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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전들
저스틴 토레스 지음, 송섬별 옮김 / 열린책들 / 2025년 10월
평점 :
저스틴 토레스 / 암전들
작품은 1930년대에 실제로 존재했던 퀴어 사회학자 잰 게이 (JanGay)의 연구를 모티프로 삼는다. 잰 게이는 당시 금기시되던 동성애자들의 삶과 욕망을 직접 인터뷰해 기록한 최초의 연구자였다. 하지만 그녀의 연구는 곧 남성 중심의 성적 변종 연구 위원회에 의해 빼앗기고, 출간될 때는 그녀의 이름이 완전히 지워졌다. 그렇게 퀴어들의 진짜 목소리는 병리학적 진단으로 대체되고, 욕망은 질병으로 번역되었다.
저스틴 토레스는 바로 그 지워진 자리에 파편들을 이어붙이며, 새로운 이야기를 시작한다.
사막 한가운데에 있는 폐허 같은 집 팰리스. 이곳은 현실과 환상의 경계에 있는 공간으로, 떠돌이들이 모여드는 장소이자, 동시에 과거의 망령들과 기억이 스며있는 공간으로 죽음을 앞둔 노인 후안 게이와 그를 간호하는 젊은 화자, 네네가 함께 머물고 있다.
후안은 젊은 시절 잰 게이와 함께 연구를 수행했던 인물로 세월이 흘러 이제는 지워진 역사 속 마지막 증인으로 남아 있다. 그는 네네에게 검게 칠해진 연구서 성적 변종들 Sex Variants을 건넨다. 이 두권의 책 수많은 페이지는 검은 마커로 덮여 있어 아무것도 읽을 수 없지만, 그 어둠 속에는 증언들의 흔적, 욕망의 잔향, 사라진 이름들의 기척이 남아 있었다.
후안은 죽음을 기다리며 네네에게 자신과 잰 게이, 그리고 수 많은 퀴어들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후안과 네네는 세대가 다르고 경험이 다르지만, 둘 다 억압과 은폐의 역사를 공유한다. 두 사람의 대화는 현실과 환상을 넘나들며, 때로는 시처럼 아름답고, 때로는 조각처럼 흩어졌다.
세상이 꺼져 있는 어둠 속에서, 다시 피어나는 이야기들이 있다. 암전들은 그렇게 검게 칠해진 페이지들 속에서 아스라히 빛나는 목소리들을 다시 피워 올린 소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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