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2호에서는 303호 여자가 보인다
피터 스완슨 지음, 노진선 옮김 / 푸른숲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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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터 스완슨의 전전작 '죽여마땅한 사람들'을 너무 흥미롭고 재미있게 보아서 그런지 이번 신작은 생각보다는 그리 흥분스럽지는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순식간에 읽히는 그의 글빨에는 감탄을 금할 수 없다.


영화 착한 넘 나쁜 넘 이상한 넘 처럼 이 책은 착한 넘은 없지만 순진한 넘, 이상한 넘, 나쁜 넘으로 넘쳐난다.


영화나 소설이나 현실에서나 그렇듯 순진한 넘과 이상한 넘은 그래도 고칠 수 있지만 나쁜 넘은 고칠 수 없다. 마치 외계에서 굴러 들어온 병처럼 말이다. 지구상에서는 해결불가능하다고 할까.

(물론 여기에서 나쁜 넘은 사이코패스.)


이 책 '312호에서는 303호 여자가 보인다'(사실 책 제목도 미스인듯, 개인적으로는)는 영국에 사는 케이트가 미국에 사는 6촌 친척 코빈의 집에 반년간 서로 집을 교환해서 살기로 하면서 시작된다.

끔찍한 과거(이넘은 나쁜넘이자 이상한넘) 때문에 불안증세를 가지고 있는 케이트는 코빈의 집에 도착하자마자 이웃집 여자가 실종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결국 이웃집 여자가 살해된 채 발견되면서 케이트를 둘러싼 세계가 다시 악몽으로 변한다.

이웃집 여자의 집열쇠가 코빈의 집에서 발견되고, 호감을 가지게 된 앞동의 남자집에서는 살해된 이웃집 여자의 집이 훤히 들여다보이고, 이웃집 여자의 옛날 남친이라면서 케이트에게 코빈이 의심스럽다면서 맴도는 남자까지.

게다가 불안증세로 인해 케이트는 자신 주위의 환경이 무언가 달라졌다는 생각이 있지만 그런 의문을 그저 자신의 불안증세로 치부하지만 점차 모든 이들을 의심스러워한다.

과연 케이트는 과거를 극복하고 행복해질 수 있을까?


나는 개인적으로 케이트의 사촌 코빈이 불쌍했다. 첫 단추가 잘못되었다고 할까? 그의 어린시절과 성장과정이 궁금했지만 간략하게만 나왔고, 무심하다 못해 냉정한 코빈의 어머니와 동생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친구 따라 강남간다, 라는 말이 있듯이 정말이지 친구는 잘 사귀어야 한다. 하지만 뭐 그게 말처럼 쉽게 되겠는가? 우리에게는 먼 미래를 볼 수 있는 눈을 가진 것도 아니고, 사람의 마음 속을 들여다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결국 의심스럽거나 궁금하면 솔직하게 물어볼 것, 이것밖에 없는 것 같다. 혼자서 삽질하지 말고.


다양한 캐릭터들과 사건을 끌고가는 힘과 여러가지 시선의 교차점으로 인해 긴장감을 늦추지 않고 재밌게 쓰여진 소설이라고 생각한다. 역시나 다음번에도 이 작가분의 책을 읽을 만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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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로 세상을 움직이다 지혜의 시대
김현정 지음 / 창비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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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였을까? 내가 뉴스를 안믿게 되었을때가.


생각해보면 처음 라디오와 텔레비전을 접했을때, 그리고 잡지(초등학교때는 보물섬과 어깨동무 두 가지가 있었다)를 접했을때 그 속에 나오는 모든 것들을 믿었다.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 할지라도 말이다. 마치 무슨 교리처럼(종교인은 아니지만), 맹목적으로 교과서를 믿었던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고등학교때부터 나의 이런 믿음은 조금씩 금이 가더니 대학에 들어가고 나서 완전히 박살났다.

눈 뜨고도 코 베어간다는 말이 적절할 것이다.

은폐와 세뇌, 이 두 가지만 있으면 누군가를 속인다는 것이 얼마나 쉬운일인지.

이번 추석때 시골 집에 갔을때도 나는 어머니와 작은 다툼이 있었다. 카톡으로 발송되는 가짜 뉴스와 어르신들 사이에서 돌고 있는 유튜브 가짜뉴스에 속아 넘어가신 것을 보고는 가슴이 답답했다.(사람들은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싶어하고, 듣고 싶은 것만 듣고 싶어한다. ㅜㅜ)


이제 뉴스와 정보는 수많은 가짜들 속에서 적은 진짜를 찾아내는 무슨 보물찾기가 되어버렸다.


[지난 평창동계올림픽에 출전한 북한 선수들이 선수촌에 입촌했는데, 방에 들어가자마자 창밖으로 큰 인공기를 걸었다고 사진이 보도되었습니다. 그 사진을 보고 저도 처음에는 뜨악했습니다. '아니, 굳이 저렇게 커다란 인공기까지 걸 필요가 있나?'하는 생각이 들었지요.

다음날 다른 사진을 발견했습니다. 북한뿐 아니라 다른 나라도 전부 자기 방 창밖으로 국기를 건 것입니다. 수많은 국기 중 인공기도 걸려있었던 것뿐이지요. 인공기를 강조해서 촬영한 기자가 거짓말을 한 것일까요? 아니지요. 그 기자는 사진의 프레임 안에 인공기만 담았을 뿐입니다. 하지만 그 사진만 본 우리는 북한이 인공기를 걸며 갈등을 일으키려고 하는 것이 아닌가 의심을 품게 마련입니다.

이처럼 인위적으로 조작하거나 연출된 사진을 찍지 않는 이상 뉴스로 보도되는 사진은 분명히 '사실'입니다. 그러나 사진을 볼 때 우리가 이해한 '사실'이 과연 '진실'인지를 물어야 합니다. 사진은 단 한 컷, 프레임 안에 들어온 장면으로만 이야기합니다. 맥락에 대한 이해 없이 한 장면만으로 모든 진실을 알 수 있다는 생각은 위험한 착각입니다. 한 컷의 전후 상황과 프레임 바깥에서 벌어지는 일을 파악함으로써 단순한 '사실'이 아닌 종합적인 '진실'에 다가갈 수 있도록 뉴스를 보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p 56~57 중에서

팩트체크라는 말이 나올 지경에 이르렀다. 전세계적으로 가짜뉴스와 악의적인 프레임으로 인한 조작은 사실 진실을 떠나서 사람과 사람 사이를 '의심'과 '혐오', '증오'로 채워버린다.

거짓말도 처음에는 믿지 않지만 세번만 하면 그 거짓말이 진실이 된다는 말이 있다.

그만큼 사람은 속이기 쉬운 존재라는 뜻일지도 모른다.

그저 어리석기 때문에 속는다고는 하지 말기를. 의도를 가지고 사람을 속이려들면 그 어떤 이라도 속을 수 있다. 그래서 이상한 사이비 종교에 속아넘어가는 많은 이들이 학력도 높고 사회적 지위도 높은 이들이 많다는 사실은 이런 것을 반증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렇게 넘쳐나는 거짓과 조작된 뉴스 속에서 우리는 과연 어떻게 '진실'을 바라볼 수 있을까?


[여러분, 뉴스 프레임 밖으로 탈출해야 합니다. 뉴스를 의심하고 비교하며 날 것 그대로 보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사건의 전모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는 것은 어쩌면 너무 멀리서 건성으로 보고 들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단순한 '사실'이 아닌 '진실'에 더 다가서려는 노력, 프레임 밖에는 뭐가 있을까 의심해ㅗ는 수고가 필요합니다.]

                                                       -p 97 중에서


결국 우리 스스로가 노력할 수밖에 없다. 똥이 무서워서 피하는 것이 아니라 더러워서 피했던 우리지만 이제는 더이상 더럽지 않는 곳이 없으니 치워야 하지 않을까?

진실을 보는 것을, 찾는 것을 게을리 하면 결국 우리는 지난 번처럼 똑같이 땅을 치며 피눈물을 흘리며 후회할 것이다. 되돌리고 싶어도 이미 간 시간은 되돌릴 수 없는 것이다. 역사는 절대로 뒤로 가지 않으니까.


기레기, 기레기 하면서 우리는 그저 뉴스를 프레임 밖으로 꺼내지 않고 그들의 의도대로 읽는 것은 아닌지(사실 뉴스제목만 훑는 경우가 많다. 그 뉴스 속은 다른 내용임에도 불구하고 뉴스 제목을 의도적으로 정하는 경우가 많다. 마치 보험회사 약정처럼 말이다. 나중에 알고 보면 제대로 안읽은 소비자가 잘못인 것처럼 말이다.), 항상 비판의 시각과 넓은 시각, 다양한 시각을 가져야한다. 그게 말처럼 쉽지는 않겠지만.

읽은 것이 쉽지 않다면 적어도 괜찮은 텔레비전 뉴스프로그램이나 라디오 프로그램을 청취하기를 권한다.


이제는 제발 '팥'으로 메주를 쑨다고 아무리 말해도 '콩'이 아닌 이상 믿지 말자. 그리고 이제는 말하자. '거짓말'도 적당히 좀 하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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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인칭 관찰자 시점 - 2018년 제14회 세계문학상 우수상 수상작
조경아 지음 / 나무옆의자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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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모테오는 알고 있었다. 식복사 사건을 목격했던 나와 학장님이 자신의 사제 서품을 가장 강력하게 반대했다는 것을. 또한, 반대한 이유가 자신이 연쇄살인범 강치수의 아들이기 때문이라는 것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디모테오는 사제의 길을 포기하지 않았다. 디모테오는 1년이 넘는 시간 동안 신학교에 남아 온갖 궂은 일을 다 하며 끈질기게 버텨냈다. 디모테오의 그런 집요한 노력은 결국 교구를 움직였고 그토록 바라던 사제 서품을 받을 수 있게 만들었다. 하지만 나는 그런 디모테오의 집요함이 더 끔찍하게 여겨졌다. 한쪽 방향으로 굳어진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기란 바다로 향하는 물줄기를 산으로 돌리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다. 오히려 잘해보려고 할수록 더 어긋나는 잘못된 퍼즐처럼.]

                                                                -p 37, 유스티노의 시점 중에서


어려움 끝에 디모테오 신부는 사제를 마치고 한 작은 시골마을에 신부로 임명된다. 하지만 잘생긴 외모때문일까, 그를 바라보는 사람들은 종교인으로서의 디모테오 신부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동경과 시기의 대상으로 그를 나누어 바라본다. 게다가 그는 연쇄살인범 강치수의 아들로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포커페이스의 유형이라 오해와 의심을 사기도 한다. 그러던 어느날 디모테오를 짝사랑하는 레오라는 여성신도가 성당 벤치에서 시체로 발견되고 일대 파문이 인다. 사람들은 연쇄살인범 아들 디모테오를 의심하는데 과연 디모테오는 그가 원하는 삶을 살 수 있을까?



어렸을 적에 작은 시골동네에서 살았더랬는데 그 동네에서 슈퍼를 하는 나름 부자집에 어여쁜 외동딸이 있었다. 나보다 한 학년 위였는데 시골 아이답지 않게 피부도 하얗고 키도 컸고, 긴 머리에 멜빵치마를 맵시있게 입고 다니고, 피아노도 잘 쳐서 아이들이 무척이나 부러워했고 동경의 대상이었다. 게다가 마을에서 유일하게 집안에 피아노가 있는 집이었으니(칼라텔레비전이 보급된지 얼마 안된 시점이었던 것으로 기억난다.).

그런데 어느날 이상한 소문 하나가 아이들 사이에 돌았다. 그 어여쁜 언니가 입양된 아이라는 이야기였다.

결국 소문은 사실이었고, 졸업하기 전까지 그 언니를 보는 아이들의 시선은 곱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마치 니가 그렇게 잘났어도 넌 입양아지만 자신은 친부모 밑에 있다는 식의 눈빛. (사실 나는 사정상 이리저리 전학을 다녔던 상황이라 그 언니가 나중에 어떻게 되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나중에 그 시골로 다시 전학을 갔을때는 그 집이 이사를 했다고 들었다.

지금은 세상이 많이 달라졌다고 하지만 그 시절에는 '고아'에 대한 시선과 '입양아'에 대한 시선은 상당히 안좋았다. 그저 불쌍한 아이를 넘어서는 거부반응이라고 해야할까. 사실 같은 또래 아이들은 그런 편견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지만 부모들에 의해서(저 애랑 놀지 말라는 명령) 편견을 가지게 되는 경우가 허다했다.

게다가 무슨 사건이 일어나면 그 넘의 가정환경은 왜 그렇게 들먹이는지, 마치 사고치고 다니는 사람이라면 모두 고아거나 부모가 이혼해서 한부모 가정이어서 제대로 가정교육을 받지 못했다고 못을 박는 언론들도 문제였다.

여튼 이러한 선입견과 잘못된 편견으로 얼마나 많은 이들이 고통 속에 몸부림쳤을지를 생각해보면 누군가를 바라볼때 우리는 그저 자신과 같은 붉은 피가 흐르는 그저 한 인간이라는 사실을 잊는다.

쉽게 상처받고, 쉽게 무너지는 그런 연약한 존재인 인간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조경아의 '3인칭 관찰자 시점'은 악랄한 연쇄살인범 강치수의 아들인 디모테오 신부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관찰일지로 이루어졌다.

어떤 이에게는 상처받는 존재로, 어떤 이에게는 악랄함을 감춘 가식적인 인물로, 어떤 이에게는 자상한 인물로 비춰지는 디모테오.

과연 우리는 이 책을 읽고 난 후에 디모테오, 그를 어떤 시각으로 바라볼까?


맨 처음과 맨 끝의 시점으로 작가는 사이비종교(일명 도를 아십니까?)를 전파하는 도팔의 시점을 영리하게 배치시켜 놓았다.

맨 처음에 도팔은 디모테오 신부에게 종교를 전파하려다 사람보는 눈이 없다고 면박을 당하고, 맨 끝으로는 형사에게 종교를 전파하려다 은팔찌를 차는 지경에 이르며 이렇게 이야기한다.

신부의 말대로 자신은 사람보는 눈이 더럽게 없나보다, 라고 말이다.


열 길 물 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고 했다. 그만큼 우리는 누군가를 안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살면서 깨닫지 않는가.

유명한 유행가 가사에도 이렇게 나와있지 않은가.


내가 나를 모르는데 넌들 나를 알겠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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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랑 - 김충선과 히데요시
이주호 지음 / 틀을깨는생각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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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처음 김충선이라는 인물을 알게 된 것은 모 방송국 프로그램에서였다. 임진왜란 중에 항왜(일본인으로서 조선에 귀화한-실제 그 시대에 항왜한 일본인이 1만여명이 넘었다고 한다. 과연 그들은 왜 귀화했고, 어디에서 무엇을 하며 어떻게 지냈을까?)라고 불리우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도 충격적이었는데 임진왜란 중에 혁혁한 공을 세워 임금(선조)으로부터 김충선이라는 이름을 하사받고 조선을 지키고, 후에는 후학들을 가르쳤다고 하니  놀라울 따름이었다.

하지만 독특한 이방인이었던 탓일까? 역사적으로는 김충선, 일본이름 사야가에 대한 기록은 별로 없다고 한다.

우리나라 입장에서는 아무리 귀화했다고 하더라도 일본인이 조선인보다 뛰어나고 자신들의 나라를 지켰다는 그런 어마어마한 업적을 치적하고 싶지 않고, 기록해놓기도 싫었을테고 일본 입장에서는 자신들을 배신하고 적국을 위해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으니 당연히 그 이전의 기록조차 파기했을 듯 싶다.

이런 김충선, 사야가는 어찌보면 평생 외로운 이방인의 삶을 살지 않았을까?

과연 그는 왜 조선으로 귀화했을까?


이주호 님은 역사적 사실과 소설적 허구를 적절히 섞어 김충선의 이야기를 써내려갔다.


김충선은 사실 조선인이었으나 부모의 사정으로 인해 일본 용병의 손에 맡겨져 일본에서 자라났다. 자라난 곳이 일본의 용병부대이다보니 자연스레 히로(여기에서는 김충선이 히로라고 불리운다. 나중에 사야가로 불리우고, 귀화한 후 김충선으로 불리운다.)도 용병부대원으로 길러진다.

격동의 시기(오다 노부나가와 히데요시의 시대)에 너무도 뛰어난 능력을 가진 히로는 아무리 조용히 사랑하는 이 아스카와 평범하게 살고자 해도 시대는 그를 내버려두지 않는다.

그래서 영웅은 스스로가 영웅이 되는 것이 아니라 시대가 만드는 것이라고 하지 않는가?!


'역랑'은 김충선의 삶을 항왜 이전의 삶을 중심으로 써내려갔다.

파란만장한 그의 삶은 처음부터 이방인의 삶이었다.

어쩌면 자신이 살아야 할, 살아가야 할 '답'이 필요했기 때문에 운명을 거스르고 맞섰는지 모른다.


연인인 아스카가 히데요시의 볼모로 잡혀있어 히로는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히데요시의 조선침략에 가담한다.

수없이 죽어가는 조선의 백성들을 보며 히로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다시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계속해서 조선의 백성들이 몰려들고 있었다. 히로는 그들의 얼굴과 표정, 분노, 슬픔을 보았다. 조선이 무엇이기에 저렇게 목숨을 헌신짝처럼 버린단 말인가. 임금이 무엇이기에 저토록 충정을 보인단 말인가. 만약에 일본에서 이런 일이 벌어졌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백성들이 목숨을 버리지도 않았을 것이고 선조처럼 나라를 버리고 도망간 다이묘가 있다면 백성들에게 잡혀 목이 잘렸을 것이다. 더 이상 다이묘의 권위를 가지지 못할 것이었다.

히로는 문득 깨달았다. 점점 거리를 좁혀 오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깨달았다. 힘이 없어 이렇게 침략당하고 있지만 이들은 힘이 없지 않았다. 이들은 누구보다 강한 자들이었다. 누구보다 강한 백성들 위에 누구보다 비겁하고 위선적인 정치가들이 있어 이리도 비참하게 짓밟히고 있는 것뿐이었다.]

                                                         -313~314 페이지 중에서 발췌


[백성이 있어야 나라가 있고, 나라가 있어야 임금이 있다. 그래서 충은 임금을 향해 하는 것이 아니라 백성을 향해 하는 것이다.]

라는 이순신 장군의 말씀.


아마도 히로의 마음도 이순신 장군의 마음과 같지 않았을까?

백성인 자신들의 삶을 좌지우지하는 권력자들의 욕망에 진절머리를 내지 않았을까? 그래서 그는 나라를 지키려는 것이 아닌 자신들의 삶의 터전을 짓밟는 왜군에 대항하는 백성들을 보며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을까?

(그들의 입장에서는 전쟁은 군인들이 하는 것이지 무기도 들어보지 못한 평범한 백성들이 하는 것이 아니었으니까.)


아쉬웠던 점은 히로가 항왜를 결심하게 된 동기에 대해서 분량이 너무 적은 점이었다. 그리고 차라리 히로가 조선인이라는 설정보다 일본인이라는 설정이 더 좋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인간' 김충선에 대해서 달리 생각해볼 계기가 되지 않았을까 한다.


광해, 왕이 된 남자(영화를 너무 재미있게 보았고, 이런 설정도 너무 좋았다)를 쓰신 이주호 님의 '역랑'.

쓰여지지 않은 역사의 한 페이지를 읽는 느낌이었다. 역사의 뒷편을 읽고 싶은 이들에게 추천하고 싶다.


다시 한번 느끼지만 역사는 권력자에 의해서 쓰여지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하찮게 여기는 무지렁이 백성들에 의해서 쓰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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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정의
아키요시 리카코 지음, 주자덕 옮김 / 아프로스미디어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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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읽는 내내 아휴, 나같으면 저런 여자랑은 상종을 안한다.라고 할만큼 질색인 성격인 여자를 중심으로 벌어지는 이야기.

이 세상엔 '절대'가 없다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닫게 해준다.

동양사상에서 가장 중요시 여기는 것은 극과 극이 아니라 '중용'이다.

쉬운 말로 '적당히'.

대충대충이 아니라 어떤 것에 대해서 절대적인 잣대가 아니라 유연성을 가진 잣대가 필요하다는 말씀.

하지만 유연성이라고는 개미똥구멍만큼도 없는 그녀에게 친구들은 점점 지치고 마는데.


정의는 누가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서 양날의 검이 되어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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