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연하고 사소한 것들의 철학 - 언제 어디서든 거부할 수 없고, 상관해야만 하는 질문
마르틴 부르크하르트 지음, 김희상 옮김 / 알마 / 2011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책은 오늘날 우리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에 대해 왜 그렇게 생각하게 되었는지 그것의 숨은 의미는 무엇인지를 따져 본다. 사실 우리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많은 것들은 엄청난 산통 속에서 나타났다는 것을 이 책은 보여준다. 이 작업은 위대한 사상들의 연원을 따져보는 작업일 수도 있다.

이 책은 역사적 순서대로 우리의 일상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 생각들을 살펴본다. 이 책이 제일 처음 살펴보는 것은 알파벳이다. 저자는 알파벳은 커다란 특징은 평등함이라고 지적한다. A와 B는 서로 동등한 가치를 가진다. 모두 음가만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한자와 비교해 보면 그 특징이 잘 드러난다.

한자에 비해 알파벳은 24개의 글자만으로 모든 것을 쓰고 읽을 수 있으니 알마나 간편한가. 곧 알파벳은 평등을 지향하는 민주화 운동이다. 고대 그리스인들이 알파벳 배우기 운동을 벌인 것도 이해가 간다.

나아가 이 책은 알파벳은 사상이라고 주장한다. 서양철학은 자연을 이루는 근본 원소가 무엇인지 묻는 물음과 함께 시작했다. 그러니까 자연도 기본 알파벳이 모여 이루는 단어와 같은 것이라고 본 셈이다. 고대 그리스 자연철학자들은 알파벳의 원리를 자연에 응용한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기본 원소를 캐물어 갔던 것이다. 이러한 이 책의 주장은 상당히 흥미롭다.

한편 노동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것은 언제부터 시작된 것일까? 관련하여 이 책은 시토 수도회를 소개한다. 이 수도원은 신앙에 충실한 영성을 노동 실적과 그 효율성으로 측정하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노동을 기도와 동일시했고, 노동이 산출해내는 생산물을 영성으로 보았다. 즉 신앙이 물상화된 것이다. 이제 신앙은 사고팔 수 있는 상품이 된 것이다.

이쯤이면 막스 베버의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을 떠올릴 테다. 그렇다. 이 생각은 칼뱅주의의 씨앗이 되었다. 유명한 프로테스탄트 노동 윤리로 이어지게 되는 것이다.

새로운 관점을 낳은 원근법은 새로운 세계관을 낳았다는 분석도 흥미롭다. 원근법은 정치적으로 중심 중시 관점이며 이는 곧 권력의 언어이자 대의제 정권을 뜻한다고 분석한다. 태양왕 루이 14세가 "짐이 곧 국가"라고 말한 것은 바로 그가 공동체의 모든 이해가 집약되는 소실점이라는 뜻이라고 본다.

숫자 0에 대한 얘기도 가볍게 지나칠 수 없다. 이 책은 '0이라는 절대적인 출발점'과 데카르트의 회의론을 결부시킨다. 저자는 데카르트는 육화한 0 또는 철학의 0과 같은 인물이라고 소개한다. 데카르트가 끝까지 밀고 나간 의심으로 정신세계의 출발점을 생각하는 나에서 찾은 것은 바로 0을 찾은 것과 같은 것이다.

결국, 저자는 0은 단순한 수가 아니라 세상을 바라보는 세계관이라고 말한다. 0과 더불어 인간은 자신을 세계의 중심에 놓게 된 것이다.

<당연하고 사소한 것들의 철학>은 알파벳, 동전, 수사학, 법률, 노동, 시계, 원근법, 개인, 정치, 계몽, 역사, 진화, 자본, 정보 등에 대해 짧은 글들을 모아 놓았다. 그렇지만 저자의 탄탄한 내공이 담겨 있어 집중해서 읽게 된다. 당연한 것들을 다시 생각해 보게 하는 철학 본유의 매력을 지닌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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