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유출판사에서 출간하고 있는 을유세계문학전집에 드리스 슈라이비 라는 모코로 출신 프랑스작가의 '단순한 과거'가 추가되었다. 제목이 낯설었는데 '카뮈에 비견되며 이슬람 세계에 극단적인 반향을 일으킨' 소설이라는 설명에 이끌려 읽어보게 되었다. '단순한 과거'라.. 원제는 'Le Passe Simple' 직역된 제목인데 너무 평이해서 잘 안외워진다.
'단순한 과거'는 술술 읽히는 소설은 아니었다. 초반부에는 주인공 드리스 페르디가 프랑스 유학 도중에 모로코 본가에 들러 벌어지는 일들이 보여진다. 주로 아버지와 대화하는 장면이 많고, 대화도중 주인공이 머릿속으로 반항하는 생각을 끊임없이 한다. 상황이나 감정을 직접적으로 서술하지 않고, 대화와 상상으로 이야기가 진행되기 때문에 문맥을 잘 유추해가면서 따라가야 한다.
특히 이슬람 문화가 익숙하지 않으면 단어 주석을 계속 찾아가면서 읽어야 하므로 흐름이 끊기기도 한다. 자잘한 단어의 뜻에 얽매이기보다는 주인공의 감정을 따라가면서 읽어나갔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작가와 이름이 같다. 부유한 모로코 가문 출신으로 프랑스에서 바칼로레아 시험을 보는 상황이 같고 형제들의 이름이나 기타 상황이 유사하게 그려져 자전소설의 성격을 띈다.
주인공 드리스 페르디는 프랑스에서 서양 문화를 접한다. 그러면서 부당한 이슬람문화에 절어 있는 본가 가문의 부조리함에 눈을 뜬다. 집안의 '군주'로서 모든 것을 군림하는 아버지 파트미 페르디, 무력하게 아버지를 떠받드는 어머니, 이슬람 문화에 깊이 젖어 아무런 저항감이나 의문을 갖지 않는 형제들.
서양식 민주주의의 눈으로 보면 동양식 이슬람 문화권은 온통 부조리하다. 주인공은 아버지에게 반항하고, 어머니와 형제들이 부조리함을 자각함으로써 저항에 동참시키고자 한다. 주인공의 시각을 따라가면서 상황을 보면 주인공이 한없이 안타깝다. 유교식 문화권인 우리나라 70년대 문화를 보는 것 같아 내 마음도 답답했다.
주인공이 아버지와 대립할 때는 마음 속으로 그를 응원하기도 했다. 억압적인 아버지를 이겨서 어머니와 형제들의 구속을 풀어주길.
그렇지만 주인공이 사용하는 방법 또한 군주인 아버지를 빼닮았다. 형제들을 향한 폭력과 또다른 억압은 희망이 없어보였다. 주인공은 집에서 쫓겨나 프랑스로 가지만, 그가 마주한 현실은 '유색인종 외지인'일 뿐이다.
프랑스에서 그 누구도 주인공을 지지하거나 응원하지 않는다. 그가 아버지와 대립하여 얻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는 친구와 스승을 잃고, 어머니와 형제를 잃고, 아버지마저 잃어버린다. 이 부분에서 내 마음도 허무해졌다.
작가 드리스 슈라이비가 모로코 부르주아에 대한 비판을 한 '단순한 과거'를 발간한 후, 모로코에서 반역자로 낙인찍혔다. 그는 서양인의 시각으로 조국을 비판했다는 배신자라는 평을 받았다.
그렇지만 그는 다음 소설인 '숫염소들'을 통해 꿈을 찾아 떠난 프랑스에서 마주한 이방인에 대한 냉혹한 현실을 고발했고, 소설 '당나귀'를 통해 서양문명의 추구보다는 모로코가 고유한 문화를 되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내가 겪어보지 않은 '이슬람 문화'와 '유럽 문화' 사이에서 고통받은 작가 드리스의 고뇌를 느끼면서, '유교와 동양사상' '미국식 자본주의' 사이에서 고통받고 있는 한국의 우리 세대의 고통이 보였다. 지금은 그저 세대갈등, 젠더갈등으로만 여겨지지만 멀리서 보면 이 또한 거대 사상의 갈등일 것이다. 여성으로서 해야할 일(며느리도리)을 거부하는 한국여성들도 이 책의 드리스처럼 고통받고 있는 것 아닐까. 그렇지만 그들이 그 '도리'와 사상으로부터 저항할 때 과연 무엇을 얻어낼 수 있을까? 스승과 친구들, 부모와 형제를 잃은 후에 그 자신만 남은 것은 과연 승리인가, 아니 어쩌면 몸뚱이만 도망쳐나온 것이 아닌가.
여성뿐 아니라 부디 모든 저항하는 사람들에게 낙원이 도래하기를. 그 자신이라도 살아남기를 응원해본다.
언젠가, 어떤 남자가 우리 아버지의 눈에는 선함과 명예가 가득 서려 있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좀 객관적으로 말씀하시지요. - P30
어린 소녀였을 때, 어머니는 감금되었다. 군주는 먼저 자물쇠를 채워서 아내를 가두었다. 그다음, 차례차례 일곱 번 임신시켰다. 그 결과, 하녀도 없이 젖을 먹여야 하거나, 아니면 임신 중이었기 때문에, 열린 문은 어머니에게 더 이상 의미가 없었다. - P85
나의 아버지는 로슈 선생님이었고, 나의 형제들은 베라다, 뤼시앵, 치쵸였다. 나의 종교는 반항이었다. - P96
이 남자가 갑자기 비굴해지는 것을 보면서, 나는 화학 교과서를 떠올렸다. 기초 산성 물질, 발열과 염분, 급격하고 그래서 약간 감동적인 반응말이다. 로슈 선생님이 말했다. ‘너같이 조용히 있는 사람이 폭력을 부른다. 더운 지방에서 가장 흔한 그림이 만년설을 그린 그림인 것처럼 말이야.‘ - P111
‘동양정신과 이슬람 전통과 유럽 문명의 공생......‘ 모호하다. 아주 모호하다. 그러니 이것은 깨 버리고, 사이좋게 없던 거로 하지요. 꿀단지 밑바닥에 똥이 들어 있을 수 있습니다. 공생 좋다. 그렇지만 동양에 대한 나의 거부와 서양이 내 안에서 태어나게 한 회의주의의 공생이다. - P267
" 그렇지만 내가 뭘 할 수 있겠냐? 우물은 마른 것 같다. 분명히 전에 비가 왔었는데. 휴! 그렇지만, 증발해 버렸어." 그는 격식을 차려서 과인이라고 말하던 것을 그만두었다. - P300
대충 그가 내 안에서 내가 알지 못하는 어떤 미래, 어떤 전조를 발견한 다음부터였다. 그는 거기에 희망을 걸었고, 나를 상속자로 삼을 수도 있다고 판단했다. 그는 나를 프랑스 학교에 보냈고, 그때부터 한 순간도 우리는 멈추지 않았다. 그는 나를 구속하려 들었고, 나는 발길질하며 저항했다. 우리는 서로를 감시하고, 궤변을 늘어놓고, 서로 관찰하고, 예상하고, 준비하고, 미리 대비하고, 순간순간 계획을 수정했다. 밤조차 휴식이 아니었다. 우리는 재정비하고, 재평가하고, 힘을 비축했다. 서로가 서로에게 얼마나 잔인했는지, 때로는 그의 몸 안에서 나를 발견하며 놀랐고, 내 몸 안에 그가 사는 듯 여겨질 정도였다. - P312
"세상이 바뀌었다. 남자가 첫 번째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이다. 그러나 아이가 생기면, 그는 아이들이 모든 면에서 자신보다 낫기를 그 무엇보다도 소망한다." - P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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