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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다는 것에 관하여 - 앓기, 읽기, 쓰기, 살기
메이 지음 / 복복서가 / 2024년 11월
평점 :
나는 어제의 나를 비웃는다. 쪼그라든다. “짓지도 않은 죄”에 대한 자책감에 책상 아래로 기어들어가고 싶다. 무엇보다 나를 찢어놓는 건 이게 영원히 끝나지 않을 거라는 절망이다. — p11
고통이 왔다, 간다.
살 속을 파고드는 고통에 신음하며
어둠속으로 잠겨버리는 시간이
왔다, 그리고 간다.
그것이 가고 나면
다시 허리를 펴고, 숨을 뱉어내고
다시 읽기 위해, 쓰기 위해,
자리에 앉는다.
만성피로증후군이라는 병은 그 시작을 알 수 없을만큼 오래 전부터 그의 삶을 지배해왔다. 정확한 병명을 알지도 못하고, 치료법은 더더욱 알 수 없다. ‘힘을 써서 활동하면 증상이 악화되는 병, 몸을 쓰는걸 몸이 못 견디는 병‘이라니. 근원을 알지 못하는 고통은 단지 신체적 고통뿐만 아니라 끝이 어디인지, 언제인지 알 수 없는 절망감이 더욱 크게 압도했을 것이다.
‘앓기, 읽기, 쓰기, 살기’의 진자운동같은 삶을 견디면서도 아프다는 것을 이토록 면밀하게 파고드는 것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어쩔 수 없이 하던 일을 멈추고 누워야만 했을 때는 ‘내가 더 똑바로 살았다면 아프지 않았을까, 내가 저질렀을 (알지도 못하는) 잘못 때문에 이런 일이 생겨났을까’ 오해와 원망은 나를 거쳐 세상으로 뻗어 나가기도 하고, 결코 탓할 수 없는 누구라도 붙잡고 힘껏 원망하며 악을 쓰고 싶다가도, 그렇게 엉망이 된 나를 다시 쓸어모아 닫힌 문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기척도 없고 누구도 내 존재를, 이 고통의 존재를 알지 못하는 그 곳에서 철저한 객체가 되어 고립되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
영원할 것 같은 고립의 시간은 어느 순간 읽기와 쓰기로 치환된다. 언제 아팠냐는 듯이, 앓기가 끝나면 마치 허기진 아이처럼 책속의 문장을 찾아 헤매고, 고통을 설명하는 보다 적절한 언어를 찾아 헤매었다. 이 책은 구구절절하게 ‘내가 얼마나 아픈지 보실래요?’가 아니라, 문학 속에 녹여진 고통의 언어를 찾아 그의 시선으로 풀어냈다는 점, 타인의 아픈 이야기에 내가 어디까지 가닿을 수 있는가에 대한 삶 전체를 아우르는 거대한 실험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가 빚어낸 언어들은,
오히려 나를 위로한다. 사지가 멀쩡하고 아픈 구석 하나 없는 내가, 그의 글로 인해 치유를 받고 이해라는 선물을 받는다. 삶이라는건, 문학이라는건 어째서 이런 아이러니를 빚어내는 것일까? 내가 알지 못했던 앓는다는 것에 대한 이해를 넘어, 그런 삶이지만 그 조차도 사라져버리기엔 그는 이 삶이 소중하다 말한다. 참으로 지긋지긋한 아픈 삶이지만 그럼에도 이 삶이 나에게 준 선물, ‘되고싶은 내가 되어주게 한‘ 고통을 마냥 밀어낼 수만은 없다고 한다.
그렇게 밀어내지 않은 고통에 대한 그의 말이 좋았다. 삶을 가여워할 줄 알고 의미를 부여할 줄 알고 주도권을 잃은 채 몸에게 끌려다니는 삶 속에서도 그가 일궈낸 문학적 성취가 그 어떤 삶보다도 거대해 보였다. 이렇게 나는 또 한 겹의 막을 걷어내고 세상을 바라보는 또렷한 시선을 얻은 것이다. 이건 오롯이 그의 성취 덕분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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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병의 충격과 영향 아래 오랫동안 살아갈 당신, 당신을 죽게 내버려두지 않는 말을 만나길. 실낱같은 빛, 거의 무심해서 좋은 위안, 악몽으로 깬 이의 등을 쓸어내려주는 손, 다시 세상으로 끌어당기는 중력, 인간의 마을로 돌아가는 길을 표시하는 작은 돌멩이들, 황무지를 헤맬 때 손에 든 나침반 같은, 그런 말들을 찾길, 아니 당신이 찾지 않아도 말들이 당신에게 올 테니 그 말들을 소중히 쥐길, 그 말들에 붙잡히길. 지금 세상 가장자리, 아주 먼 곳에 있을지도 모르는 당신에게, 언젠가 나에게 보내는 편지를 쓰게 한 간절함을 담아 말들을 전한다.
p2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