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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오아시스
김채원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5년 1월
평점 :
현관은 수국 뒤에 있다
“ 세 사람은 가만히 있었다. 들어야 할 나쁜 소식을 듣지 않으려고 열려 있는 문 앞을 서성이며 매일같이 그곳을 지키고 서 있는 기분이었다. 그것은 커다란 벽이 나타난 꿈속에서, 아무리 벽을 밀어도 소용이 없을 때의 기분과 비슷했는데 완전히 같지는 않았다. 그러다 언젠가 벽이 무너지면 미뤄두었던 모든 나쁜 소식을 한꺼번에 듣게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겪어야 할 모든 불행을 한꺼번에 겪게 된다면 좋을 거야. 치료할 것도 없이 단번에 죽게 될 거야. ” | 24
동우와 석용, 그리고 성아는 친구였던 유림의 장례식장에 가는 길이다. 하지만 이들은 고인에 대한 추억을 나누거나 충실히 장례식장으로 가는 길을 따르지 않는다. 맥락이 이어지지 않는 대화가 난무하고, 타자의 목소리가 예고없이 여기저기서 끼어들고 어디를 헤매는지 알 수 없이 어딘가를 헤매며 정작 유림에 대한 어떤 말도 꺼내지 못한다. 나는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하지 못한 것‘ 이라고 이해하고 싶었다. 정처없이 떠도는 이들은 늦은 오후의 그림자처럼 기다란 뒷모습을 남긴 채 사라져 간다.
이 이야기를 어떻게 이해해야할까,
자살로 생을 마감해야 했던 친구의 죽음을, 어쩌면 머나먼 길을 정처없이 떠도는 것은 죽음이라는 얼굴을 정면으로 바라보지 못한 채 그저 주변을 맴도는, 그렇다고 떠나지도 못하는, 의미없는 말들을 길 위에 쏟아버리고는 사라져버리는, 낯선 애도의 모습들에 자주 혼란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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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 수 있는 대답
“ 날씨가 이렇게 뜨겁고, 이렇게나 해가 오래 떠 있는데 어째서 어떤 사람들의 마음은 온통 어둠이기만 한 것인지 유림은 알수가 없었다. ” | 116
유림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동우, 석용, 성아가 찾기를 망설였던 사람. 앞선 이야기에서 궁금했던 유림의 이야기 이 단편에서 짧게 이어진다. 그때의 유림은 다리를 다쳤고, 일은 그만 두어야 했고, 유난히 햇빛이 쏟아지는 날이었지만 어딘가 어두운 분위기 속에서 공원을 걸었다. 누군가 자신을 의심해주기를 바라면서, 유림의 그 사고가 차가 오는 것을 알고도 일부러 피하지 않은 것은 아닌지 조금은 의심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었다. 아무도 모를 그런 마음을 품은 채 걷고 또 걷는 유림을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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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덟 편의 단편 안에는 공통적으로 가까운 누군가의 죽음 이후에 ‘남겨진 사람들’이 그려진다. 자살로 생을 마감한 가족이나 친구로 인한 상처가 치유되기도 전에, 그 사실을 받아들여야만 하는 현실에 이리저리 치이는 남겨진 사람들 말이다. 이들은 유난히 계속 걷고 어딘가를 떠돈다. 떠돌면서 만나는 사람들의 의미없는 말소리가 섞여들고, 정처없는 발걸음이 어디로 향하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손에 잡히는 서사가 없이 장면과 상황을 묘사하는 점은 내내 어떤 맥락을 찾고싶어 하는 독자에게는 그 글을 이해하기 위한 약간의 수고가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흐름을 찾으려고 할수록 또 다른 장면으로 이어져 새로 시작되기에 나는 그것을 그만두고, 그저 장면 안에서 머무르다 떠나기를 반복하며 그의 글 속을 하염없이 따라 걷기로 한다. 누군가의 상실을 이해하기란 늘 내 능력 밖의 일인것 같지만 작품을 관통하는 서늘한 온도와 유독 혼자 남겨진 등장인물들이 어디론가 가고싶어가는 모습은, 열려있는 문을 향해 무작정 걸어들어가는 모습은 혼자 남겨지기를 거부하는 미약한 몸짓같아 나도 따라 안쓰러워지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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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갈 방법을 전혀 찾지 않고도 살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나는 살아갈 방법이 필요한 사람이고, 그 방법이 소설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도 싶다. 그렇게 될 수 있다면 그렇게 되고 싶다. — p260, 작가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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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규정할 수 없는 상태의 웅성거림,
과녁은 하나여도 그곳에 도달할
(도달하지 않아도 될)
방법이 결코 하나일 리 없다는 것. ” | p241, 해설
(도서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