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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후의 반역 - 광해군대 대비폐위논쟁과 효치국가의 탄생
계승범 지음 / 역사비평사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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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못된 문제 설정과 명백한 내용 오류가 돋보이는 책. 효와 충을 각각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에 할당할 수 있을까? 같은 논리라면 순 임금은 나라도 내팽개친 '효치국가'의 상징인가? 충과 효라는 유학적 개념은 이 책의 핵심 줄기인데, 정작 유학 담론에 대한 이해는 대단히 얕아 보여 많이 아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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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트 - 인공지능에게 대체되지 않는 나를 만드는 법
이지성 지음 / 차이정원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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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성이 쓴 책의 특징은 아무 자료나 긁어 모은 수준이라는 거다. 깊이 있는 성찰과 분석 따위는 찾아볼 수 없다. 결국 그의 책은 출세를 위한 방법을 가르쳐준다며 약을 파는 것인데, 그야말로 전형적인 사기꾼의 수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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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들은 우리 옆집에 산다 - 사회적 트라우마의 치유를 위하여
정혜신.진은영 지음 / 창비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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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정과 사람 냄새로 가득한 책, 『천사들은 우리 옆집에 산다』




  속설에 “남자는 태어나 세 번 운다”는 말이 있다. 남자는 살면서 태어났을 때,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 나라가 망했을 때만 울어야 한다는 뜻이다. 물론 이 말의 출처는 분명하지 않다. 하지만 이 속설이 한국인의 입에 자주 회자한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대개 자신의 감정을 억누르는 데 익숙한 한국인의 특성을 잘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지난 1995년 미국정신의학회가 화병을 한국 특유의 문화적 현상으로 규정한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만큼 한국인이 자기감정을 다루는 데 서투르다는 의미일 것이다.


  이런 풍토에 살아가는 우리에게 ‘트라우마’라는 개념은 생각만큼 익숙하지 않다. 심리학에서 트라우마는 “재해를 당한 뒤에 생기는 비정상적인 심리적 반응”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트라우마는 외부의 충격으로 생겨난 마음의 상처이다. 이런 증상은 개인에게 나타나기도 하지만, 때로는 사회적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그런데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고 치유하는 데 익숙하지 않은 한국인은 개인적ㆍ사회적 트라우마 앞에서 한없이 무기력해진다. 정신적 상처에 대처하는 방법도 모른 채, 그것을 온전히 홀로 감당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는 이미 세월호 참사 이후 분명하게 드러났다. 우리는 세월호의 비극이 남긴 트라우마 앞에 “잊지 않겠다”는 강박과 “이제 그만하라”는 외면으로 대응했다. 물론 참사 이후 사회구조적 대안이 쉼 없이 제시되고 있지만, 세월호가 남긴 트라우마를 어떻게 어루만질까 하는 논의는 여전히 부족하다. 그런 점에서 ‘세월호 트라우마’는 여전히 우리에게 남겨진 숙제다.


  우리는 어떻게 사회구조적 접근에 갇히지 않고 세월호 참사로 상처받은 이들의 마음까지 어루만질 수 있을까. 시인 진은영 씨와 정신건강전문의 정혜신 씨의 대담집 『천사들은 우리 옆집에 산다』(창비, 2015)는 이런 고민의 산물이다. 대담을 진행한 진은영 씨는 책머리에서 이렇게 말한다. “지금 눈앞에 펼쳐져 있는 이 많은 고통의 문제들이 신이나 불운의 탓이 아니라 우리가 사회적으로 만들어낸 상처임을 인정하는 것, 그렇기 때문에 멈출 수 있음을 아는 것, 이것이 사회적 트라우마를 치유하는 첫걸음이다.”


  이 책은 세월호 유가족들이 겪는 심적 고통을 섬세하게 보여준다. 자본과 국가에 의해서 삶이 파괴된 그들에게는 잘 먹고, 잘 입고, 잘 자는 일상조차 ‘금기’가 되었다. 대신 슬퍼도 슬퍼할 수 없고, 아파도 아파할 수 없는 고통이 그들의 삶이 되었다. 그러나 우리는 언젠가부터 세월호에 피로감을 느낀다. 그래서 이제는 그만 일상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말한다. “큰 고통과 불행을 속수무책으로 바라보아야만 하는 무기력한 우리 자신을 못 견뎌” 회피하는 것이다. 그러나 대담자 정혜신 씨는 그들의 고통을 어루만지는 일이 생각만큼 거창하거나 어려운 것이 아니라고 한다. 그녀가 내민 답은 간단하다. 그들이 갑작스럽게 희생된 아이들에 대해 사랑과 애도의 감정을 ‘완료’하게 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살다가 너무 슬플 때는 슬픈 쪽으로 핸들을 꺾어야 넘어지지 않습니다. 슬퍼야 할 때 슬프지 않으려 하면 반드시 넘어지게 되어 있어요. 무너지게 되어 있어요. 마음껏 슬퍼해야 합니다. 슬플 때 더 안정적으로, 더 편안히, 더 실컷 슬플 수 있도록 격려해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무너지지 않고 더 빨리 일상으로 돌아올 수 있어요.”


  그런데 과연 이것만으로 충분한 것일까. 지난 한국 현대사의 궤적을 따라가다 보면, 국가에 의해 삶과 일상이 파괴된 이들이 적지 않다. 독재정권에 의한 고문피해자와 희생자, 용산참사 피해자, 쌍용차 정리해고 노동자 등. 사회적 트라우마는 이미 한국 사회 곳곳에 깊숙이 형성되어있다. 심리치유센터 ‘와락’에서 이미 그런 트라우마들을 대면했던 정혜신 씨가 그것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해고노동자든 고문피해자든 세월호 피해자 가족이든 본질적 고통은 똑같습니다.” “자기 상처를 인식하고 인정해서 치유 받은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누구나 치유자가 될 수 있습니다.” 


  아울러 이 책은 트라우마를 치유하는 메커니즘의 핵심이 전문 의학과 위대한 사랑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보여준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고통 받는 이들이 삶의 본질을 성찰하여 일상을 회복하도록 하는 일과 그들의 고통을 이해하고 배려하는 간절한 마음이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인간이 원래 가지고 있었지만 살면서 잃어버린 온전성”을 되찾게 하는 일이다.


“삶의 최소한의 기본적인 것, 인간의 생존과 안정감을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것, 그렇지만 심각하게 훼손되어 있는 것. 그런 기본적인 것을 다시 구현함으로써 자기에게 무엇이 결여되어 있는지를 성찰하게 하고 삶의 본질을 다시 생각하게 하는 거죠. 그래야 건강한 삶으로 나아갈 수 있어요.” 


  결국 진은영 씨의 말처럼 대담자 정혜신 씨는 “이웃집 천사가 되기 위해 위대한 사랑이 필요하다고 강변하지 않았다. 다만 부서지기 쉬운 존재들이라서 우리가 서로 사랑할 수 있다는 것, 그래서 다가가고 사랑하는 일에도 배움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이 책의 미덕은 바로 이것이다. 이는 극심한 트라우마에 무력감을 느끼는 한국 사회에 새로운 길을 제시하고, 우리가 그 길을 포기하지 않도록 용기를 부여한다. 우리는 여기서 새로운 치유 공동체를 확장하고 뒤틀린 인간의 온전성을 회복할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천사들은 우리 옆집에 산다』는 온정과 사람 냄새로 가득한 책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은 창비의 ‘책읽는당’ 프로그램을 통해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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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무덤에 침을 뱉으마 (양장) - 합본 개정판
진중권 지음 / 개마고원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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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을 뱉으려면 똑바로 뱉어야


  소위 ‘진보논객’이라는 진중권은 자신의 책머리에서 이렇게 말한다.


<사실 박정희라는 사람, 별로 전문적으로 연구할 가치가 있는 인물이 아녜요. 이인화가 자랑하는 “박정희 철학”, 조갑제가 자랑하는 박정희의 “자주적 정치이념”, 그의 심오한 사상이란 게 알고 보면 일제 파시스트 철학을 그대로 베낀 거예요. 참고로 말하면, 학계에서 파시즘에 대한 검토는 이미 오래 전에 끝난 상태예요. 새로운 쟁점이랄 게 없어요.>


  우선 나는 그가 이렇게 말할 자격이 충분한 사람인지 의문이다. 박정희라는 사람이 정말 연구할 가치가 없는 사람인가. 나는 저런 말을 아주 쉽게 던지는 그의 태도가 아주 경솔하고 오만하다고 생각한다. 한국 현대사에서 박정희 시대가 얼마나 논쟁적인지를 안다면, 박정희라는 인물에 대해 연구할 가치가 없다는 말을 저렇게 간단하게 던질 수는 없을 것이다. 물론 박정희 시대 연구가 박정희 개인에 대한 탐구만으로 충분한 것은 아니지만, 박정희의 생각이나 정책결정과정을 배제하고 박정희 시대를 들여다볼 수 있을까? 설령 그렇다고 하더라도 저런 주장을 하려면 충분한 근거가 있어야 하지만, 그의 근거는 충분하지 못하다. 더욱이 파시즘에 대한 검토는 이미 오래 전에 끝나서 새로운 쟁점이랄 것이 없다는 말은 할 말을 잃게 만든다. 스스로 “철학계의 학생”이라고 말하면서도 그는 철학자로서 갖추어야 할 기본적 소양조차 갖추지 못한 듯 보인다. 


  왜 그가 던진 근거가 충분하지 못한가. 위에 인용한 글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는 소위 ‘우파논객’들이 말하는 박정희의 정치이념이나 철학이 일제의 극우 파시스트 정신을 그대로 이식한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것은 그야말로 무지의 소산이라고밖에는 말할 수 없다. 박정희가 60년 넘게 살면서, 그리고 18년이라는 긴 시간 집권하면서 과연 단일한 정치적 입장을 고수하였을까. 유신 이전의 박정희 체제와 유신 이후의 박정희 체제가 비록 권위적이고 강압적인 통치 스타일을 공유하고 있더라도, 양자를 단일한 것으로 치부하는 것은 부당하다. 만일 양자가 동일하다면 유신헌법 제정이라는 역사적 사건이 갖는 의미는 중요한 것이 아니게 된다. 다시 말해서 유신헌법 제정이라는 역사적 사건의 심각한 문제점을 제대로 부각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진중권은 과연 이런 문제에 대해 충분히 숙지하고 있을까. 책 전체의 내용으로 미루어보건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진중권의 발언은, 복잡한 변수와 맥락을 무시한 채 박정희의 정치적 입장과 일제의 ‘파시즘’을 아주 단순화하여 비교하였다. 그야말로 무지의 소산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다. 


  무엇보다도 내가 《네 무덤에 침을 뱉으마》를 읽으면서 심각한 문제라고 생각한 것은, 진중권이 자신의 텍스트 속에서 사용하는 개념들을 충분히 검토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2차 대전 당시 독일과 이탈리아, 일본의 특수한 현실을 고려하지 않은 채, 그저 동일하게 ‘파시즘’이라는 범주로 묶어내면서 그것을 박정희 체제와 단순 비교하는 것이 정녕 타당한가?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단순히 독재를 파시즘과 동일시하는 방식은 형편없는 발상이다. 진중권 말대로라면 전체주의나 파시즘이나 본질은 동일하기 때문에 스탈린이나 김일성 같은 사람들도 ‘파시스트’라고 말해야 옳은 것인가? 그런 점으로 미루어볼 때, 진중권이 파시즘과 전체주의의 개념을 혼동하고 있다는 사실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나는 이런 문제의 원인은 구체적이고 상세한 내용을 가지고 이야기하기보다는 단순히 외형의 유사성만 가지고 추상적 담론을 생산하려는 데 있다고 본다.


  물론 박정희 시대에 대한 정당화와 기념사업이 이루어지고 있는 현실 속에서 진중권이 이 책을 저술한 의도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의도만으로 형편없는 논리가 정당성을 얻는 것은 아니다. 그가 아무리 “이 책은 논문이 아니다. 난 이 책을 순문학으로 이해한다.”고 하지만, 인신공격과 조롱이 가득 담긴 천박한 어조로 형편없는 논리를 전개하는 이 책에 “관심 좀 가져” 줄 평론가가 몇이나 될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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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딩으로 리드하라 - 세상을 지배하는 0.1퍼센트의 인문고전 독서법
이지성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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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래 고전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상황 속에서 출판된 『리딩으로 리드하라』는 출판 이후 지금까지 베스트셀러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이 책이 오랫동안 베스트셀러로서의 지위를 유지해 온 이유를 ‘인문고전 독서를 강조했다는 점’에 있을 것이다. 이 책을 구성하고 있는 여섯 개의 장은 인문고전을 읽어야하는 이유와 인문고전이 독자들에게 끼치는 영향력, 그리고 인문고전 독법에 대한 저자의 견해를 담고 있는데, 이는 종합해보면 저자의 주장은 “인문고전을 읽어야 한다”는 것으로 결론이 내려진다.


저자는 이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나름의 논리를 제시하였고, 이 논리를 입증하기 위해 다양한 사례를 제시하였다. 그러나 나는 저자가 이 책에서 자신의 논리를 타당하게 전개해나가는 데 실패했다고 생각한다. 이 책의 여러 곳에서 추상적인 근거를 제시하고 있고, 자신의 근거를 합리화하기 위해 인용한 사례를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등 다양한 문제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먼저 이 책의 가장 큰 문제점은 고전과 비고전의 범위를 구체적으로 설정하지 않고 시작했다는 데 있다. 이지성은 “세상에는 두 종류의 책이 있다. 고전과 비고전.”(22면)이라고 언급하면서 고전을 “짧게는 100~200년 이상, 길게는 1000~2000년 이상 살아남은” “천재들의 저작”이라고 정의한다. 즉, 이지성이 이 책 전체에 걸쳐 말하는 ‘인문고전’은 수백 년, 혹은 수천 년 동안 존재해온 ‘천재’들의 인문학 저작을 의미하는 것이다.


하지만 사실상 이런 의미에서라면 고전과 비고전의 명확한 구분은 불가능하다. 우선 ‘천재’의 기준이 모호하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천재’의 기준은 사람마다 다르고 ‘천재’의 생각이 늘 타당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따라서 그들의 저작이 완벽한 저작이라고 단정할 수도 없다. 또한 책이 존재해 온 시간으로 고전의 기준을 설정한다면 이는 ‘고전’이 가지는 의미와 가치를 제대로 보여주지 못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단지 “짧게는 100~200년 이상”되는 책이 모두 충분한 가치를 가지는 책이라고 한다면,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같은 저서들은 오랜 시간을 살아남은 것이 아니라는 이유로 그것이 ‘비고전’이며 ‘고전’에 비해 가치가 떨어진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리고 고전이라는 것은 한 ‘천재’의 머릿속에서 한 순간에 창조된 지식을 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저작자가 살았던 당시의 다양한 저서와 지식의 축적 위에서 탄생한 것이다. 이 사실을 감안할 때 도서를 ‘고전’과 ‘비고전’으로 양분하여 전자에 더 우월한 가치를 부여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은 논리라고 생각된다.


앞서 언급한 것 처럼 이 책의 궁극적인 결론은 “인문고전을 읽어야한다”는 것이다. 그 근거로 저자는 인문고전이 가지고 있는 효용성을 제시한다. 인문고전이 가지는 효용성에 대한 저자의 강조는 다음의 인용문에서 잘 드러난다.



인문고전 독서는 두뇌에 특별한 기쁨을 가져다준다. ……인류의 역사를 만들어온 천재들의 문장 뒤에 숨은 이치를 깨닫는 순간 두뇌는 지적 쾌감의 정점을 경험하고, 그 맛에 중독된다. 그리고 서서히 변화하기 시작한다. 뻔한 꿈밖에 꿀 줄 모르고 평범한 생각밖에 할 줄 모르던 두뇌가 인문고전 저자들처럼 혁명적으로 꿈꾸고 천재적으로 사고하는 두뇌로 바뀌기 시작한다. …… 천재들의 생각하는 방식과 접촉한다는 자체가 중요했다.(20~21면)



위의 인용문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저자가 인문고전의 효용성으로 ‘삶의 변화’를 언급했다는 점이다. 이러한 저자의 주장은 일면 타당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글에서 우호적으로 서술하는 ‘변화한 삶’이 무엇인지 살펴본다면 저자의 주장이 어떤 점에서 문제점을 가지고 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서 언급하는 ‘변화한 삶’은 자신의 세계를 확장해나가고 자기 삶의 가치를 성장시켜 나가는 측면보다는 사회적 성공의 측면에 가깝다. 이 책에서 저자가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인용한 사례들을 살펴보면, 그는 인문고전 독서가 “세상을 지배한 0.1%”를 만든다는 것을 끊임없이 논증하려 했던 것을 알 수 있다.(그 논증이 성공적이라고 말하기도 어렵지만.) 뿐만 아니라 저자는 오히려 “당신이 이제껏 혁명적인 변화 없는 회사생활을 꾸려온 것은 당신의 삶에 이병철, 정주영 같은 수준의 인문고전 독서가 없었기 때문이 아닐까?”(147면)라며 사회적 성공을 거두지 못한 것을 인문고전 독서를 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라며 반문한다.


하지만 이는 결국 책의 주장을 “세상을 지배하는 0.1%가 되기 위해서 ‘인문고전’을 읽어야 한다”는 결론으로 귀결된다. 즉 인문고전 독서를 통해 ‘천재’처럼 사고함으로써 ‘천재’들처럼 ‘성공한 인생’을 살아야한다는 ‘위험한’ 결론으로 귀결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왜 위험한 결론일까? 나는 저자의 주장이 고전에 다양한 가치들이 내재되어 있음을 독자들에게 전달하지 못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는 고전 속에 내재된 다양한 가치를 발견하기보다 일방적으로 ‘천재들’과 같은 방식으로 고전을 읽어야한다는 것을 ‘강요’하는 결과를 낳는다. ‘인문고전 독서’를 ‘과외’에 비유를 하고 있다는 것은 고전에 대한 저자의 생각을 잘 보여준다고 할 것이다.(22~23면)


또한 이 책에서는 인문학의 자본주의적 효율성에 대해서 강조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고전의 다양한 해석 가능성과 의미를 무시한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인문학의 목적이 자본주의로 흘러가는 ‘위험한’ 결론으로 도달할 가능성이 크다. “최초의 철학자는 최고의 투자가였다”(111면)거나 “물론 철학 그 자체에만 매진하는 것은 경제와 별 상관이 없다. 하지만 철학으로 단련된 두뇌가 경제에 뛰어드는 순간 이야기는 달라진다”(112면)는 말은 그러한 위험성을 보여준다. 하지만 이 역시 인문고전의 가치와 의미를 자본주의 경제체제로 국한 시킨다.


그러나 고전이 다양한 해석과 의미, 가치를 가지지 못한다면 그것이 어떻게 고전으로서의 의미를 가질 수 있으며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줄 수 있을까? 나는 이 부분에서 저자의 생각에 동의할 수 없다. 뿐만 아니라 ‘누군가의 지배를 받지 않기 위해 인문고전을 읽어야 한다’는 논리를 전개하며(35면) 인문고전을 어떤 특권층의 ‘소유물’로 간주한다는 점에서 나는 저자의 생각에 결단코 동의할 수 없다.


앞서 내가 비판한 내용들을 언급하지 않더라도 이 책은 여러 문제점을 가진다. 우선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인용한 사례들을 정확하게 분석하지 않아 인과관계가 올바르지 않고, 근거도 제대로 제시하지 않은 경우가 많다. 또한 성급하게 사례들을 일반화하거나 내용이 모순되는 경우도 있다. 가령 아랍 문화권이 과거에 유럽 문화보다 우수했던 것은 아랍인들이 인문고전을 읽었기 때문이라거나(40면), IMF를 만든 사람보다 인문고전을 더 많이 읽은 경제학자가 한국에 있었다면 한국이 IMF 위기를 겪지 않았을 것이라는(115면) 저자의 언급은 이러한 사례에 속한다. 뿐만 아니라 이 책은 다양한 사례들을 인용하였으면서도 그 출처를 정확하게 밝히지 않아 사례의 진실성에 의문을 가지게 하였다. 게다가 각 장마다 자기 완결적인 내용을 다루고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장이 서로 비슷한 주장과 논리를 담고 있기 때문에 글의 형식적인 측면에서도 문제를 가진다.


이 책은 “어떻게 이런 책이 베스트셀러인가?”하는 의구심을 자아내기에 충분한 책이다. 위의 다양한 점들을 살펴볼 때, 저자는 이 책에서 다양한 사례들을 통해 자신의 주장을 입증시키려고 하였지만 실제로 자신의 주장을 논리적으로 뒷받침하지는 못하였다. 오히려 이 책은 “인문고전을 읽어야 한다”는 저자의 생각을 독자들의 감성에 호소하여 전파하고 있다. 하지만 저자는 고전을 읽어야만 하는 이유를 자본주의적 효율성에서만 국한함으로써 고전이 사람들에게 끼칠 수 있는 다양한 영향들을 보여주지 못하였다. 요컨대 이 책은 고전이 지닌 다양한 의미를 보여주지 못한 채 독자들에게 “리더의 삶을 살기 위해” 인문고전을 읽어야 한다고 호소하고 있다. 나는 이 책이 강조하는 “고전 읽기”의 중요성은 이해하지만 그 부실한 논리와 사례에는 설득되지 못하였다. 정말 출판사 이름답게 한 편의 ‘문학작품’을 본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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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jinyyeop_n 2015-05-15 02: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와 느낀게 정확히 일치하고 있어서 신기하고, 그것을 글로 적었다는것에 놀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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