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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슬픔을 껴안을 수밖에 - 양장본
이브 엔슬러 지음, 김은지 옮김 / 푸른숲 / 2024년 4월
평점 :
책에 담긴 작가의 기나긴 사유(Reckoning)는
때로는 처절하게, 때로는 잔혹하게
지금껏 진실이라고 여겼던 일들의
또 다른 이면을 보여준다.
강간이 전쟁의 도구가 되고 있는 현실,
그것과 함께 이브 엔슬러 본인의 상처까지
있는 그대로 독자들을 향해 펼쳐보인다.
가족으로부터 오랜시간 당해왔던 성추행,
이를 묵살한 채 희생양이 되어가는 것을
방관했던 어머니의 선택.
오래된 갈등의 골은 그녀의 삶 전체에
너무나도 촘촘하게 뿌리내리고 있었고
그녀가 글을 쓰고 선언을 하고,
세상에 알리는 이 모든 작업은
그 자체로 스스로의 독립과 치유의 과정이었다.
그 과정은 실로 참혹하다.
줄곧 내가 지금 읽고 있는 이 텍스트가
동시대에, 물리적 거리를 제외하면
무엇하나 다를 것 없는 지금 이 순간
이 땅에서 벌어지는 일이라는 사실이
나를 당혹스럽게 했다.
그것도 아주 자주.
—
글쓰기는 하나의 생존 방식일 수도 있다.
혼란을 염려하는 방식,
타인의 횡포에 휩쓸리기를 거부하는 방식,
어둠 속에서 조용히 눈물 흘리는 방식.
우리는 그저 최선을 다한다.
가능한 한 본질에 가깝게 말하려 애를 쓴다. | p 25
그럼에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읽는 것‘이다.
끝까지 읽어내는 것,
이 잔인함을 마주하고
원초적인 공포 떨면서도
비합리적이고 혼란스러운
모든 것들을 있는 힘껏 껴안는 것.
되돌아가 다시 읽고 또 읽고
그리고 사유를 멈추지 않는 것.
텍스트 이면의 소리를 들으려고
계속해서 귀기울이는 것.
—
제가 녹아들 수 있게 해주세요.
뒤섞이게 해주세요.
갑옷처럼 단단한 저의 자아를 해방시켜 주세요.
더 많은 것을 무너뜨리기 위해
실망하는 일을 멈추지 않게 해주세요. | p 137
ㅇ
비록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단지 이 이야기를 읽는 것 뿐일지라도,
나는 안다.
심연으로 향하는 사유가 계속되고
그 사유는 나를 진실하게 바라보게 하고
이렇게 프레임 밖으로 걸어나온 ‘ 사람들은 ’
남성과 여성을 넘어선 그 이상의 존재가 되어
그저 서로를 바라보는 연대와 공조,
깊은 곳에서부터 쏟아져 나오는
‘지칠 줄 모르는 이타적인 사랑’이 만연할 것임을
나는 안다.
—
너무도 강렬히 타올라 우리의 죽은 내면에까지 스미는, 우리의 담을 허물고, 우리의 상상력에 불을 지피고, 그리하여 마침내 이 죽음의 이야기에서 우리를 구해내는 사랑이 필요하다. | p 175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후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