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천 년 동안 인류를 억눌러 온 생각은 이 우주가 눈에 보이지 않고 이해할 수 없는 신 또는 신들이 실을 당겨 조종하는 꼭두각시연극이라는 생각이었다. 이런 생각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여전히 우리 주위에 살고 있다.
그러다가 2,500년 전 이오니아에서 새로운 깨달음의 기운이 일기 시작했다. 이 깨달음의 진원지는 사모스 섬이었다.
그리고 동부 에게 해 주변의 섬과 해안가에서 번성하기 시작한 그리스 령의 식민지가 이 깨달음의 진앙이었다.
배들의 왕래가 활발한 무역의 중심지에서 모든 것이 다 원자로 이루어져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생겨나기시작했다.
인간과 다른 동물이 원래는 아주 단순한 형태에서 발생했다는 생각도 태동했다.
질병은 악마나 신이 만든 것이 아니라는 깨달음도 고개를 들었다.
지구는 단지 태양 주위를 도는 행성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그들은 별이 매우 멀리 떨어져 있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이러한 사고의 혁명을 통해서 사람들은 혼돈 Chaos에서 질서 Cosms를 읽어 내기 시작했다.
(342p)

그리고 다른 문명권들과는 달리 이오니아 인들은 한 문명의 중심이 아니라 여러 문명이 교차하는 길목에 있었다. 페니키아의 음성 알파벳 기호를 처음으로 그리스 어에 사용한 곳이 이오니아였다. 곧바로 이오니아에는 글을 읽고쓸 수 있는 사람들이 갑자기 늘어났다. 더 이상 글을 읽고 쓰는 게 사제나 서기만의 전유물이 될 수 없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의 생각이 검토와 논의의 대상이 되기 시작했다. (344p)

그래도 최초는 있다. 그것이 바로 이오니아였다.
과학은 이오니아에서 태어났다.
인류 사상사에서 위대한 혁명이 기원전 600년과 400년 사이에 일어났다. 혁명의 열쇠는 손이었다. 이오니아의 뛰어난 사상가들 중에항해사, 농부, 직조공의 자식들이 있었다.
(346p)

이오니아의 첫 번째 과학자는 밀레투스 Mileus의 탈레스 Thalls였다. 밀레투스는 좁은 해협을 두고 사모스 섬 건너편에 있는 아시아의 한 도시이다. 그는 이집트를 두루 여행했고 바빌로니아의 지식에도 정통했다. 전설에 따르면 그는 일식을 예측할 수 있었다고 한다. 탈레스는 피라미드 그림자의 길이와 수평선 위에 떠오른 태양의 고도를 이용하여 피라미드의 높이를 쟀다. 오늘날에도 달 표면에 있는 산들의 높이를 잴 때 똑같은 방법을 쓴다. 3세기 후 유클리드가 정리의 형식으로 기술한 기하학의 여러 성질들을 탈레스가 이미 증명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347p)

물론, 탈레스는 물이 모든 물질의 근본을 이루는 공통의 원리라고 생각했다. 오늘날 우리가 양성자, 중성자, 전자, 쿼크에 근거해서 만물을 설명하듯이 말이다. 탈레스가 내린 결론의 옳고 그름은 큰 문제가 아니다.
정말 중요한 점은 문제 해결을 위해 그가 택한 접근 방식에 있다. 신들이 세상을 만든 것이 아니고, 자연 속에서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물리적 힘의 결과로 만물이 만들어졌다는 생각이야 말로, 당시 사고의 근본을 뒤흔드는 발상의 대전환이었다.
탈레스가 바빌로니아와 이집트에서 이오니아로 가져온 천문학과 기하학 등의 새로운 씨앗이 그곳의 비옥한 토양 덕분에 튼실한 싹을 틔우고 과학으로 크게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
(349p)

탈레스의 친구이자 동료인 밀레투스의 아낙시만드로스 Anazimandros는 연구에서 실험의 중요성을 인식했던 최초의 인물이었다. 아낙시만드로스는 수직으로 세워 놓은 막대의 그림자가 이동하는 것을 관찰하여 1년의 길이를 정확하게 측정했고 계절의 시작과 끝도 제대로 알아냈다. (350p)

유기 생물이 자신이 처한 환경에 훌륭히 적응하는 모습을 설명하려는 이와 같은 시도를 놓고 볼 때, 엠페도클레스는 아낙시만드로스와 데모크리토스와 같이 ‘자연 선택에 따른 진화‘ 라는 다윈의 위대한 생각의 일면을 분명히 다윈보다 앞서 구상할 수 있었던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354p)

이와 관련해서 데모크리토스는 원뿔 또는 피라미드의 부피를 계산하는 방법을 고안했다. 그는 점점 넓이가 좁아지는 지극히 얇은 판들을 밑바닥에서 꼭대기까지 쌓아올리면 원뿔이나 피라미드를 만들 수 있다고 여기고 얇은 판들의 부피를 더하면 피라미드나 원뿔의 부피를 계산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현대 수학에서 극한의 원리라고 불리는문제를 데모크리토스는 이런 식으로 기술했던 것이다. 그는 이렇게 해서 미적분의 문턱에 까지 간 셈이었다. 미분과 적분은 세상을 이해하기 위한 기본 도구로서, 문헌상으로는 아이작 뉴턴이 처음 개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데모크리토스의 연구 결과는 거의 완전히 파기되고 말았다. 그렇지만 않았더라면 이미 예수의 시대에 미적분법이 사용되고 있었을 것이다. (358p)

현대의 모든 과학 연구에서 필수적인 수학적 논증의 전통은 피터고라스에서 시작된 것이다. 그리고 ‘코스모스‘ 라는 단어를 처음 사용한 이도 바로 피타고라스였다. 그는 우주를 "아름다운 조화가 있는 전체", 즉 코스모스로 봄으로써 우주를 인간의 이해 범주 안으로 끌어들였던 것이다. (364p)

피타고라스학파는 모든 면이 동일한 정다각형으로 만들어진 삼차원적 구조물, 즉 정다면체에 특별히 매료돼 있었다.
여섯 개의 정사각형으로 만들어진 정육면체가 정다면체의 가장 간단한 예이다.
정다각형의 종류는 무한하지만, 정다면체는 오로지 다섯 가지만 가능하다.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들은 면이 정오각형으로 구성된 정십이면체에 관한 지식을 위험한 것으로 간주했다. 그들은 정십이면체를 코스모스의 신비와 연관시켰던 것이다.
나머지 네 종류의 정다면체들은 당시 사람들이 세상을 구성하는 4대 원소로 여겼던 흙, 불, 공기, 물과 연관시켰으므로 정십이면체와 연관시킬 수 있는 대상이란 결국 하늘밖에 없었을 것이다.(이렇게 해서 생긴 다섯 번째의 원소라는 개념이 바로 ‘제5원소 quintessence’ 라는 단어의 기원이다.) 그리고 정십이면체에 관한 것은 일반인들이 알아서는 안 되는 비밀로 간주했다.
(366-367p)

피타고라스학파는 정수整數를 특별히 좋아했다. 그들은 다른 수들은 물론이고 만물의 근원도 모두 정수라고 보았다.
그런데 이러한 생각과 관련해 아주 곤란한 문제가 하나 발생했다. 정사각형의 한 변에 대한 대각선의 길이의 비를 나타내는 2의 제곱근이 무리수로 판명됐던 것이다.
아무리 큰 정수를 쓰더라도 루트2는 두 정수의 비로는 정확하게 표시할 수 없는 숫자다. 이것도 운명의 장난인지, 루트2가 무리수라는사실은 다름 아닌 피타고라스의 정리를 통해서 밝혀졌다.
원래 ‘무리수無理數, irrational number‘는 두 정수의 비ratio로 표현될 수 없는 숫자라는 뜻이었다. 그러나 피타고라스학파는 무리수를 모종의 위협적인 요소로 받아들였는데, 이것은 무리수의 존재가 그들 세계관의 불합리성과 오류를 암시했기 때문이었다. 이것이 오늘날 ‘irrational‘ 이라는 단어가 ‘불합리’라는 두 번째 뜻을 갖게 된 연유이다.
(367p)

피타고라스학파의 사상이 가져다준 득得과 실失은 요하네스 케플러의 일생과 업적을 살펴보면 잘 알 수 있다.
비록 감각으로 인식하지 못하는 세계이지만 피타고라스학파는 완벽하고 신비한 세계의 존재를 확신했다. 기독교도들은 그들의 이러한 생각을 쉽게 받아들였다. 사실상 이것은 케플러가 받은 초기 신학 교육의 핵심적인 요소이기도 했다. 한편으로 케플러는 자연에는 수학적인 조화가 존재한다고 확신했으며, "우주는 곳곳마다 조화로운 비율로 꾸며져 있다." 라고까지 이야기했다. 즉 간단한 수학적 관계가 행성의 움직임을 결정한다고 믿었던 것이다. (368p)

노예의 정체성은 손을 사용하는 그들의 육체 노동에 있었다. 육체 노동은 바로 노예임을 뜻했다. 한편 과학 실험도 육체 노동이었다. 노예 소유자들은 당연히 육체 노동과 거리를 뒀다. 그러나 과학을 할 만큼의 물질적, 시간적 여유가 있었던 사람들도 일부 사회에서 체면치레로 gentle-men 이라 불러 주는 바로 노예주들뿐이었다. 그러니 과연 누가 과학을 했는가? 거의 아무도 과학을 하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된다. (370p)

따라서 중상주의의 전통은 기원전 600년경 이오니아의 위대한 깨달음을 이룩하는 데 크게 기여했지만, 노예 제도를 통하여 200여 년 후에는 과학적 사고의 몰락을 가져오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인류사의 모순 중 모순을 바로 여기에서 볼 수 있다.
(372p)

피타고라스와 플라톤은 코스모스가 설명될 수 있는 실체이고,
자연에는 수학적인 근본 얼개가 있다고 가르침으로써 사람들의 마음속에 과학을 하려는 동기를 크게 불어넣었다.
하지만 자신들의 입지를 불안하게 할 소지의 사실들이 유포되는 것을 억압하고, 과학을 소수 엘리트만의 전유물로 제한하고, 실험에 대한 혐오감을 심어 주고, 신비주의를 용인하고, 노예 사회가 안고 있던 문제들을 애써 외면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인간의 위대한 모험심에 큰 좌절감을 안겨 주고, 과학의 발전에도 어쩔 수 없는 퇴보를 불러왔다.
과학 탐구의 이오니아적 접근 방법이 신비주의에 눌려 긴 잠을 자는 동안 과학 탐구의 도구들은 하릴없이 먼지만 덮어쓰고 있다가, 그 일부가 알렉산드리아 대도서관의 학자들을 통해 후대에 전해지면서 재발견되기도 했다. 그리하여 서양 세계에 두 번째 깨달음의 시대가 도래했으며 실험 위주의 연구 방법과 개방적 탐구 정신이 다시 한 번 존경의 대상으로 떠올랐다. 그리고 잊혀졌던 고대의 저술과 단편적 지식이 다시 읽히기 시작했다.
(374p)

아리스타르코스의 이와 같은 생각은 우리가 ‘코페르니쿠스’ 하면 떠올리게 되는 생각과 그대로 일치한다. 그렇기 때문에 갈릴레오는 코피르니쿠스를 태양 중심 우주관을 "복귀시킨 사람이며 입증한 사람" 이라고 기술했지 태양 중심 우주관의 창시자라고 부르지 않았다. 아리스타르코스와 코페르니쿠스 사이에 있었던 1,800년이라는 긴긴 세월 동안, 어느 누구도 행성의 배열을 제대로 알지 못했지만, 이것은 이미 기원전 280년경에 완벽하고 명확하게 밝혀졌던 것이다. (376p)

아리스타르코스가 우리에게 남겨 준 위대한 유산은 지구와 지구인을 올바르게 자리 매김한 것이다. 지구와 지구인이 자연에서 그리 대단한 존재가 아니라는 통찰은 위로는 하늘에 떠 있는 별들의 보편성으로 확장됐고 옆으로는 인종 차별의 철폐로까지 이어졌다. 그러나 이러한 통찰이 성공을 거두기까지 인류의 역사는 반대쪽으로 흐르는 물결을 끊임없이 거슬러 가며 저항해야 했다. (380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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