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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정원 - 어느 미술사가의 그림 에세이
정석범 지음 / 루비박스 / 2010년 7월
평점 :
품절
아름다운 그림으로 장식된 기억의 보물창고 만들어
우리나라 미술 책은 보통 정형화된 작품 해설과 관련 사상, 예술사적 지식 등을 소개하곤 했다. 그런데 이 책은 신선하다.
저자 자신의 경험을 통해 그림에 대한 이야기와 분석, 미술 이론을 설명한다. 클로드 모네, 빈센트 반 고흐 등의 서양 화가부터 나빙, 거렴, 안도 히로시게 등의 동양 화가까지 섭렵하며 그림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를 풀어 놓는다.
저자는 군인인 아버지 때문에 전국 곳곳을 떠돌며 이방인으로써 지내게 된다. 그 과정에서 생긴 에피소드들과 어린 시절의 예민한 감수성을 바탕으로 자신의 경험을 인상적으로 그려낸다. 이 책은 저자의 추억을 읽는 에세이 만으로도 충분히 재미를 준다. 그에 더해 명화를 연결시켜 이야기를 더욱 진행시켜 글 읽는 재미를 더욱 배가한다.
이 책은 저자의 최초의 기억, 네 살의 기억부터 시작해 열두 살이 되는 사춘기의 문턱에서 끝난다. 저자는 어린 시절을 애써 외면했다고 말한다. 힘겨운 시절을 떠올리기 싫었다며. 그런데 그림을 보면서 다시금 어린 시절을 돌아보게 되었다고 한다. 그 과정에서 저자는 어린 시절을 좀 더 낙관적인 시선으로 보고 어려서 알지 못했던 새로운 의미도 찾게 되었다고 한다.
결국 어린 시절 기억의 편린과 명화의 이미지를 함께 보는 버릇이 생겼고, 이런 책으로도 나오게 되었다.
저자는 사라져가는 자신의 기억을 아름다운 그림과 함께하는 되살려 기억의 보물창고를 만든다.
그곳에는 케테 콜비츠의 <죽음의 위로>도 있고, 클로드 모네의 <생 라자르 역>도 있다.
그림 보는 눈도 열어 주는 책
이런 신선한 시도에 이끌려 이 책을 펼치면 다음에는 깔끔한 그림 해설에 사로잡히게 된다.
클로드 모네의 <생 라자르 역>에 대한 설명을 예로 들어 보자.
저자는 이 그림이 화가가 파리의 기차역에서 발견한 개인적인 인상을 담은 것이라고 설명한다. 이 그림에서 사물의 고유한 색채는 찾아보기 어렵다. 모든 대상은 청색과 밤색의 단 두 가지 색조로 환원된다. 형태도 뚜렷한 윤곽을 잃은 채 흐물흐물 대기라는 용광로 속에서 녹아 해체된 것처럼 보인다고 설명한다.
결국, 이 그림은 유리 지붕 아래로 쏟아지는 햇빛과 그 위의 맑은 하늘, 그리고 역동적인 기관차가 뿜어내는 연기의 충돌로 빛어진 대기의 변화무쌍한 인상에 주목한 작품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설명은 그림의 인상을 명확하게 설명해 주었다. 모네의 그림은 전에도 본 적이 있고, 해설도 본 적이 있지만, 이 책만큼 명쾌하게 마음에 쏙드는 설명을 접하지는 못했다.
칸딘스키의 <즉흥6-아프리카>에 대한 설명도 인상적이었다. 전통적인 회화 원리에서 벗어나 색채 추상이 시작된 그림이라고 설명한다. 사물이 구체적인 형상을 상실하고 추상적인 색채의 면들로 전화되어 가는 순간을 포착한 것이다. 물론 이런 설명은 일반 미술책에서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책은 이런 설명 전에 저자의 개인적인 경험, 즉 놀이공원에서 겪은 일을 연결시켜서 가슴에 와 닿는 설명을 만든다.
그 외 기리코의 <거리의 우울과 불가사의>, 앙리 마티스의 <음악>, 그로츠의 <사회를 지탱하는 사람들> 등에 대한 설명도 명쾌하다. 저자가 지닌 그림을 읽어내는 눈이 참으로 뛰어나며, 그것을 매우 쉽게 설명하는 것이 이 책의 또다른 커다란 매력이다. 마치 내가 그림을 보는 눈이 성장한 듯한 착각마저 주는 책이다. 짧은 글이지만, 많이 배운 듯한 뿌듯함을 준다.
그런데 아쉬운 점은 어릴 적 이야기가 단순 소재로 머무는 것이다. 어렸을 때 메뚜기 볶음을 싫어했다는 얘기를 하고, 이어서 메뚜기가 있는 초충도를 보여 주는 글에서 특히 그러했다. 어린 시절의 경험과 그림 해설이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있지는 않은 것이다. 이런 약간의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글 읽는 재미와 그림을 보는 눈을 열어 주는 이 책의 매력은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