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까지 바라는 건 욕심이겠지만 - 월급사실주의 2026 월급사실주의
강보라 외 지음 / 문학동네 / 202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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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서평은 출판사로부터 책을 지원받았으나, 솔직한 생각을 담아 작성했습니다.


연두색 배경 위로 빨간 망토를 휘날리며 서류 가방을 든 한 남자가 보인다. 얼핏 보면 슈퍼맨처럼 당당하게 하늘을 가로지르는 듯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마치 서커스에서 사자가 채찍 소리에 맞춰 억지로 곡예를 넘듯,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배열된 여러 개의 고리를 통과하고 있을 뿐이다. 붉은 코를 한 삐에로의 표정은 관객을 향한 웃음 대신, 삶의 고단함을 묵묵히 견디는 무기력함과 권태로 가득 차 있는 듯하다.




대한민국 직장인 중 정말 '재미있어서' 일하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처음엔 가슴 벅찬 의욕과 순수한 재미로 시작했을지 모르나, 시간이 흐를수록 우리는 각자의 현실과 타협하며 무기력과 생존이라는 거대한 늪 속으로 조금씩 가라앉는다. 이 책의 표지는 그저 버티는 것만으로도 에너지가 고갈된 직장인들의 '억지스러운 비상'과 '가면 뒤의 지친 얼굴'을 해학적으로 그려냈다. 어쩌면 나의 모습 같기도 했다.




<재미까지 바라는 건 욕심이겠지만>은 문학동네의 '월급 사실주의' 시리즈로 매년 80매 내외의 단편 소설을 선정해 하나로 묶어내고 있다. 월급 사실주의 2026는 잡지 기자, 예능 PD, 웨딩 헬퍼, 공무원 등 각기 다른 일의 현장에서 분투하는 8인의 삶을 극사실적으로 그려낸다. 작가들은 노동의 신성함을 찬양하거나 화려한 성공 신화를 말하는 대신, 월급 뒤에 가려진 비루하고도 절박한 민낯을 가감 없이 드러낸다.




책 속에 묘사된 이야기는 때로 마음을 서늘하게 할 만큼 충격적이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좋은 직장'—높은 보수나 자아실현의 성취감—은 이들에게 사치에 가까운듯했다. 대신 그 자리를 채우는 것은 임금 체불과 법의 사각지대, 경영자의 안일한 마인드와 무너진 시스템이다. 보수도 적고 인격적인 대우마저 실종된 척박한 일터에서, 소설 속 주인공들은 단순히 돈을 버는 기계로 전락하지 않기 위해,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존엄과 품격'이라는 마지막 조각을 붙들고 처절하게 분투한다. 이는 소설 속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도 어딘가에서 벌어지고 있는 노동의 실제 기록이기도 했다.




책을 읽는 동안 마음 한구석이 무거웠다. 소설 속 인물들에 대한 연민보다는 현재 직장에서 나쁘지 않은 대우를 받으며 '아이들을 독립시킬 때까지는 어떻게든 버틸 수 있다'라고 스스로를 다독이는 나의 현실이, 장차 이 험난한 사회로 진출해야 할 내 아이들의 미래와 겹쳐 보였기 때문이다. 내가 겪고 있는 이 고단함이 나의 세대에서 끝나지 않고 아이들에게 대물림될 수도 있다는 공포가 엄습했다.


"저런 열악한 회사는 가지 말아야 하는데", "저런 부당한 대우는 결코 받지 말아야 하는데"라는 부모로서의 간절한 기원은, 책장을 넘길수록 거대한 벽 앞에 선 듯한 막막함으로 변했다. 내가 일선에서 물러난 뒤, 우리 아이들이 마주하게 될 노동의 현장이 이 책의 제목처럼 '재미나 보람을 바라는 것조차 욕심'이 되어버린 황무지라면 나는 부모로서 어떤 조언을 해줄 수 있을까. 내가 일구어 놓은 이 작은 안정이 아이들의 미래를 지켜줄 든든한 방패가 될 수 있을지, 아니면 그저 폭풍 전야의 잠시뿐인 평화일지 생각하면 마음이 아려온다.


제목이 시사하듯, 일터에서 재미까지 바라는 것이 정말 과한 욕심인 시대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여덟 명의 작가는 입을 모아 강조한다. 재미와 보람이 거세된 메마른 자리에서도 결코 포기해서는 안 되는 것이 있다고 말이다. 그것은 바로 나를 나답게 만드는 방향성, 스스로 선택한 생활 방식, 그리고 어떤 상황에서도 꺾이지 않는 자존심이라는 '마지막 보루'다.


이 책은 단순히 노동의 고통을 고발하거나 비관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최악의 환경에서도 인간다운 품위를 끝내 잃지 않으려는 노동자들의 끈질긴 생명력을 응원한다. 비록 삐에로의 분장을 한 채 원치 않는 곡예를 넘으며 고리에 걸려 있을지언정, 손에 쥔 무거운 서류 가방을 결코 놓지 않는 그 뒷모습은 곧 우리 시대 모든 직장인이 가진 가장 숭고하고도 눈물겨운 생존 방법 아닐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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