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낭독회 아침달 시집 41
기원석 지음 / 아침달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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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시집을 한 편 읽었다. 시를 잘 모르긴 하지만 시라는 게 원래 내가 느끼는 게 정답이라고 생각한다. 내 마음대로 읽을 것이다.  


<가장낭독회>에서 시인은 시와 시인, 그리고 글쓰기에 대한 사념이 많다고 느꼈다. 아무도 시를 읽지 않는 시대에 계속 시를 쓰는 시인은, 요즘 같은 시대에 누가 시를 읽느냐고 푸념을 하고 (그런 걸 뻔히 알면서도 여전히 시를 쓰는 자신 같은) 시인을 혐오하는 듯하지만, 분위기에 맞지 않게 괜히 오버하고 유난을 떨며 혐오를 내비치는 시인의 말을 들어보면, 반대로 그가 시 쓰기를 얼마나 열망했는지, 독자들을 기다리는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그의 시집은 바게트

...

요즘 누가 바게트를 먹겠어

프랑스인도 아니고

독백에서

깨달음을 얻는 그는 이제

바게트로 그의 독자를 

두들겨 팬다. 

...

바게트 사세요

바게트 사세요

제발 사세요

외치는 독자들의 화음과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다가오느 수많은

비둘기들을 내쫓는 제빵사의

숱한 헛스윙과

이 모든 광경을 유유히

지나쳐 가는 수많은

프랑스인들로 가득하고

_기원석, 「바게트」 중에서 


다섯 편 혹은 열한 편의 시가 무대에 오를 것이다 그들이 고개 숙여 독자에게 예의를 갖추고 자리에 앉자마자 시가 시작될 것이다 그들이 각자의 원고를 꺼내어 동시에 읽고 누가 제지할 틈도 없이 뒤섞일 것이다 단어들이 드문드문 들리고 한 편에 집중하려고 치면 다른 한 편이 목청을 높일 것이다.

_기원석, 「튜토리얼」 중에서

 


이번 시집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시.(「튜토리얼」이라는 제목의 시가 몇 편 더 있는데 「튜토리얼」들은 대부분 좋다) 시들이 무대에 오른다는 발상 자체가 아주 기발하다. 나는 상상해본다. 가운데만 불이 밝혀진 어두운 무대에 다섯 편 혹은 열한 편의 시들이 무대에 오르는 모습을. 그들이 각자 원고를 읽으며 목소리가 뒤엉키는 불협화음을. 그들은 “소리를 높이고 독자에게 밀착하고 주목받는 곳으로 자리를 옮기”지만 잊지 말아야 하는 룰은 독자는 “모든 것을 그대로 흘려보내야 한다는 사실”이다. 시들은 “사소한 무엇이라도” 건드리고 싶어 서로 난리버거지를 치지만 결국 무대에 남은 것은 어지러이 널려 있는 철제 의자뿐인 무대를. 


(이런 공허한 무대를 연상시킨 시 다음에 나오는 시가 「가장낭독회」이고 시인은 또 천연덕스럽게 “낭독을 위한 지시 사항”을 읊는다는 게 좀 웃기다) 


이번 시집에 실린 시들은 대체로 드라이하고 무감정한데 그 와중에도 몇몇 과하지 않게 촉촉한 시들이 나와서 전체적인 밸런스를 맞춘다. 가령 「미싱」이나 「스노볼」 같은, 그리움 혹은 양가적 감정을 드러내는 몇몇 시들이. 


상상 속의 책상 위에는

노루발 같은

편지가 하나 있었다

아침마다 답장을 적어 보냈고

그것은 새벽마다 

뜯어진 흔적도 없이 반송되었고 

...

나는 야트막한

발자국을 따라나섰습니다

먼 기슭까지 아름답게 빛나는

엽총을 들고

메아리치는 누군가의 울음을 쫓듯

...

나는 발소리를 죽이며 상상했습니다

사냥을 마치면 

...

당신을 만나러 가야지

품에 넣어둔 답장을 건네줘야지 


_기원석, 「미싱」 중에서 


 

누군가 내게 줄 답장을 품은 채 엽총 들고 사냥을 다녀왔다고 하면 꽤 섬뜩할 것 같긴 하지만. 


 너에게 커다란 수박을 건네받았다 그것은 하얗고 줄무늬가 무성한 달이다 두려움처럼 명멸하는 달을 너에게 도로 건네준다 하룻밤을 넘기지 못하고 달이 내게 굴러온다 나는 이걸 안아도 보고 굴려도 보건만 차마 먹어볼 엄두가 나지 않는다 

...

과연 며칠 만에 돌아온 달은 내 방을 한가득 차지하고 밀림 같은 배를 드러내고 있다 칼집을 내듯 들창을 여니 물기 가득한 달의 속살이 한기에 떨고 달빛은 웅덩이처럼 고인다 


_기원석, 「스노볼」 중에서



「스노볼」이란 시도 참 좋다. 내가 받은 수박을 너에게 주지만 수박은 다시 내게 굴러오고, 그렇지만 나는 차마 먹을 수 없고, 결국 너에게 다시 건네지만, 수박이기도 달이기도 한 그것은 다시 내게 굴러온다. 결국 나는 칼을 들어 그것을 자르는데, 그 안에 있는 것이 너무나도 작고 소중하고 어찌할 줄을 몰라 커튼을 쳐준다. 주고 받고 하는 게 마음일 텐데, 그런 당연한 것도 편하게 할 수 없었던 때가 있다. 우리 누구나 다 그럴 것이다. 그건 상대가 싫어서가 아니었고, “차마 먹어볼 엄두가 나지 않”기 때문에. 원래 너무 소중한 것들은 스스로를 불안하게 하니까.



과연 며칠 만에 돌아온 달은 내 방을 한가득 차지하고 밀림 같은 배를 드러내고 있다 칼집을 내듯 들창을 여니 물기 가득한 달의 속살이 한기에 떨고 달빛은 웅덩이처럼 고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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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낭독회 아침달 시집 41
기원석 지음 / 아침달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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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로 지은 모노로그, 혹은 멋진 실험극을 보는 기분이었습니다. 시와 글에 대한 깊은 고민이 녹아 있는 시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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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어 마이 라이카 토마토 청소년문학
김연미 지음 / 토마토출판사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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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롭고도 마음 아프게 읽었습니다. 화성탐사로봇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게 그렇게 슬플 줄이야ㅠㅠ 담담하게 이어져서 더 먹먹한 것 같아요. 너무 좋은 작품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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낱말의 장면들 - 마음이 뒤척일 때마다 가만히 쥐어보는 다정한 낱말 조각
민바람 지음, 신혜림 사진 / 서사원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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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쓰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이해할 것이다. 너무 흔하지 않으면서도 어렵거나 젠체하지 않고, 내가 표현하려 하는 바를 정확하고 경제적으로 표현해주면서도, 말맛도 있는 그런 ‘알잘딱깔센’ 단어를 찾아 쓰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또 얼마나 어려운지. 나는 내 상황이나 마음을 깔끔하게 표현해주는 그런 문장을 자유자재로 쓰는 순간을 늘 꿈꿨는데, 이 책을 읽으며 그런 말을 지칭하는 단어도 있다는 걸 알게 됐다. 바로 ‘산말’(실감 나도록 꼭 알맞게 표현한 말)이라는 단어다. 그렇다, 나는 산말을 찾아 헤맸던 것이다. 


이 책에는 많이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잘 쓸 수 있는 낱말들을 60가지 넘게 소개하고 있다. ‘난든집’이니 ‘콩켸팥켸’니 ‘맞은바라기’니 ‘곰비임비’니 낯설기도 하고 조금 우스꽝스러워 보이는 단어들도 있지만 그 뜻은 우리가 하루에도 수십 번씩 표현하는 말이라는 걸 알게 된다. 그러나 이런 단어들을 사전처럼 정의만 딱딱 끊어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힐링 에세이에 녹여주어 기억에 더 오래 남거니와, 그 옆에 낱말의 사전적 뜻풀이도 함께 적어줘 바로바로 뜻 확인 가능하다. 


직업 특성상 국어사전을 하루에도 수십 번씩 찾아보는 내게도 이 책에서 만난 단어들은 꽤나 낯설었는데, 이렇게 새로 면을 튼 우리말들을 어떻게 사용할까 생각하니 기분이 좋다. 군인에게는 총알이, 미용사에게 가위가 필요한 것처럼, 글쟁이들에게는 새로운 낱말들이 많이많이 필요하니까.


대학에서 국어국문학을, 대학원에서 국어학과 한국어교육학, 한국학을 전공한 작가는 오랫동안 외국에서 외국인 학생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쳤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저런 마음의 병으로 허든거릴(다리에 힘이 없어 중심을 잃고 이리저리 자꾸 헛디디다) 때마다 지친 마음을 쓰다듬고 나아갈 길을 열어준 것은 낱말들이었다고 하니, 이 대목에서 나는 ‘누가 국문학자 아니랄까 봐’ 하고 눈을 흘겼지만 그 모습도 너무 부럽고 좋아 보였다. 뭐든 자기가 좋아하는 것에서 힘을 얻고 에너지를 얻는 법이니까. 우리말로 풀쳐생각(맺혔던 생각을 풀어버리고 스스로를 위로함)하고 우리말로부터 옥실옥실한(아기자기한 재미 따위가 많은 모양) 위안을 얻는 결과, 누구에게도 뺏기지 않을 든든한 자산을 만든 것이니까. 


어떤 낱말이 있다는 건 그 말을 만들고 사용했던 사람들이 그만큼 많았다는 증거다. 지금 내가 걷는 길이 힘들고 외로워도, 누군가 앞서 걸었던 길이라고 생각하면 조금은 마음이 든든해지는 법이다. 그래서 낱말에도 치유의 힘이 있을 수 있는 것이다. 



-본문 발췌



어젯밤에도 나와는 상관도 없는 태국 광고 영상을 줄줄이 보면서 잘 시간을 넘겼다. 불안을 덮고 싶어서. 때로는 부란할 일이 특별히 없을 때조차 잠자리에 누우면 지구 멸망의 서사를 쓰곤 했다. ‘이제 진짜 자야 돼. 지금도 늦었어.’ ‘이미 그럴ㅆ어. 내일 일을 망칠 거야.’ ‘잠도 안 오는데 핸드폰이나 볼까? 안 돼. 눈이 청광에 노출되면 잠이 더 날아난다고.’ ‘요즘 모니터 볼 때 눈이 가물거리는데 벌써 노안이 온 건 아닐까?’ 이런 생각을 하다 보면 눈은 더 말똥해지고, 결국 휴대폰으로 ‘노안’을 검색하는 수순이다. 


그럴 때는 누워서 눈썹씨름(잠을 자려고 눈을 붙이는 일을 비유하는 말)을 하는 사람이 나뿐만은 아니라는 게 위안 아닌 위안이 된다. 눈썹씨름이라는 말을 떠올리는 것만으로 심각했던 마음이 누그러지고 살짝 우스워진다. 불면에 관한 농담 같은 낱말. 이 말을 처음 쓴 사람은 잠들려고 억지로 감은 눈에 얼마나 힘이 들어갔으면 눈썹으로 씨름을 한다고 생각했을까. 온갖 생각으로 스스로 다리를 걸어 넘어뜨리던 나는 눈썹과 함께 마음에도 힘을 풀기로 한다.



-


내가 이 관계를 오랫동안 지킬 수 있을까?

지키긴 뭘 지켜. 관계는 누리는 거지.

돌아온 말이 마음을 크게 흔들었다고 했다.

나 역시 관계는 흠집이 나지 않게 지켜야 하는 것으로 여겼다. 어떤 관계든지 훼손되고 나면 되돌리기 어렵고, 긴 시간 훼손하지 않기란 불가능하니 길어지면 모두 망가지는 거라고 생각했다. 

천천히 알게 되었다. 관계는 그런 게 아니었다. 훼손된 흔적을 지워야만 건강하게 지속되는 게 아니라, 시간 위에 함께 남기는 흔적 그 자체였다. 


-


공항 리무진을 타고 멀어지던 나를 볼 때 아버지는 느끼고 있었을 것이다. 이제 매일 함께하던 시간이 다시 오기 어렵다는 것. 그리고 그 거리는 내가 떠나며 살기로 마음먹었거나 두 분이 헤어져서 생긴 게 아니라 처음부터 정해져 있던 부모와 자식의 거리라는 걸. 


엄마에게 오지 말라는 연락을 받은 날, 밤늦게 휴대폰을 확인했다. 대화창에 사진 한 장이 떠 있었다. 활짝 웃고 있는 엄마의 셀카. (...)

-엄니 왜 갑자기? 보고 싶을까 봐?

-ㅎㅎ 생머리 하고 싶어서... 딸이 보고 싶어 하기도 할 것 같고... 보여주고 싶어서... 



‘사춤을 치다‘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사춤‘은 ‘담이나 벽 등의 갈라진 틈‘을 말하고,
‘사춤 치다‘는 그 틈을 진흙으로 메우는 일을 말합니다.
저에게는 갈라지고 벌어진 마음의 틈새를 사춤 치도록 해준 것이 우리 낱말이었습니다.
많은 이가 이미 같은 생각을 지나왔다는 것,
그렇게 그저 살아갔다는 사실이 작은 힘이 됩니다.

낱말이 모여 글이 되듯이 순간이 모여 삶이 됩니다.
낱말이 주는 위안과 용기는 미약하고 짧겠지만,허든거리는 순간마다 그것을 꺼내 볼 수있다면삶에서 반짝이는 순간도 늘어가지 않을까요. - P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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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여름의 끝에 네가 죽으면 완벽했기 때문에 토마토미디어웍스
샤센도 유키 지음, 전성은 옮김 / 토마토출판사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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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만으로 사랑이 안 되는 시대에 피어난 순결한 로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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