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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의 왕관 - 유럽 왕실을 뒤흔든 병의 연대기
여지현 지음 / 히스토리퀸 / 2025년 12월
평점 :
* 출판사로부터 책을 증정받아 읽고 작성했기에, 주관적인 내용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왕이나 왕족이 되면 세상 좋은 것은 다 누릴 것 같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다. 일단 그들도 사람인지라 필연적으로 병을 앓는다. 그 병이 왕족이라는 특수성에서 기인하기도 하고(!), 다른 사람도 앓을 수 있지만 국가의 운명을 이끄는 인물(왕이나 왕의 배우자)이 앓는 병이라는 점에서 다양한 나비효과를 가져오기도 한다.
이 책은 유럽사에서 이런 이야기들을 모아서 쓴 책이다. 우선 첫 번째로 받은 인상은 주의 깊게 사례를 골랐다는 것이다. X레이나 MRI 같은 검사기법이 없던 과거의 진단기록은 한계가 있기 때문에 온갖 억측이 나오기 쉽고, 음모론이 꼬이기도 쉬운 주제를 다루면서도, "흥미를 자극하는 사례를 골라 저급한 자극성으로 쓰지" 않았다는 점이 인상깊었다. (있는 소리 없는 소리 다 긁어다가 왕들 독살설로 센세이션을 일으킨 모 양반의 사례를 생각해보시길 바란다)
두 번째 인상은 과학적인 논의를 이해하고 서술하려고 저자가 굉장한 공을 들였다는 점이었다. 사실 이 부분에서 사학과를 전공하고 있는 본인도 부끄러운 부분이, 사학과에서 이렇게 전문적인 지식-특히 이공계 분야의 지식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채 황당한 결론을 내린 박사급 연구(!)도 잊을만 하면 나온다는 것이다. (사실적시 명예훼손이 있는 관계로 여기서는 구체적 사례는 생략하겠다) 역사 전공자이지만, 의학과 관련된 내용들을 공을 들여 찾아서 보완해서 썼다는 점에서 좋은 모범을 보였다고 생각했다.
이런 이야기가 가능한 것은 "군주제"라는 정치의 성격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우선 보두앵 4세의 한센병부터 이야기해 보자. 이 병은 지금은 그래도 완치도 가능해지고 인식이 많이 좋아졌지만, 예전에 한센병 환자들은 사회에서 소외된 사람들의 대표적인 경우였다. 그렇게 죽어간 사람들이 훨씬 더 많겠지만, 역사적으로 보두앵 4세의 한센병이 중요하게 다루어진 이유는 명백하다. 예루살렘 왕국이 마지막에 맞은 왕다운 인물이었지만 한센병으로 인해 후사를 남기지 못한 상태에서 일찍 사망했고, 결국 살라딘에 의해 예루살렘이 함락되었기 때문이다.
근친혼에 의한 유전병은 어떨까? 사실 여타 국가에서도 왕가의 근친혼은 흔했고, 유럽 왕실 내에서도 특정 가문 내의 결혼은 흔했다. 왕실이 혼인을 통해 가문끼리 관계를 맺으면서 권력이 분산되는 정도를 제한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다 보니 여타 신분에 비해 왕실 가문에서 근친혼이 벌어지는 빈도나 정도가 강했다.
다만 합스부르크 가문은 유달리 근친혼의 정도가 심했다. 이는 합스부르크가 구성한 국가의 결속력이 여타 국가들과 비교해도 약했던 것에 기인한다. 워낙 국가적 결속력이 느슨했기 때문에, 혈통 보호가 절대과제가 되버려서 뒤로 갈수록 과도한 근친혼을 하게 되었고, 결국에는 카를로스 2세의 대에서 유전적 결함이 불임으로 이어지면서 스페인 합스부르크 왕가는 대가 끊겨버렸다.
결국 한 사람에게 국가의 운명이 결정된다는 지위의 특성, 그 권력을 나눌 수 없다는 특성에서 왕족은 병을 앓기도 했고, 그들이 앓는 병이 역사를 바꾸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이야기를 조심스럽게 사례를 선택해서 안내하고 있다는 점에서 좋은 교양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