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 멈출 수 없는 상상의 유혹 상상에 빠진 인문학 시리즈
허정아 지음 / 21세기북스 / 2011년 4월
평점 :
품절


"인간의 몸은 문명의 시작과 함께 끊임없이 상상의 대상이 되어왔고, 또한 상상력의 원동력 자체였다." (서문에서)

 

놀랍도록 흥미롭게 읽은 책이다. 이 책은 마치 인간의 본원적 특성이 상상이라고 말하는 듯하다. 수많은 예술 작품과 각종 신화, 문학 작품은 물론이고, 고대의 과학 기술부터 최신 과학 기술까지, 그리고 플라톤의 <향연>, 동양 고전 <회남자>, <열자>, <포박자>, <황제내경> 등이 얼마나 상상을 담고 있는며 또 그것들이 상상에서 시작된 것인지 보여 준다.  

 

인간은 결핍의 존재다. 그래서 인간은 영원히 욕망한다. 상상력은 바로 욕망에서 시작된다. 이 책은 '상상에 빠진 인문학' 시리즈 가운데 하나로, 몸을 주제로 상상력이 어떻게 펼쳐지는지 살펴본다. 몸은 상상력의 통로이자 창고이며, 상상력의 원천이자 질료이기에 더욱 흥미로운 주제일 수밖에 없다.

 

우선, 예술이야 당연히 상상력의 최전선에 있다는 것을 누구나 수긍할 것이다. 따라서 이 책은 수많은 예술 작품들 속에서 몸에 대한 상상력이 어떻게 펼쳐졌는지 살펴본다. 그러나 그것에 그치지 않는다.

 

이 책의 특별한 매력은 과학 기술이야말로 몸에 대한 상상력에서 나왔다는 것을 보여준다는 데에 있다. 얼핏 생각하기에 과학 기술은 수학적 사고력을 바탕으로 하는 것으로 상상력과 관계 없을 것 같다. 그러나 과학 기술이야말로 상상력이 필요하다. 이 책은 인간이 욕망하고 상상하지 않았다면 많은 과학 기술, 기계 등이 나올 수 없었을 것이라고 한다.

 

이 책은 특히 최신 과학 기술을 이끌어낸 상상력에 많은 관심을 보인다. 덕분에 그간 잘 알려지지 않았던 최신 과학 기술도 상당히 접할 수 있다. 저자는 나아가 21세기는 더욱 적극적으로 상상력이 과학을 이끌 것이라고 주장한다.

 

1.

이 책이 분석하는 사례들을 살펴보자. 먼저 해부학. 이 책은 해부학이 몸 안을 보고싶은 욕망에서 시작되었다고 설명한다. 안을 볼 수 없기에 숱한 상상력을 불러왔고, 그 욕망과 상상력은 결국 해부학으로 이어졌다. 동서양의 해부도를 보며 몸을 통해 우주를 상상하는 방식까지 살펴본다.

 

현미경을 통해 생명체의 모습을 들여다보는 것은 예술에도 영향을 주었다. 생명체의 미시 세계에 대한 호기심과 상상력이 예술가들에게 새로운 지평을 열어준 것이다. 예를 들면, 칸딘스키의 <관계>라는 작품은 미생물들을 연상시키는 형상을 추상적으로 그려놓았다.

 

달리의 경우도 흥미롭다. 달리는 DNA 이중 나선 구조에 관한 논문을 읽고서 <나비 풍경>이라는 작품을 그렸다. 그림에는 나비가 이끄는 방울다발이 등장하는데, 누가 봐도 DNA 이중 나선 구조임을 알 수 있다. 달리의 <나비 풍경>은 DNA로부터 생명의 욕망을 읽어내고 있다.

 

결국, 이 책은 과학자와 예술가가 자연과 생명현상의 보이지 않는 징후들을 상상하고 모험을 감행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지며 협업을 해왔다고 정리한다.

 

2.

몸에 대한 상상력은 몸을 벗어나고자 하는 인간의 끊임없는 욕망과 떨어질 수 없다. 인류는 오래전부터 자신의 몸을 벗어나 다른 몸을 상상해 왔다. 분신, 유체 이탈, 초상화, 가면, 아바타, 로봇 등이 그러한 욕망에서 나온 상상의 결과물이다.

 

신화는 언제나 인간의 근원적 욕망을 반영한다. 이 책은 신화에서 몸에 대한 다양한 상상을 뽑아온다. 힌두교 신화에서 분신에 대한 상상력을 읽는다. <홍길동전>, <전우치전>, <서유기>에서도 분신에 대한 상상력을 읽어낸다. 때로 도교 수련법을 담은 <태을금화종지>에서 DNA 복제인간에 대한 상상력을 읽어내기도 하는데, 무척 흥미롭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책은 로봇 또한 인간이 분신을 만들려는 상상력의 산물이며, 초상화는 인간의 영원한 삶에 대한 욕망의 투사물이며, 가면은 자신의 몸을 다른 몸으로 상상하는 원초적인 예라고 분석한다.

 

3.

인류의 모든 과학 기술은 욕망에서 출발해 상상력과 깊은 관련을 지니며 발달했다. 신화가 인간의 오랜 욕망과 상상력의 원형을 보여주듯이, 21세기 최첨단 과학 기술도 인간의 상상력 속에서 오랜 기간 욕망의 대상이었던 것들이다. 유전공학 기술도 이미 신화 속에서 상상되었으며, 나노 기술에서 꿈꾸는 것들도 이미 연금술에서 실험되었다. 기계는 상상력의 세계와 무관하지 않다. 둘은 오히려 서로 끊임없이 영향을 주고받는 사이다.

 

특히나 오늘날에는 몸의 경계를 해체하는 수준까지 나아가고 있다. 인간은 이미 너무도 기계적인 존재이고, 기계는 이미 너무나 인간적이다. 몸에 대한 상상력이 로봇, 안드로이드, 사이보그에 이르는 것을 살펴보는 이 부분은 이 책에서 가장 흥미로운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책은 먼저 초현실주의 미술 작품이 역사상 유래없는 몸에 대한 상상을 보여 주었다는 것에 주목한다. 달리의 그림에서는 경계로부터 자유로운 몸이 동물, 식물, 광물 등 낯선 것들과 혼합된다. 몸의 경계를 허물며 자연물과 콜라주된다. 초현실주의에서 몸은 모든 경계들이 뒤섞이고 융합되는 새로운 상상력의 장이다.

 

기계 또한 이질적인 것들의 이종교배적 상상력의 원동력이 되었다고 분석한다. 사이보그라고 해서 특별한 것이 아니다. 인간의 신체는, 인간의 뇌는 이미 기계와 하나가 되어 함께 움직인다. 예를 들면, 자전거를 타는 신체는 이미 사이보그다. 뇌는 자전거와 신체를 하나로 인식해 움직인다.

 

기계와 인간의 이종교배는 이미 시작되었다. 21세기는 그것이 더욱 가속화될 것이다. 이 책은 '포스트 휴먼'의 시대가 시작되었다고 선포한다. 그것은 인간과 기계의 경계가 해제되는 시대다. 즉 핸드폰, 자동차, 컴퓨터가 인간의 신체를 구성하는 이 시대에 우리는 이미 사이보그다.

 

이 책은 고전을 풍부한 상상력이 담긴 텍스트로 새롭게 읽어내는 미덕도 보여 준다. 상상하는 인간의 출현을 선포하는 무척 흥미로운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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