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호랑이
네주 시노 지음, 이세욱 옮김 / 열린책들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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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주 시노 / 슬픈 호랑이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기 위한 완전히 새로운 형식의 발명.

2023년 페미나상과 고등학생 공쿠르상을 휩쓸며 문학계를 뒤흔든 네주 시노의 #슬픈호랑이 는 소설과 에세이, 회고록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작품.

66p 이 글에는 일기가 들어 있지 않다. 되도록 솔직하게 그린 내면 풍경도 없고, 거짓말도 없다. 나에게 속한 나만의 공간은 행간에 있지 않고, 행 자체에도 있지 않으며, 그 어디에도 없고, 오로지 내 안에만 존재한다.

이 책은 #알프스산맥 의 평화로운 마을에서 어릴 적 의붓아버지에게 지속적인 성적 학대를 당한 저자가 얼룩진 유년 시절을 되짚어가는 것으로 시작한다. 가족이 깨질까 두려워 홀로 비밀을 간직했던 어린 시절을 지나, 성인이 되어 어머니와 함께 가해자를 고소하고 재판장에 서기까지의 과정을 파편화된 기억과 신문 기사, 편지 스크랩 등의 기록을 통해 재구성한다.

91p 이 책의 화자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다면 좋겠다. 화자를 나와 떼어 놓고 이 서술의 당당한 주체로 만들 수 있다면 좋을 것이다. 그런 화자는 마치 사회면 보도 기사를 쓰듯이 나를 몇몇 사건의 주인공으로 만들어 줄 것이다.

가해자를 법정에 세우고 단죄함으로써 사건은 형벌로 끝이 나지만, 이야기는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가해자의 처벌 이후에도 끈질기게 삶을 맴도는 #트라우마 의 흔적들과 그 이후의 삶에 포커스를 맞춘다. 피해자에게 쏟아지는 세상의 얄팍한 동정과 일그러진 시선, 평면적인 기대를 날카롭게 꼬집으며, 남겨진 상처를 안고 어떻게 삶을 이어나가야 하는지 질문을 던진다.

128p 나는 이 책이 바로 나에게, 한 인간이기도 하고 작가이기도 한 나 자신에게 무언가를 가져다줄 수 있으리라 확신 하지 못한다. 나는 글쓰기가 치료법이 된다는 생각을 믿지 않는다. 설령 그런 글쓰기가 존재한다 하더라도, 이 책을 통해 내가 치유된다고 생각하면 혐오감이 밀려온다. 만약 다른 사람들을 위한 것도 아니고 나 자신을 위한 것도 아니라면, 이 책에 무슨 소용이 있을까?

194p 내가 곤경에서 벗어났다는 사실 때문에, 배심원들의 눈에는,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나를 강간한 자의 유죄성이 얼마쯤 적어진다. 심지어는 내 자신의 눈에도 그렇게 보인다. 만약 그가 정말로 무언가 심각한 짓을 나에게 했다면, 나는 지금 여기에 있을 수 없으리라. 종종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너는 살아 있고, 너의 뇌는 잘 작동하고 있어. 너는 자유롭게 떠나고 생각하고 살아가고 있어. 뭐하러 네가 고소를 하는 거야?

그렇게 온전한 자신의 삶을 되찾기 위해 분투하는 생존자의 일상이 담담하게 이어진다. 책의 제목은 윌리엄 블레이크의 시 #호랑이 의 한 구절에서 출발한다. "Did he smile his work to see? Did he who made the Lamb make thee? (그분은 어린양을 만들고도 그대를 만들었는가?)" 창조주가 순수하고 온순한 존재인 어린양과 파괴적이고 무시무시한 힘을 가진 '호랑이'를 동시에 만들었는가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이다.

333p 만약 우리에게 선택권이 있다면, 어린양보다 호랑이를, 개보다 늑대를 선택하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하지만 만약 내가 그 방향으로 나아간다면, 즉 지배당하다가 지배자가 되고, 다시 일어나 복수를 하는 전사가 되는 쪽으로 나아간다면, 어떻게 악을 초월하면서도 새로운 악을 향하지 않고 선을 향해 나아갈 수 있을까? 그리고 어떻게 해야 그 선이 우리에게 중요하고 매력적인 것으로 계속 남아 있게 될까?

네주는 이를 통해 자신을 훼손한 강간범과 정녕 같은 흙으로 빚어진 존재인지 악의 근원을 파헤치며, 선과 악, 아름다움과 공포가 공존하는 세상의 모순을 다뤘다. 가해자의 초상화를 객관적인 시선으로 그려내고, 피해의 경험을 객관화하고 분석하는 도구로 문학을 활용한 점이 놀라웠다.

기존 증언 문학의 한계를 부수고 문학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준 작품이었다.

#다독 #열린책들 @openbooks21 #도서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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