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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와 주목 ㅣ 애거사 크리스티 스페셜 컬렉션 3
애거사 크리스티 지음, 공경희 옮김 / 포레 / 2014년 9월
평점 :
절판

-믿고 읽는 애거사 크리스티! 사실 전에는 애거사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는데, 이 시리즈로 인해 애거사에 대한 지대한 관심과 무한한 존경심뿐 아니라 ‘심리소설’이라는 것에도 흥미가 무럭무럭 자랐다. ‘심리소설’이라... 사실 인물을 깊이 다룬 소설에는 어느 정도 심리가 드러나긴 하지만 이렇게 ‘심리소설’이라는 타이틀이 딱 들어맞는 시리즈는 처음인 것 같다. 애거사 크리스티는 인간에 대해 어쩜 이리 잘 알까? 이 모든 건 경험의 힘이 클까 아니면 생각의 힘이 클까? 그것도 아니면 의식과 무의식에 대한 치열한 공부? 무엇을 기대하든 그 이상의 글발이기에, 이 생각 저 생각 별 생각 다 하게 만드는 애거사 여사의 필력! 대.다.나.다
-표지 얘기를 안 할 수가 없다. <봄에 나는 없었다>와 <딸은 딸이다>에서 표지로 임팩트를 뙇! 주시더니만 역시 이번 표지도 강렬하기 이를 데 없다. 요즘에는 강렬한 이미지랍시고 무섭고 기괴한 표지가 너무 많은데, 이 시리즈의 표지들은 딱히 특이한 것도, 이런 저런 효과가 들어간 것도 아닌데 아주 미스터리하고 묘한 느낌을 준다. 게다가 이번에는 남자의 (벗은!) 몸+_+! 이러니 안 집을 수가 없다. 남들이 ‘장미’를 볼 때 이 남자의 ‘식스팩’을 먼저 본 1인이다. 허허.
-소설에는 애인을 만나러 가다가 교통사고를 당해 다리를 못 쓰게 된 ‘휴’라는 화자와, 출세를 위해서라면 어떤 일도 서슴지 않지만 신분 차별에 대한 나름의 아픔을 가진 ‘게이브리얼’이라는 남자, 그리고 ‘이사벨라’라는 순도 100% 여자가 나온다. 내용을 간단히 말하자면 이들의 삼각관계 되시겠다.
-그런데 중요한 건 삼각관계라는 게 처음부터 전면에 대두되지는 않는다는 것. 처음엔 ‘나’가 이사벨라를 좋아하는 것도 안 나오고, 심지어 게이브리얼은 귀족인 이사벨라를 굉장히 증오한다. 그래서 눈이 밝지 못한 독자인 내게는 이것 또한 반전이라면 반전이었다.
-하지만 앞부분이 지루하지는 않다. 소설의 절반 가까이 인물들의 내력이나 특징이 하나씩 자세하게 나오는데, 그 인물들이 정말 독특하고 흥미롭고, 또 미스터리하다. 특히나 매력적인 인물은 이사벨라와 게이브리얼.
-게이브리얼부터 말하자면 ‘속물’이다. 자신에게 이득이 된다면 자기 할머니라도 내다 팔 인물이다. 그런데 재밌는 건, 이런 게이브리얼에게는 상처받고 힘없는 사람들에 대한 남다른 애정이 있다는 것. 게이브리얼이 아무리 못되고 비열한 인간으로 나와도 독자는 그의 마음 밑바탕에 깔린 애정을 읽을 수 있기에 그가 전혀 밉지 않다. 궁금할 뿐!
-이사벨라로 말하자면... 정말 현실에서는 존재하기가 힘들 것 같은 인물이다. 그렇다고 비현실적인 인물은 아니고, 뭐랄까, 정말 본질만 생각하고 그것만 바라보는 인물이랄까? ‘순도 100%’라고 표현한 건 그런 의미에서다. “아무것도 몰라요” 하는 전형적인 순수녀가 아닌, “난 내가 뭘 원하는지 알고 그것만 봐” 하는 직관녀. 개인적으로 이사벨라의 이런 점이 참 부러웠다.
-나는 이사벨라라는 인물이 흥미로웠기에 세월이 흘러 화자와 이사벨라가 재회하는 장면이 인상 깊었다. 이사벨라라는 인물에 대해서는 극중 인물들의 평도 엇갈린다. 누구는 천재라는데 ‘나’가 보기엔 바보 같다. 누구는 교활하다고 하는데 ‘나’가 보기엔 이 세상 누구보다도 정직한 것 같다. 그렇게 종잡을 수 없는 사이, ‘나’도 독자도 이사벨라에게 빠져들게 되고, 후에 재회하는 장면에서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 조금씩 분명해지기 시작한다. 사람을 알아가는 게 이렇게 재밌다니...! 줄거리는 심플하지만 기만적인 인간의 마음은 정말이지 복잡하다. 그래서 재미있다.
-세 남녀의 삼각관계로 시작한 이 소설은 극이 진행되며 ‘타인에 대한 이해’ 라는 묵직한 주제로 수렴된다. 우리는 가족에게, 친구에게, 연인에게 쉽게 “이해한다”고 말한다. 날 생각해서 하는 말이겠지만 나는 가끔씩 이 말을 들을 때마다 뭉클한 감동이 아닌 왈칵 화가 치솟을 때가 있었다. 이해한다고 도닥이는 사람의 손을 잡고 앙칼지게 묻고 싶었다. “이해한다고? 너는 내가 아닌데 어떻게 날 이해해?”
-내가 이사벨라를 좋아했던 이유를 알 것 같다. 이사벨라는 이 간단한 진리를 아는 사람이었다. (역시 직관녀!) 사실은 우리는 남을 이해하지 못한다. 인정할 건 인정해야 한다. 우리가 그 사람이 아닌데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아니, 하루에도 수십 번씩 바뀌는 내 마음은 나 자신도 알지 못해 이렇게 불안한데, 누가 날 이해할까? 내가 누굴 이해할까? 그래서 이사벨라는 이렇게 말했지... “전 그를 몰라요…… 그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죠. 누군가에 대해 아무 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모른다는 건 끔찍한 일이에요.”
-이 소설은 그런 소설이다. 우리가 쉽게 내뱉은 '이해'라는 말의 무게를 진지하게 생각하게 하는. 노련한 대작가 앞에서는 우리 모두 허세와 기만 가득한 인간일 뿐이라는 게 신랄하게 까발려진다. 물론 여기에는 애거사 자신에 대한 뼈아픈 자기 반성도 녹아 있을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에 한 번 더 몰아치는 반전과 찌릿한 감동... 역시 애거사! >_<)b 이번 작품도 정말 좋다.
-이제 오히려 애거사의 추리소설을 못 읽을 것 같다. 내 마음 속에서 애거사 크리스티는 심리소설 작가로 굳어가고 있다...
-그래서 다음 작품은 언제? 벌써부터 기다리고 있다. 엄청난 기대와 함께~~!!
사람은 가장 숭고한 것을 보면 증오하게 돼 있어. 숭고는 내 얘기가 아니니까, 영혼을 팔아도 난 절대 그런 존재가 될 수 없으니까 증오하지. 용기를 정말 가치 있게 여기는 자야말로 위험이 다가오면 달아나는 족속이야.
아름다운 동물과 꽃을 만든 하느님, 인간을 사랑하고 보살피는 하느님, 세상의 창조주…… 아니, 난 그런 신이 존재한다고 믿어지지가 않아. 하지만 때로는—나도 어쩔 수가 없이—그리스도의 존재는 믿게 돼…… 왜냐하면 예수는 지옥으로 갔으니까…… 그의 사랑은 그만큼 깊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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