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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 공간의 위로 ㅣ 세리프
그레텔 에를리히 지음, 노지양 옮김 / 빛소굴 / 2024년 5월
평점 :
자연의 모든 것은 끊임없이 우리를 지금의 우리가 되도록 초대한다. 우리는 종종 강과 닮았다. 부주의하면서 강하다. 소심하면서 위험하다. 맑으면서 탁하다. 소용돌이치고 반짝이고 고요하다. 소로는 일기에 이렇게 썼다. “한 인간의 삶은 강물처럼 신선해야 한다. 같은 통로로 흘러도 매 순간 새로운 물이 흘러야 한다.” | p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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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이오밍에서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고 있던 그레텔 에를리히에게는 투병중인 연인이 있었다. 한 때 그녀와 함께 지내기도 했지만 병세가 깊어지며 그는 먼저 도시로 돌아갔다. 그리고 얼마 되지 않아 그가 위중하다는 소식을 듣게 되고, 하루라도 빨리 촬영을 마치고 도시로 돌아가려던 참이었다.
그러나 그의 시간은 거침없이 흩어져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어느날 아침 그의 어머니로부터 그가 이미 눈을 감았다는 전화를 받게 되고, 그레텔은 도시로 돌아가는 대신 와이오밍에 남기로 한다.
“ 죽는다는 것은 너무나 많은 것을 앗아가는 일이었기에 조금이라도 불필요한 것, 역설로 압축되지 않는 모든 것은 사라졌다. 우리는 말없이 손을 잡고 바닥에 누워서 상대방의 모습을 바라보며 요란한 웃음을 터트렸다가 결국 울어버리곤 했다. 죽음만큼 웃긴 농감은 없을 거야. 우리는 동의했다. ”
| p57
“ 이 넓은 공간은 꼭 가능성 같아서 슬퍼져.
너와 함께 할 수 있었던 그 모든 삶의 가능성 ”
| p58
그녀에게 와이오밍의 대자연은 어떤 의미였을까.
도시에서의 삶 대신 문명의 손길이 닿지 않는 목장에서의 삶을 선택한 이유가 선뜻 이해되지 않았지만 분명한 것은, 그 곳에는 내가 가지고 있던 삶의 스펙트럼으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대자연의 위로와 거칠지만 순박한 사람들로부터 얻는 이해가 있다는 것이다.
목장일이 처음부터 순조로웠던 것은 아니다. 가보지도 않았던 산으로 들판으로 몇천마리나 되는 양들을 홀로 이끌어 나아가야 하고 풍족하지 못한 환경 속에서 고된 노동을 한다는 것이 요즘같은 시대라면 더더욱 마치 다른 시공간속에 있는 듯 비현실적이다. 하지만 그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여태껏 존재해왔고 겉으로 보이는 강인함 속에 감춰진 섬세함으로 동물들을 보살피고 기른다.
그리고 작가는 그 환경 속으로
더 깊이 걸어들어갔다.
‘거침없음’의 이면에 ‘거침없이 견딤’ 속으로.
그 안에서 오롯이 자연을 느끼고 향유하며
‘땀으로 일궈낸 사랑의 언어들’속에서
상처가 아물어간다.
카우보이와 목장을 운영하는 것에 대한 지식은 그저 영화에서만 보던것이 전부였지만 이 글을 통해서 많은 생각의 전환을 경험했다. 남성미의 상징이었던 카우보이는 누구보다 섬세해야 하고 다정해야 하며 자연 속으로 자신을 내던져야만 하는 일이었다. 그들은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도 얼굴을 붉히고 모자를 고쳐쓰며 겨우 내뱉는 사람들이며, 여인과의 깊은 대화 후에는 “심장이 삐끗한 거 같아요.”라고 표현하는 사람들이다.
“ 그들의 힘은 곧 부드러움이고 그들의 강인함은 보기 드문 세심함이다. ” | p78
“ 이곳에서 잘 산다는 것은 물질적 풍요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 잘 버텨내는 기술을 의미한다. 적어도 전동적으로 목장 생활은 물질주의와는 거리가 있고 인간이 동물과 동고동락하며 얻게 되는 성취감, 밤에 라디오를 듣는다거나 별자리를 찾아보는 등의 소박한 기쁨을 대표한다. 내가 배우게 된 강인함은 순교자적인 끈기나 단순무식한 영웅주의가 아니라 적응의 기술이었다. 나는 생각했다. 강인함은 곧 연약함과 통하며, 온유함이야말로 진정한 치열함이라고. ” | p66
혹시 ‘브로크백 마운틴’ 이라는 영화를 기억할까?
와이오밍을 배경으로 한 퀴어 로맨스 영화인데 왠지 이 책을 읽으며 그 영화가 떠올랐는데 진짜로 그 곳이 와이오밍이었다. 영화의 이미지를 떠올리면 그레텔이 머물렀던 목장의 분위기를 언뜻 알 수 있어 슬며서 머리 속으로 그림을 그리며, 한없이 충만하고 대자연 속의 풍요를 내 안으로 더 가까이 가져올 수 있었다.
도서 제공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