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야 Taschen 베이직 아트 (마로니에북스)
로제 마리 & 라이너 하겐 지음, 이민희 옮김 / 마로니에북스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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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나에게 고야는 몇몇 유명한 작품들로 인상지워져 있었다. 그런데 그 그림들이 편차가 상당히 커서 궁금증이 더했다. 이를테면 몇몇 작품은 계몽주의 화가로서의 면모를 보이지만, 몇몇 작품은 표현주의적이고 대단히 혁신적이었다. 이번에 읽은 책은 그 궁금증을 풀어주었다.

고야의 그림은 독특한 데가 있다. 궁정화가로서 그가 그리는 이들은 ‘위엄 있어야 하는’ 인물들이다. 그런데 그는 과장해서 그리지 않았다. 유명한 <카를로스 4세와 그의 가족>이 대표적인 사례다.

고야는 왕가에 아첨하지 않았다. 그들은 호화로운 의복을 입었지만, 고야는 빛나는 지위를 강조해서 그리지 않았다. 그림을 보면, 왕은 총명하게 표현되지 않았고 왕비의 얼굴도 미화되지 않았다. 멍한 표정의 인물들은 심지어 바보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귀족 그림도 마찬가지다. 고야는 귀족 그림에 으레 있기 마련인 화려함과 지위의 상징을 배제했다. 오히려 인간적인 모습을 포착해낸다. 호베야노스 초상화가 바로 그런 사례다.

호베야노스는 당시 법무부장관이었다. 장관은 장식 없는 평범한 의복을 입고 있으며, 판관의 가발도 쓰지 않고 있다. 또 공식적인 자세도 취하지 않고 팔에 머리를 기대고 책상에 앉아 있다. 관심을 끌려 하기보다 고뇌하고 지친 모습이다. 고야는 계급장을 떼고 인간으로서 호베야노스를 그렸던 것이다.

궁정화가를 지낸 화가들은 밝고 활기찬 궁정생활을 묘사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런데 고야는 즐거움을 추구하는 주제에 국한하지 않았다. 그는 스페인 궁궐의 오락과 소풍 대신 하급 신분의 삶에 대한 현실적인 묘사를 보여 준다.

고야가 그렇게 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계몽주의를 지지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계몽주의 친구들과 어울렸다. 그는 그림을 통해서 사회를 풍자하고 비판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그의 그림이 계몽주의를 선전하기 위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계몽의 뒷편에 있는 어둠을 그리기도 했다. 그런 점에서 고야의 그림은 독특함과 흥미를 더한다.

고야의 궁정화가로서의 그림도 독특한데, 후기의 그림은 더욱 극적이다. 1793년 이후로 그의 그림은 환상과 악몽들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무엇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건강에 이상이 생긴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거의 죽음 직전에 이르렀고 청력을 상실했다. 

그의 작품이 극적으로 변하게 된 모습을 보여 주는 작품이 동판화로 작업한 <카프리초스> 연작이다. 악몽과 기이한 환상을 그려 놓았다.

다양한 그림 중에는 당시의 권력자들을 비판하고 풍자하는 것도 있다. 그런데 그렇게 단순하지 않은 그림들도 있다. 그림 속 그의 태도가 모호하다. 즉 그가 그런 환상을 풍자에 이용하는 것인지 거리감을 두고 있는 것인지 알쏭달쏭하다. 고야의 그림은 그것이 더욱 매력으로 느껴지기도 한다는 점에서 묘하다.

그 외에 <정신병자 수용소>에서 볼 수 있는 광기, <밤의 폭풍>에 담긴 정체를 알 수 없는 불안, <거인>의 두려움 등은 강렬하게 다가온다. 광기, 불안, 두려움... 사실 내게 고야는 이런 분위기의 그림들로 인상지어져 있었다. 지극히 주관적인 느낌, 대담한 붓터치가 무척이나 인상적인 화가였다.

이번에 고야가 대단히 혁신적인 화가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이 책을 읽으며 얻게 된 큰 성과다. 특히 <개>라는 그림을 알게 된 것은 큰 충격이었다. 이 그림은 19세기 후반이나 20세기 초반에 가서야 볼 수 있는 미술계의 혁신을 고야에게서 미리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커다란 충격이었다.

이 그림은 모든 예술적 전통을 거스르고 있으며, 공간을 공허하게 남겨 둔다. 그림에서 보이는 것이라곤 단 1%를 차지하는 개의 머리뿐이다. 어둡고 설명할 수 없는 고독과 불안감이 가슴을 채운다.  

<곤봉 결투>라는 그림도 강렬하게 다가왔다. 무릎까지 찬 모래 속에서 도망칠 수도 없고 과연 승리자라고 해도 그곳에서 빠져나오지 못할 것 같다. 나는 이 그림이 현대 사회에 대한 적절한 비유로 읽었다. 자신이 살기 위해 남을 죽여야 하는 진흙탕, 더구나 그것이 아무런 의미도 없는 일이다. 그것이 우리가 사는 세상이다. 공허하고 의미 없는 세상! 그에 대한 너무도 적절한 비유다. 머리털이 곤두선다. 

나를 강렬하게 사로잡은 그림을 또 있었다. <감람산의 그리스도>. 이 그림은 프로테스탄트의 고독한 내면을 보여 준다. 보통 종교화에는 화면을 가득 채운 밝은 분위기의 천사들이 있을 테다. 그러나 이 그림은 절대적인 암흑이 공간을 채운다. 그리고 묻는다. 왜냐고. 왜 하필 나냐고.

그것은 현대인의 내면이기도 하다. 존재의 이유를 스스로 찾아야 하는, 외롭고 의혹에 찬 현대인의 모습이 너무도 강렬하게 담겨 있어 소름 끼친다.

그 외에도 <옷을 벗은 마하> 그림으로 고야가 종교 재판을 받은 흥미로운 이야기도 있고, 순례여행을 우울한 악몽으로 그린 <산이시드로 순례여행>도 언급하고 싶다. 광기어린 사악한 군중이 너무도 강렬하게 담겨 있다.  

내 마음을 사로잡은 그림들을 하나하나 되씹으며 소개하다가는 글이 끝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이 책은 다채롭고 선명한 도판, 짧지만 명쾌한 설명으로, 나를 고야에 빠지게 만들었다. 그동안 타센 시리즈에 관심이 많았는데, 이번에 확실히 이 시리즈에 대한 신뢰가 더 높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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