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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 상처를 말하다 - 누구도 이야기하지 않았던 예술가의 뒷모습
심상용 지음 / 시공아트 / 2011년 12월
평점 :
상당히 흥미롭게 읽히고 돋보이는 책이다. 이 책은 힘의 예술, 강자의 미학에 반기를 든다. 오늘날 예술로 명명되는 것은 대부분 부장 정부나 다국적 기업들과 더불어 번성한다. 현대 예술가들은 그러한 강국들 중에서도 몇몇 제한된 도시들의 일류 대학들에서 만들어지며 그들의 명성은 글로벌 미디어가 힘을 발휘하는 세계에서 빠르게 승인되고 효력을 발휘한다. 이 책은 이에 대한 반성에서 시작한다.
저자는 좋은 예술은 상처 받은 영혼이 믿음이라는 나약해 보이는 힘에 의존해 벌인 도전의 결과라고 말한다. 앤디 워홀이나 로스코, 바스키아 같은 스타급 작가의 경우에도 많은 측면에서 재평가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또한 카미유 글로델이나 반 고흐는 대중적인 인기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 뿌연 진실에 다가서야 한다고 주장한다. 누가 이런 선언에 흥미를 갖지 않을 수 있겠는가!
문제는 이러한 선언을 얼마나 내용적으로 잘 담보했느냐다. 사실, 앞부분에서는 실망도 했다. 고흐, 콜비츠, 프리다 칼로 등은 저자의 주장이 강한 것에 비해 그것을 뒷받침해주는 내용이 부족해 보였다. 논의가 무척 추상적이라 뼈대만 앙상하고 살이 붙지 않은 느낌이랄까.
그러나 백남준, 이성자, 앤디 워홀로 넘어가면서 홀딱 반해 버렸다. 백남준에 관한 글 중에서는 감히 이제껏 본 글 중 최고라고 말하고 싶다. 저자는 백남준이 과연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아티스트인지 의문을 품으며 글을 시작한다. 우선 백남준이 포스트모던의 시민이라는 것에 대해 대부분 사람들이 동의할 것이다.
저자는 백남준이 구사한 전위라는 것은 생존전략이이었다고 분석한다. 게다가 그가 보인 전위성도 시간이 흐르면서 희미하게 되었다. 초기에 백남준은 플럭서스의 모토에 따라 창작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자신을 배반한다. 즉 탈오브제, 반부르주아 문화, 반상업주의라는 전위주의 전선에서 후퇴한다.
그리고 그는 비디오 조각을 비롯한 오브제 제작에 나섰고, 그 오브제들은 갈수록 대형화되었다. 이는 모더니즘의 모든 유산을 거부하는 플럭서스의 정신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다.
오브제의 대형화는 필연적으로 막대한 자본을 예술 행위의 필수 요인이 되게 했고, 예술의 자본에 대한 예속으로 이끌었다. 저자는 백남준의 삶은 존 케이지보다는 앤디 워홀에 가깝다고 평가한다. 여기에서 나는 무릎을 탁 쳤다. 정말 적절한 평가다. 사실 백남준은 파괴나 해체의 관례에 가담한 것이다.
친일 거부의 자식으로서 조국에서 받아들여질 수 없던 이방인의 생존전략이라는 관점에서 백남준의 예술 세계를 본다면, 기존에 이해되지 않던 것들이 풀리게 된다. 대체 백남준에게 해체해야 할 것이 무엇이 있단 말인가? 나는 그것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는데, 이번에 그 의문이 풀리게 되었다. 저자는 말한다.
"존 케이지와 같은 서구의 전위주의자들이라면 모를까, 완전한 이방인이었던 백남준에게 그토록 극단적인 해체에 나서야 할 객관적 명분은 불분명했다. 그가 바이올린을 바닥에 내리쳐 산산조각을 냈을 때, 백남준에게 서구 음악의 음계적 질서가 그토록 분노와 적개심을 불러일을키는 대상이라고 생각하게 할 만한 근거는 찾기 어렵다."(194쪽)
그러니까 백남준은 서구의 전위주의자가 되기에는 맥락적 결핍이 있었다. 우리는 아직도 백남준을 잘못 만나고 있다. 그를 제대로 만나고 싶다면 이 책을 보라고 추천한다.
이성자를 발견한 것도 이 책에서 얻은 성과다. 작품 <지구 반대편으로 가는 길>을 보고 완전히 반해 버렸다.
앤디 워홀에 대한 글도 무척이나 흥미롭다. 거품을 걷어내는 글이라고 할까. 워홀은 잣니이 버려야 한다고 한 부르주아 예술의 최대 수혜자가 되었다. 우리가 아는 것은 다만 조명을 받는 이미지일 뿐이다. 이 책은 이미지 뒤에 부재하는 텅 빈 공허를 주목한다. 그리고 사회에 대한 복수와 성공에 대한 집착이라는 상처에 주목한다. 이는 워홀의 작품을 보는 새로운 시각을 제공한다.
<예술, 상처를 말하다>는 작품을 새롭게 보는 시각을 제공하는 매력적인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