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에도 불구하고

<자학의 시>를 읽고 리뷰해 주세요.

자학의 시 1 ㅣ 세미콜론 코믹스
고다 요시이에 지음, 송치민 옮김 / 세미콜론 / 2009년 12월

자학 [自虐]
[명사]자기를 스스로 학대함. 

책을 읽기 전에, 책 제목에 쓰인 '자학'이라는 뜻이 내가 알고 있는 뜻인지 찾아보았다. 그리고 책을 읽어 내려가면서 내가 알고 있는 그 뜻이 맞았음을 알게 되었다.

유키에는 식당에서 어렵게 일하면서 살림을 꾸려간다. 남편인 이사오가 있지만 별 도움이 되지는 않는다. 조금만 마음에 안 들면 밥상을 뒤엎고, 돈만 생기면 파친코나 경마에 갖다주기 바쁘다. 거기다가 사랑해달라고 애원하는 유키에를 거의 소닭 보듯이 못 본 척 한다. 허구한 날 남편에게 혹사당하는 유키에를 보면서 불쌍하다는 생각이 샘솟듯 솟아나지만 정작 유키에 자신은 괜찮단다. 걱정해주는 이웃들을 보며 "전 이대로도 좋아요"라고 활짝 웃는게 바로 유키에다.

이 책은 만화책이다. 네 컷 짜리 만화로 한 사건이 단순하게 그려지고 빠르게 지나간다. 하지만 네 컷 짜리 만화로 치부하기에는 이 안에 담겨진 이야기가 너무나 많다. 어쩌면 세상의 모든 일이 네 컷 안에 담겨있는게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유키에와 이사오는 네 컷 안에서 많은 것을 이야기해주고 있다.

식당에서 배달일과 주방일을 하면서 어렵게 살림을 꾸려나가는 유키에, 그런 유키에를 등쳐먹고 산다는 이야기를 듣는 남편 이사오, 어렵게 살아가는 유키에를 짝사랑하는 식당 주인, 유키에의 이웃집에 살면서 늘 유키에에게 헤어지라고 말하는 이웃집 아주머니, 그리고 어렸을 때부터 유키에를 괴롭혀온 그녀의 아버지까지 이웃들의 소소한 일상이 담겨있다. 그 속에는 웃음도 있고 눈물도 있지만 책장을 덮는 순간 발견하게 된다. 삶에 담겨있는 진리를.

사실 1권만 읽었다면 책 안에 담긴 진리를 알아차리지 못했을 수도 있다. 그저 혹사당하는 유키에가 자신을 자학하고 있다는 사실 외에는 아무것도 없으니까. 하지만 2권으로 접어들면서 비로소 이해하게 된다. 자학처럼 보이는 유키에의 삶이지만 그녀가 현실에 진실로 행복해하는 이유를 말이다. 유키에는 우리가 소위 말하는 불우한 삶을 살아왔다. 어머니는 집을 나갔고 아버지는 늘 술을 달고 살았다. 급식비와 교재비를 내지 못해 이리저리 불려 다니며 고생했고, 석간과 조간 신문을 돌리며 근근이 삶을 이어왔다. 그리고 성인이 되어서는 알콜과 약물에 중독되어 거리의 창녀로 살아온 그녀-그런 그녀를 처음으로 따뜻하게 보살펴 준 것이 이사오였다. 비록 현재는 그녀를 괴롭히는 존재일지라도 말이다. 유키에는 마침내 이사오의 아이를 갖게 된다. 그러면서 머리속에 떠돌아다니던 어머니의 얼굴을 기억해낸다.

'엄마, 이제부터는 무슨 일이 일어난대도 무섭지 않습니다. 용기가 생깁니다. 이젠 인생을 두 번 다시 행복이냐 불행이냐 나누지 않을 겁니다. 뭐라고 할까요? 인생에는 그저 의미가 있을 뿐입니다. 단지 인생의 엄숙한 의미를 음미하면 된다고 하면 용기가 생깁니다.'

그저 흘러지나가는 누군가가 저런 말을 했다면 코웃음 치며 넘겼겠지만, 세상의 모진 풍파를 이겨낸 유키에가 써내려간 저 말은 진실로 가슴에 와닿았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너 불행하지?'라고 물어봐도 행복하게 웃을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저것이였으니까. 유키에의 불행한 인생에 눈물을 흘리다가도 마지막에 웃을 수 있는 까닭은, 아마 저 말 때문일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생에는, 그저 의미가 있을 뿐이니까 천천히 음미하면 될뿐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