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움가트너
폴 오스터 지음, 정영목 옮김 / 열린책들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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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움가트너는 그의 서재 책상에 앉아있다.
오늘은 동생에게 전화를 하기로 한 날이고, 또 무슨 일을 해야하더라.. 적막이 흐르는 집에서 일상을 보내며 그저 해야할 일들을 해내지만 어쩐지 오늘은 일찍부터 스토브 위의 낡은 알루미늄 냄비로 시선이 가고 말았다. 저 냄비는 ‘그때’를 떠올린다.

‘환지통’
10년전 아내가 갑작스럽게 죽었다. 한 번만 더 물 속에 들어갔다 오겠다던 그녀는 별안간 바다 속으로 침몰해 버렸고, 이 갑작스러운 죽음은 그대로 바움가트너의 가슴에 커다란 생채기를 남겼다. ‘당장이라도 불이 붙어 그 자리에서 완전히 타버릴 것만 같은’ 고통이었다. 어떤 경고도 없이, 어떤 신호도 없이. 하루 아침에 아내의 존재가 없어졌다. 환지통. 이미 없어졌지만 마치 있는 것 처럼 느껴지는 감각. 고통. 아픔. 그리움.

이야기는 바움가트너의 평범한 어떤 날을 시작으로 그의 생각에서 뻗어나가는 다양한 사고의 확장이 여러 인물들에 대한 회상으로 바뀌고 그들의 고유한 추억 속에서 과거의 시간과 현재의 시간이 끊임없이 교차하며 아내의 죽음 이후에 그가 깨달은 삶에 대한 이야기를 조용하게 이어간다.

에피소드마다 다양한 인물이 등장하는데, 물론 대부분은 그의 아내 애나와의 추억을 회상하는 것이고,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 어머니의 할머니, 동생, 우편배달부, 수도 검침원… 수 많은 등장인물들의 이야기가 서로 촘촘하게 얽혀있으면서도 어색한 부분없이 유려하게 흘러가는 것이 인상적인 독서 경험이었다. 나는 폴 오스터의 글이 처음인데 이런 분위기의 글이 그의 대표적인 이미지는 아닌 것 같지만 이 글을 쓰던 당시 작가의 나이, 상황 등에서 이제는 많은 것을 내려놓고 어쩌면 본인조차도 이 글이 마지막임을 알고 써내려간 글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시종일관 주변의 삶을 정리하는 시선이 느껴졌고, 그래서 더 아팠다.

아무도 없는 집안의 적막을 깨고싶어 아내의 서재에 들어가 하릴 없이 타자기를 두드리던 그는, 그곳에서 아내가 남긴 시와 에세이, 번역, 그와 주고받았던 편지 등 그녀가 남긴 수백 편의 글 속에 파뭍혀 다시 한번 세상 속으로 걸어들어갈 용기를 갖게 된다. 아내의 글이 그를 영원한 침묵과 슬픔의 소용돌이 속에서 꺼내어준 셈이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그들은 여전히 연결되어 있고 다시금 활기를 되찾아 무언가 시작될 것 같은 찰나에 이야기는 끝을 맺는다.

폴 오스터는 그렇게 무언가 시작될 것 같은 끝을 보여준다. 이야기는 끝이 나지만 그 안에서 바움가트너는 여전히 삶의 여정을 계속하고 있다. 사라지지 않을 기억 속에서, 누군가에게 기억되고 글로 남겨지고 사유가 되고 이야기가 되어. 이 글이 그의 마지막인 것이 너무나도 당연한 것 처럼 글이 끝났다. 바움가트너는 폴 오스터의 ‘작별 인사’가 되었다.

+ 문장들

그녀는 어떤 것도 학신하지 못한다, 그녀는 그렇게 말한다. 하지만 그녀가 이런 이해할 수 없는 내세의 삶, 의식적 비존재라는 이 역설적 상태를 계속 유지하게해주는 존재는 그라고 생각한다. 이런 상태는 언젠가는 끝날 것이다, 그녀의 느낌으로는. 하지만 그가 살아있고 그녀에 관해 계속 생각할 수 있는 한 그녀의 의식은 그의 생각에 의해 깨어나고 또 꺠어날 거이며 심지어 가끔 그의 머릿속으로 들어가 그의 생각들을 듣고 그의 눈을 통해 그가 보는 것을 볼 수 있다. | 76

외로움은 사람을 죽여요, 주디스. 그건 사람의 모든 부분을 한 덩어리씩 먹어 치우다 마침내 온몸을 삼켜 버려요. 다른 사람들과 연결되지 않은 사람에게는 삶이 없는 것과 같죠. 운이 좋아 다른 사람과 깊이 연결되면, 그 다른 사람이 자신만큼 중요해질 정도로 가까워지면, 삶은 단지 가능해질 뿐 아니라 좋은 것이 돼요. | 123

이것은 바움가트너에게 인간의 역사에서 벌써 몇 번째인지는 모르지만, 우리 모두 서로 의존하고 있고 어떤 사람도, 심지어 가장 고립된 사람이라 해도,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는 생존할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해 주는 일일 뿐이었다. | 171

운도 맞지 않고, 때도 맞지 않고, 뭐가 됐든 다 맞지 않았지만 어쨌거나 놓쳐버린 기회들이 괴상하게 쌓여 갔다. | 223

이제 세부적인 것은 기억에 없지만, 한 가지, 어딘가에서 차를 세우고 피크닉 점심을 먹었던 일, 모래가 많은 땅에 담요를 펼치고 애나의 아름답게 빛나는 얼굴을 건너다보았던 일은 떠오른다. 그때 그는 강렬한 행복감이 큰물처럼 밀려오는 바람에 눈에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고, 자신에게 말했다. 이 순간을 기억하도록 해, 얘야, 남은 평생 기억해, 앞으로 너한테 일어날 어떤 일도 지금 이것보다 중요하진 않을테니까. | 242


(도서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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