합물이었던 것이다. 재차 실시된 안전성 검증 실험에서, 추출된 화합물들은 생쥐의 혈뇌장벽을 쉽게 넘어 중추신경계에 직접 영향을 미쳤다.
(208p, 감정의 물성)

"소비가 항상 기쁨에 대한 가치를 지불하는 행위라는 생각은 이상합니다. 어떤 경우에 우리는 감정을 향유하는 가치를 지불하기도 하기도 해요. 이를테면, 한 편의 영화가 당신에게 늘 즐거움만을 주던가요? 공포, 외로움, 슬픔, 고독, 괴로움…… 그런 것들을 위해서도 우리는 기꺼이 대가를 지불하죠. 그러니까 이건 어차피 우리가 늘 일상적으로 하는 일이 아닙니까?"
(214p, 감정의 물성)

은하는 고개를 돌려 공간 속으로 들어온 지민을 보았다. 그녀의 표정은 해석할 수 없었다. 너무 사람 같다고 하던 사람들의 말은 틀린 게 아니었다. 지민은 속으로 되뇌었다. 엄마는 죽었다. 여기에 있는 건 엄마가 아니다. 나는 엄마를 용서할 수도, 용서를 빌 수도 없다. 모든 것은 끝난 뒤에 덧붙여지는 사족이다.
(270p, 관내분실)

은하는 지민이 입을 열어 말하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다시 시선을 돌렸다. 이제 은하는 자신의 물건들이 진열된 책장을 보고 있었다. 하지만 지민은 은하가 자신의 말을 기다리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어떤 사람들은 마인드가 정말로 살아 있는 정신이라고 말한다. 어떤 이들은, 이건 단지 재현된 프로그램일 뿐이라고 말한다. 어느 쪽이 진실일까? 그건 영원히 알 수 없을지도 모른다.
(271p, 관내분실)

"이제……."

단 한마디를 전하고 싶어서 그녀를 만나러 왔다.

"엄마를 이해해요."

정적이 흘렀다. 은하의 눈가에 물기가 고였다. 그녀는 손을 내밀어 지민의 손끝을 잡았다.

(281p, 관내분실)

터널을 통과하기 위해서는 특수 캡슐에 탑승한 상태에서도 극도로 높은 중력가속도, 급격한 온도 변화, 외부 압력 변화를 버텨야 했다. 사이보그 그라인딩은 인간이 터널을 지나는 극한 상황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도록 신체를 개조하는 과정이었다. 인간을 터널 너머로 보내기 위해 인간 자체를 개조하겠다는 발상은 이 프로젝트가 강력한 비난에 직면한 이유이기도 했다. 우주 저편을 보기 위해서 인간이 본래의 신체를 포기해야 한다면, 그것은 여전히 인간의 성취일까?
(281p, 나의 우주 영웅에 관하여)

심해를 유유자적 유영하는 재경 이모를 상상하는 것은 우주에 있는 이모를 상상하는 것보다 차라리 쉬웠다. 심해로 내려간 재경 이모. 그건 너무 아득하고 비현실적이어서 오히려 아무렇게나 그려도 될 것 같은 그림이었다. 이모는 새로 단 아가미로 숨을 쉬고 있을 것이다. 까마득한 어둠 속에서 희미한 빛을 따라 헤엄치겠지. 그러면서 지상에서 일어나는 이 모든 한심한 일들을 마음껏 비웃고 있을 것이다. 가윤은 그곳의 깊은 어둠이 우주와도 닮아 있으리라고, 그래서 이모는 망설임 없이 바닷속으로 떠났으리라고 생각해보았다. 그런데 가윤은 아직 한 가지가 궁금했다. 이모는, 우주의 저편을 보지 못한 것을 그래도 조금은 아쉬워할까?
(313-314p, 나의 우주 영웅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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