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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의 마치
정한아 지음 / 문학동네 / 2025년 2월
평점 :
‘이마치’는 예순살의 배우다.
3월에 태어나 ‘마치’라고 이름지어진 그녀는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본명을 고수하며 아버지가 지어준 이 특별한 이름으로 배우로서의 명성을 쌓아간다.
평소와 다름없는 아침,
몸무게를 재어보니 밤 사이 어떻게 4kg이나 늘어난 것인지 의아했다. 병원 예약 시간에 맞춰 택시에 올라탔는데 이번엔 가방이 텅 비어있다. 지갑, 선글라스, 핸드폰 아무것도 없는 가방을 들고 요금 낼 궁리는 하던 중에, 택시기사는 때마침 이마치의 오랜 팬이라며 알은 채를 한다. 그리고 요금 대신 싸인을 해달라며 지폐 한 장을 내민다. 어느 것 하나 평범하지 않았던 날이었다.
촬영 중에 문득 대사가 생각나지 않거나,
길을 잃고 헤매는 증상이 잦아지면서, 마치는 알츠하이머를 의심하게 되고, 알음알음으로 저명한 뇌과학자 ‘제제’를 찾아가 기억을 재생하는 치료을 시작하게 된다. ‘기억 수집 및 재현’을 통해 과거로 돌아가 뇌를 자극하여 그 기억이 더 오래 남도록 하는 치료법이다.
그런데 그녀가 돌아간 과거는
늘 어딘가 뒤틀려있고, 현실에 고문당한 채 가까스로 숨쉬고 있는 그녀가 있을 뿐이다. 마치의 의식 속에는 도대체 어떤 시간이 새겨져 있는 것일까.
VR속의 가상 세계인지 현실 세계인지
뒤죽박죽 섞여버린 그곳에서,
이마치는 12월에 태어났으나 곧 죽어버릴지도 몰라
3월이 되어서야 호적에 이름이 올려진 아이,
일흔이 넘은 나이에 알츠하이머를 앓고 있으며,
지폐 위에 싸인을 해달라던 택시기사 고기석은
마치가 필요할 때마다 그림자처럼 마치 앞에
택시를 세우는 사람이었다.
- 정말 소중한 것은 잃어버리고서야 알게 되는 것 같아.
그래서 인생이 이렇게 슬픈 거야. 축축한 거야.
우울한 당신 곁에 나도 웅크리고 누워서 작고 단단한 당신의 등을 봐. 그리고 생각하지. 그래도 이렇게 당신 곁에 있을 수 있어서 좋다고. 모든 것을 잃었다고 해도 이것만은 정말 좋다고.
p113
“ 평생에 걸쳐 멸망과 재력을 그러쥔 배우, 이마치
세월의 흐름에 기억을 유실하기 시작한 그녀를 위해
인생 전체가 오롯이 담긴 특별한 세트장이 제작된다. ”
표지와 제목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마치 어떤 이야기가 흘러나오는 듯 하다. 어딘가 어긋나고, 희미해져가는 글자가 바로 책 속의 ‘마치’ 그 자체 같았다. 황혼으로 물드는 붉은 바닷가에서 파도가 철썩이고, 점점 옅어지고 조각난 채 부유하는 그녀의 기억처럼, 이 가여운 여자는 도무지 자신을 놓아주는 법이 없다. 고통의 손길을 스스로에게 뻗는 이 가여운 여자. <3월의 마치>는 어느 예순살의 여배우의 삶 속에 감춰진 상흔을 드러낸다. 치유되지 못한 채 곪아버린 상처는 그대로 마치의 기억이 되었고, 이 기억은 지리멸렬하게 그녀를 따라다니며 곪아버린 상처에 생채기를 낸다. 아물줄 모르는 고통은 늘 그녀의 발치에 머물지만 아무도 그 고통을 짐작할 수 없다. 타인의 고통은 결코 타인의 껍데기 바깥으로 새어나오지 못하니까.
사람은 누구나 나이가 들고 기억은 유실되며 마치 커다른 구멍 속으로 빨려들어가듯 세월 속으로 점점 사라져간다. 의식도, 신체도 내 것이었던 적이 없는 것 처럼 낯설게 변해버린다. 마치가 기억하는 자신은 이제 예순살의 배우이지만 그녀가 기억하지 못하는 현실 속에서 그녀는 이미 중증 알츠하이머로 투병중인 일흔이 넘은 노인이다.
흩어져가는 자신을 바라보며
드문드문 떠오르는 기억을
퍼즐 맞추듯 힘겹게 이어가며
마치는 푸른 바다를 바라보고 서 있다.
그녀가 꿈꾸는 이야기는 어떤 엔딩일지 궁금하다.
그래서 마치는 행복했을까, 평안했을까
그 끝이 하염없이 궁금했다.
+ 근래 읽었던 장편 중에 감히 최고라며. 저는 너무 좋았어요.
정한아 작가의 짜임새있는 탄탄한 글 ㅠㅠ
마치 <노트북>이 떠오르는 로맨스도 한 스푼 끼얹어 있고,
현실과 기억을 오가는 스토리라서 완독 후에 다시 앞으로 돌아가 한번 되짚어 보기를 추천해요. 마치의 기억을 따라가듯.
정한아 작가는 기가막히게 장면 장면 속에 어떤 흔적을 남겨둬요. 그 흔적을 따라가다 보면 저 멀리 그리운 사람이 손짓하는 것 처럼, 평안을 마주하는 것 처럼, 그제서야 보이는 것들이 있어요. 내 발치에 반짝이는 보석을 찾아낸 것 처럼.
(도서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