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뉴어리의 푸른 문
앨릭스 E. 해로우 지음, 노진선 옮김 / 밝은세상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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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균열을 닫으려는 사람과
그 균열 너머에 희망의 빛을 보는 사람 ”

재뉴어리는 황량한 들판에 외롭게 서 있던 낡은 푸른 문 앞에 서있다. 허리춤에서 작은 수첩을 꺼내 지금 간절히 바라는 것 한 가지를 적었다. 이 문이 나를 다른 세상으로 데려가 주기를,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광대한 세상으로 나를 이끌어 주기를.
그 순간 문 안쪽에서 옅은 빛이 세어 나왔다.
그리고 그 문을 연 순간 전혀 다른 세상이 펼쳐졌다.

들판에 너무도 외롭게 서 있는 그 너덜너덜한 푸른 문을 봤을 때 저 문 너머에 다른 세상이 펼쳐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켄터키주 나인리가 아닌 다른 곳, 전혀 본 적 없는 새로운 도시, 너무 광대해서 절대 그 끝에 도달할 수 없는 어딘가로 이어졌으면 좋겠다고.| 18


한 세상과 다른 세상을 연결하는 문을 발견한 재뉴어리는 부유한 로크씨의 보살핌 속에서도 내내 마음 속 깊은 곳에 숨겨진 그리움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로크씨에게 고용되어 보물을 찾아다니는 아버지, 이제는 기억조차 나지 않는 어머니. 재뉴어리가 푸른문을 마주한 순간 분명 저 문 너머에는 여기와는 다른 세상이 있을것이라는 말도 안되는 희망을 품었다. 그런데 거짓말처럼, 운명이 그녀에게 삶의 지도를 보여주듯 문 너머에 신비로운 이야기 속으로 끌려들어갔다.


문은 틈새이자 샛길이고 미스터리며 경계이기도 하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문은 변화다. 문에서 무언가가 빠져나오면 그게 아무리 작고, 아무리 찰나라고 해도 변화가 뒤따르기 마련이다. 배의 항적을 따라가는 쇠돌고래처럼. | 106


국내에는 처음 소개되는 앨릭스 E. 해로우의 판타지 소설로, 첫인상은 두께의 압박(?)으로 겁을 잔뜩 먹고 시작했다. 다행히 페이지는 잘 넘어가는 편인데 100페이지가 넘어가서야 본격적인 모험이 시작되어서 그 전까지 재뉴어리의 서사를 읽어가는게 조금 지루하기도 했다. 그리고 책 속의 책의 내용이 이어지다보니 등장 인물이나 시대 상황, 특정한 배경 같은 것들이 조금 어지럽기도 했다. 하지만 이 모든 장치들이 결국 수 많은 복선이 되고, 단서가 되고 하나의 결론으로 이어지는 것을 보고 나니, 다시 앞으로 돌아가 하나씩 보물찾기 하듯 이야기를 파고들고 싶어졌다.

나는 재뉴어리의 이야기도 좋았지만 재뉴어리의 아빠 율과 엄마 에이드의 서사가 애절하면서도 감동적이었다. 결국 만날 사람은 만난다는 이야기 구조는 어쩐지 많이 봐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 닿을 수 없는 문을 사이에 두고 그 둘이 마주하고 있던 장면은 내내 기억에 남을 것 같다.


“ 밤이 깊어가는 동안 거의 다 타서 곧 꺼질 듯한 촛불처럼 가물거리는 희망을 품고 잡풀이 웃자란 벌판에서 기다렸던 에이드, 언덕 꼭대기에서 앙상한 두 팔로 무릎을 끌어안은 채 앉아 있던 율. 이 둘의 모습은 마치 거을을 사이에 둔 듯했으나 둘 사이에 존재했던 건 차가운 거울이 아니라 두 세상 사이의 광대한 간격이었다. ” | 217


책의 스토리 자체도 재미있지만, 문장 자체가 아름답다는 생각을 자주 했다. 아니나 다를까, 노진선 번역가님 작품이었다!
같이, 읽어봐요!


“우리가 이야기를 고고학 현장처럼 접근하고, 층층이 쌓인 먼지를 꼼꼼하게 털어낸다면 그 안에 늘 문이 등장한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그 문은 여기와 저기, 우리와 그들, 평범과 마법이 나뉘는 분기점이다. 문이 열리고 두 세계 간에 교류가 일어날 때 이야기가 시작된다.” | 8

서로 비슷한 형태의 욕망을 가진 사람을 우연히 만난다는 건 몹시 기이한 일이다. 마치 거울 속 내 모습을 향해 손을 뻗었는데 손끝에 따뜻한 육신이 닿는 것과 같다. 그렇게 마법적이면서도 잘 어울리는 상대를 발견할 정도로 운이 좋다면 두 손으로 그를 꽉 잡고 절대로 놓아주지 않기를 바란다.
나는 그러지 못했다. | 137

우리가 균열 혹은 일탈이라고 부르는 이 문이 무엇을 가져올지 생각해보렴. 무질서, 광기, 마법… 그것들은 질서를 어지럽힌단다. 나는 질서가 없는 세상, 권력과 부를 향한 끊임없는 경쟁과 잔인한 변화만이 횡행하는 세상을 본 적이 있다. 나는 그런 세상에서 젊음을 낭비했어. | 487

세상은 결코 감옥이 되어서는 안 된다. 닫히고 숨 막히고 안전해서는 안 된다. 세상은 모든 창문을 활짝 열어둔 저택과 같아야 한다. 창문으로 바람이 불어오고, 여름비가 들이치고, 옷장은 마법의 통로가 되어야 하고, 다락에는 비밀 보물 상자가 있어야 한다.
닫힌 문이라면 넌더리가 난다. | 505

이 세상의 틈새를 찾아내 더 넓게 벌려 다른 세상의 햇살이 그 사이로 빛날 수 있게 해주기를 바란다. 이 세상을 계속 통제할 수 없고, 엉망진창이고, 이상한 마법으로 가득하게 만들어주기를 바란다. 열린 문을 모조리 통과한 다음 돌아와서 이야기를 들려주기를 바란다.
모든 문을 열면서. | 539

(도서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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