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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혜신이 있다고 한 곳은 강남의 코엑스였다.

인사동을 거쳐 종로로, 안국동의 북촌을 지나 경복궁까지 자주 걸었던 혜신이 어쩐 일로 강남 한복판에, 그것도 빛 하나 들지 않는 코엑스에 있다는 건지. 수화기 너머의 혜신의 목소리는 숨이 차는 듯 느껴졌고 뭔가 쫓기는 듯 했다.

 

수는 코엑스에 있는 어느 패스트 패션 매장에서 옷을 고르고 있는 혜신을 보았다. 멀리서 바라본 그녀는 뭔가에 화가 난 듯 행거를 밀어젖히며 옷가지들을 함부로 뒤적이고 있었다. 어느 것 하나에 집중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수가 다가오자 혜신이 얼른 얼굴빛을 바꾸려했다. 여전히 불안한 눈빛이었다. 오늘은 무작정 쇼핑을 하고 싶다고 한 그녀는 매장을 나와 코엑스의 지하복도를 쉴 새 없이 누비며 돌아다녔다. 이것저것 닥치는 듯 옷들을 골라 담았다. 비슷한 컬러와 디자인임에도 두 벌씩 사기도 했고 같은 디자인이지만 컬러가 다르다는 이유로 두 벌씩 사기도 했다. 한창 쇼핑을 하던 혜신이 이번엔 1층에 있는 레스토랑으로 수를 끌고 갔다. 낮엔 맥주가 무한히 제공된다면서 밥도 먹지 않고 맥주를 들이켰다.

걱정스러운 눈으로 쳐다보는 수를 향해 혜신이 맥주를 들이키다 말고 수와 눈이 마주쳤다.

 

“가끔 이래, 뭐든 사고 싶어서 미쳐버리겠거든. 엄밀히 말해 사고 싶다기보다 뭔가를 사서 나에게 쥐어줘야 한다고나 할까.”

 

마치 자아가 둘로 분리된 듯 보였다. 그녀의 내부에서 떼쓰는 아이와 아이를 달래는 엄마의 실랑이가 벌어지고 있었다. 늘 떼쓰는 아이 쪽의 승리로 끝나는 것이 대부분일 것이다. 달래는 엄마의 상태는 지금 바닥까지 내려가 있음에 틀림없었다.

옷장에 옷이 산더미라도 입을 것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 여자였다. 그런 여자들의 심리가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은 물론이고 이제는 어느 정도 그런 심리를 이해할 수 있는 수준까지 되었다는 건 광고계에 감사할 만한 일이었다. 이것에 맞춰 저것을 사고, 저것을 사니 이것이 필요하다는 주장은 비난할 바가 아니었다. 다만 수의 눈에 걱정이 되는 것은 과잉쇼핑보다 쉴 새 없이 들이키고 있는 맥주가 더 문제였다.

 

“예전엔 말이야. 언젠가 쇼핑하고 목이 말라 미치겠더라고. 그래서 혼자 와서 맥주를 미친 듯이 마셨지. 오늘은 그래도 너라도 있으니 좀 살겠다.”

 

“뭔가 안 좋은 게 있구나. 그렇지?”

 

“지금까지 너한텐 긍정적인 면만 보여준 거야. 이번엔 이런 면도 있다는 걸, 그냥 보여주고 싶었어.”

 

혜신의 눈에 초점이 사라지고 있었다. 수 역시 사라져가는 초점 속으로 들어갈 마음은 없었다. 아프다는 거. 어떤 이유로 인해 아파서 견디지 못하는 것이 이런 건가. 의외로 수가 차분하게 혜신을 대하자 혜신도 차츰 안정을 찾았다. 그러더니 혜신이 테이블에 머리를 박고 졸기 시작했다. 한낮의 햇살이 레스토랑의 창으로 밀어닥쳤다. 차라리 처음부터 이렇게 지상 위에서 시간을 보냈으면 더 좋지 않았을까. 컴컴한 지하바닥을 왜 그렇게 헤매고 다녔을까. 창도 없고 먼지만 많은 의류매장의 침침한 조명이 생각나 수는 마음이 무거워졌다.


간신히 혜신을 깨워 코엑스 앞 벤치가 있는 곳까지 걸어 나왔다. 커다란 쇼핑백 여러 개를 한쪽 어깨에 걸치고 한 팔로 그녀의 팔을 붙잡고 걸었다.

비워진 곳을 맥주 따위로 채워야 할 문제가 아니었다. 반대로 가득 고인 것들을 토해내야 할 듯 싶었다. 언젠가 본 ‘러브레터’란 영화에서 여주인공이 외치던 ‘오갱기데스까’가 귀에 맴돌았다. 혜신에겐 그런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그때를 떠올리니 더 인상적이었던 건 사랑했지만 죽어버린 남자 주인공이 아니라 당시 여주인공의 남자 친구였다. 그저 뒤에서 묵묵히 바라봐 주던 남자였다. 수는 그 남자가 어떻게 생겼는지, 어떤 역할을 했는지 기억해내고 싶었지만 떠오르지 않았다.

 

“나, 부탁이 있어.”

 

정신을 잃었을 거라 생각했던 혜신이 고개를 들어 수의 눈을 보며 이야기했다.

 

둘은 이 주변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음이 분명했다.

해가 지기도 전에 이런 20층 특급호텔의 객실을 잡는 건 수로선 상상 해본 적이 없었다. 수가 쇼핑백들을 내려놓고 커튼을 걷어 도심 위로 펼쳐진 하늘을 보는 사이 혜신은 하얀 시트를 둘러쓰곤 얼굴을 벽 쪽으로 돌린 채 잠이 들었다. 오후만 되면 잠이 밀려온다는 건 알지만 꼭 이런 곳에서 잠을 청해야하는 건가.

 

수는 한동안 쥐죽은 듯 소파에 앉아 잠자코 밖을 쳐다보았다. 한바탕 소동을 끝나자 머릿속이 텅 빈 것처럼 고요해졌다. 밖은 서서히 빛을 잃어가고 있었다. 이대로 여기서 하룻밤을 보낼 것인가. 수는 잠시 머뭇거리다 잠이 깨면 도움이 될 만한 약을 사러가기로 했다. 어차피 자신이 없는 것이 숙면에 도움이 될 것이다.

 

가까운 약국에서 약을 산 뒤에도 발걸음은 어쩐지 쉽게 호텔로 되돌아가지 못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오늘의 일이 자꾸 마음에 걸렸다. 혜신을 생각하면 드는 약간은 시리고 아픈 이 감정은 도대체 뭘까? 혹시 이런 게 사랑일까? 이대로 차를 타고 집으로 향해버리고 싶은 마음과 그대로 방으로 올라가 그녀의 옆에 눕고 싶다는 욕망이 반반 나뉘어졌다.

 

수는 밤이 완전히 까맣게 내린 후에야 서성이던 발걸음을 혜신이 있던 방으로 돌렸다. 혜신은 여전히 고개를 옆으로 돌린 채 자고 있었다. 수는 천천히 침대 옆으로 발길을 옮기곤 약을 주머니에서 꺼내어 침대 옆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곤 한동안 그녀를 쳐다보며 침대 구석에 앉았다.

 

바로그때 수는 자신의 옷자락을 잡아당기는 손길을 느꼈다. 혜신은 자고 있지 않았다. 한동안 옷자락을 붙잡힌 채 수는 그녀의 다음 행동을 기다렸다.

 

“나 모델 생활하면서 이리 저리 참 많이도 돌아다녔어. 그땐 지방에 살던 때니까. 서울에 올라오면 호텔에서 자곤 했었어. 그때 엄마 사업이 한창 잘되었고 아빠가 할 일이 없을 때였지. 그래서 엄만 나를 아빠에게 맡겼어. 아빠가 일종의 매니저가 된 거지. 엄마가 짜놓은 스케줄대로 아빤 나를 데리고 촬영장을 다녔어. 아빤 내가 그런 일을 하는 게 못마땅했지만 내색을 안했어. 단지 걱정을 했었지. 촬영이 잘되는 지 잘 살펴보라던 엄마 말은 듣지 않고 그저 촬영장의 공기가 차가운지 먼지가 많지는 않은지. 밤샘으로 힘들어하지는 않은 지 그런 것만 걱정했지.

 

한번은 밤샘 촬영을 하고 호텔에 왔는데 무지 열이나고 아팠어. 새벽녘에 한참 잠이 들었다 깨어보니 아무도 없는 거야. 너무나 무서웠지. 그냥 내방도 무서웠는데 낯선 호텔방이라니. 근데 너무 아프고 무서운데도 아빠도 없는 거야. 혹시나 날 두고 떠난 건 아닐까하는 생각을 하다 깜박 잠이 들었지. 그런데 다시 눈을 떠보니 아빠가 내 옆에 약과 물을 놓고 있더라. 그 새벽에 어디서 약을 구해왔을까. 그때 부여잡았던 아빠의 옷자락. 그 서늘한 옷자락......“

 

혜신은 울고 있었다. 수는 그대로 꼼작하지 않은 채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자신의 옷자락에서 느끼고 있을 혜신의 마음을 투영해보았다. 한 여자의 남자가 된다는 건 반드시 애뜻한 사랑의 감정만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지금은 그녀의 곁에 없는 아버지를 대신해 아버지와 비슷한 존재가 되어보는 건 어떨까. 수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둘은 어느새 껴안고 있었다. 처음엔 수의 품에 혜신이 얼굴을 묻었고 수가 혜신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눈물을 닦아주자 수도 눈물이 핑 돌았다. 이번엔 혜신의 품에 수가 얼굴을 묻었고 혜신이 수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둘은 한동안 서로를 쳐다보다 낮은 소리로 웃었고 입을 맞추었다. 격정적인 키스가 있었고 한동안 서로를 안았다가 서로의 뺨과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정신을 차렸을 땐 혜신이 수의 품에 얼굴을 묻고 자고 있었다. 혜신은 깊은 잠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마른 혜신의 몸에서 깊은 잠의 기운이 스며왔다. 오랫동안 자는 것에 길들여진 몸이었다. 가끔씩 혜신의 몸이 약하게 경련을 일으켰다. 그럴 때 마다 수는 혜신의 팔이며 어깨를 잡아 주었다. 수는 혜신 옆에서 얕은 잠을 잤다. 아무래도 이렇게 높은 곳에선 푹 잘 수가 없었다. 그래도 혜신만큼은 행복한 잠을 자고 있을 거란 확신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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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로 자주 혜신과 수는 만났다.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자연스레 만났다. 만나면 주로 걸었다. 걷다가 가끔 테이크 아웃 커피나 편의점에서 파는 50퍼센트 할인된 아이스크림을 먹기도 했고 군것질을 하며 한참을 앉아있기도 했다.

 

처음엔 집 근처를 걷다가 나중엔 버스를 타고 서울까지 나갔다. 주로 혜신이 수를 끌고 다녔다. 지리에 어두운 수로서는 혜신이 놀랍기 그지없었다. 혜신은 지하철과 버스의 노선을 꿰고 있었다. 어디로 가자고 말하면 마치 공부라도 해둔 것처럼 가장 저렴하면서도 빨리 갈 수 있는 방법을 찾아냈다. 잘 빠진 외제차 옆 자리가 아니라면 밖에 나서지도 않을 것 같은 애가 저럴 수도 있겠구나. 그런 부조화가 수에겐 신선하게 다가 왔다.

 

가벼운 스니커즈를 신고 성큼성큼 걸어가는 혜신의 발걸음은 잘 훈련된 걷기 선수를 보는 것 같았다. 수가 부지런히 걷지 않으면 뒤쳐질 지경이었다.

 

“제작사를 나온 이후 처음엔 집에만 틀어박혀 있었어. 엄만 일 때문에 늘 집에 없었고 그렇다고 오빠가 있는 미국으로 갈 수도 없었어. 정말 어디로든 갈 수가 없었지. 일종의 대인 공포 같은 게 생긴 거야. 친구도 없었고 사회생활도 어떻게 해야 할 바를 몰랐지. 자살충동까지 생겼어. 정말 이젠 아무 필요도 없는 존재가 되어버렸다는 생각 때문에. 몇 년을 그러다 이대론 너무 억울하다 싶었지.”

 

“그래서 걷기 시작한 거야?”

 

“아니. 걷기는 그 다음이고. 처음에 한 건 대중교통 타기였어.”

 

혜신이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하려는 듯 벤치에 걸터앉았다.

 

“살아오면서 내가 부족했던 게 뭔가 곰곰이 생각해 봤지. 제일 먼저 떠오르는 건 어디든 혼자 갈 수가 없었던 거야. 어릴 때부터 엄마나 아빠가 데려다 주는 차로만 다녔지. 학교도 그랬고. 소속사에 들어가니 주구장창 스튜디오, 연습실, 숙소에만 있었고 어디론가 갈 땐 항상 매니저 차나 밴을 타고 다녔지. 그야말로 버스 하나 못타는 바보가 된 거지.

 

정말 기분이 더러울 땐 언젠지 알아? 가끔 매니저가 내가 살던 신도시로 직접 데려 준다고 하면서 잘 뚫린 도로는 놔두고 일부러 인적이 드믄 길로 가는 거야. 불빛도 없는 저수지 옆길 같은 곳. 거길 지나면서.......“

 

혜신이 뭔가 맺힌 듯 말을 멈췄다. 분명 그 과정에 무슨 일이 있었음이 분명했다. 하지만 수는 더 묻진 못했다.

 

“마치 날 이 근처에 버리고 가버릴 같은 기분이 들었지. 실제로 가끔이지만 그런 길에 차를 세우고 훈계한답시고 협박을 늘어놓기도 했지. 사실, 내색은 안했지만 엄청 무서웠어. 정말 스무 살이 넘어서 내발로 내 집을 찾아가는 것도 못하다니. 졸업식 날 너랑 걸어서 연습실까지 간 날. 기억나? 아마 내발로 걸어서 그렇게 멀리 갔던 건 그날이 처음이었을 거야. 그땐 무작정 걷기만 한 건데. 어떻게 가다 보니 연습실까지 가게 되더라.”

 

혜신이 자신의 스마트폰을 꺼내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정말 좋은 세상이야. 어디든 내가 가고 싶은 곳은 다 알려주잖아. 이거 하나만 믿고 밖으로 나갔어. 아무 곳으로든 떠난 뒤 스스로 집으로 찾아오는 거야. 어린애 같지. 하지만 처음 아주 멀리 나가봤어. 광역버스를 타고 지하철도 타고 다시 마을버스도 타고, 그렇게 밤이 늦어 집으로 돌아오는데, 다들 그렇게 하는 건데. 처음 그렇게 돌아와서 얼마나 기분이 좋았는지 몰라.”

 

혜신이 수를 보더니 무안한 듯 두 눈을 질근 감고는 혀를 쭉 내밀었다. 벤치에 앉은 둘 옆으로 기분 좋은 바람이 불어왔다. 혜신의 목에 감겨있던 스카프가 순간 크게 나풀거리며 수의 얼굴을 간지럽혔다.

수가 스카프를 쥐었다. 그러고 보니 스카프를 안 한 날이 없었던 것 같아. 수가 중얼거리자 혜신은 더 바짝 스카프를 목에 둘렀다.

 

“그 자식, 차만 타면 한 손은 핸들을 잡고 한 손으론 목을 쓰다듬는 거야.”

 

마치 상처 위에 대는 붕대처럼 스카프를 두르는 혜신을 보자 수는 울컥함을 느꼈다.

 

“도대체 어떤 인간이야. 한 번 보고 싶군.”

 

수는 순간 혜신을 어깨를 감싸주고 싶었다. 다시 일어난 혜신이 걷기 시작했다. 수는 그저 묵묵히 뒤를 따랐다.

둘은 한번 걷기 시작하면 두 시간 정도를 쉬지 않고 걸었다.

만나면 무조건 걷는 날이 더 많아졌다. 수는 정처 없는 걸음 속에서 지난날 기타를 연주하다 경험한 ‘플레잉 하이’와 비슷한 것을 느꼈다. 2시간 정도 지나고 몸에 땀이 돌고 힘이 빠져나가는 순간, 그때부터 걷는 자신만 남게 되고, 거기서 더 나아가면 걷는 자신을 또 다른 자신이 보는 것 같은 착각이 일었다.

 

그때부터 누군가가 자신에게 끊임없이 속삭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중 선명하던 한마디는 ‘괜찮다’였다. 뭐가 괜찮다는 건지. 늘 한 발 앞서 걷고 있는 혜신이 괜찮다는 건지 자신이 그렇다는 건지, 그건 그때나 지금이나 알 수가 없었다. 왜 그 소리는 힌트만 줄 뿐 하나의 생각으로 정리되지 않는 것일까?

 

머리를 땅바닥에 박고 걷다가 정신이 들면 나풀거리는 혜신의 스카프 자락을 확인하며 수는 걸었다. 걷는 면에선 혜신이 더 능숙했다. 남자를 뒤에 두고 걸으면서도 제법 시간의 단련을 거친 듯 거침이 없었다. 스카프 자락과 앙상한 종아리. 그런 뒷모습만 봐도 가슴이 뭉클했다. 그 뭉클함 이란 자신과 비슷한 이야기가 그녀에게도 있음에 느끼는 동질감이었다. 가끔 그녀가 고개를 돌려 그런 동질감이 가득한 두 눈으로 수를 쳐다볼 때 수는 자신도 모르게 자신을 보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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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장. 높은 곳과 낮은 곳

 

 

 

Bill Evans & Jim Hall, Stairway To The Stars

Telepopmusik, Tuesday

Ivy, Baker

Led Zeppelin, Stairway To Heaven

Jimi Hendrix, Voodoo Child

 

 

 

 

 

1

 

맥주라도 한 잔하지 않겠냐고 전화를 건 쪽은 수였다.

혜신이 살고 있던 원룸은 수가 살고 있는 원룸과 멀지않았다. 혜신이 수가 사가지고 온 맥주에 안주거리를 준비하는 동안 수는 천천히 그녀의 방을 둘러봤다. 커다란 침대가 하나 있었고 침대 옆으로 한쪽 벽은 장식장과 책장을 겸한 공간이 되어 있었다. 책과 기념품, 음악 CD등이 꽂혀있었다. 정돈은 잘된 편이었다. 부엌 싱크대는 정돈이 잘 되어있다기보다 음식을 조리한 흔적이 거의 없었다. 커다란 통유리 앞으로 작은 소파와 테이블이 있었다. 그 뒤로 빛을 완전히 가릴 두꺼운 암막커튼이 보였다. 방안 어디에도 그녀의 기타는 보이지 않았다.

“아이들 동화책이 많네.”

 

유일하게 볼거리가 있던 벽면 앞에 선 수가 책 한권을 뽑았다. 제법 만들어진지 오래되어 보이는 책을 펼치자 희미하게 시간의 냄새가 풍겼다.

 

“아이들이 보던 건데. 이모가 버리려는 걸 내가 가져왔지.”

“동화책으로 뭘 하게?”

“뭘 하긴, 내가 보려고.”

“요즘 동화책이 유행이야?”

수가 마치 탐정이라도 된 듯한 표정으로 책을 넘기고 있었다.

“일종의 재활 프로그램이야.”

혜신의 캔 맥주 따는 소리가 시원하게 들려왔다.

 

“내가 어릴 때 동화책을 못 읽고 자랐잖아.”

 

그러고 보니 수도 그랬다. 어린 시절 동화책을 읽을 나이에 아버지를 잃었다. 한창 자신을 키우기 위해 엄마가 고생하던 시절이었다. 나름 책을 많이 읽고 컸다고는 생각했지만 즐겁게 동화책을 읽은 기억도, 엄마가 동화책을 읽어준 기억도 없었다.

 

수는 처음 혜신으로부터 그녀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들었다. 혜신은 어린 시절부터 아역 배우 생활을 해왔다. 모델 에이전시에 소속이 되어 각종 촬영장을 누볐다. 밤이 늦도록 카메라 앞에 섰고 먼지가 가득한 스튜디오 안에서 김밥과 과자들을 먹어가며 광고촬영을 했다. 한 컷을 찍는 데만 해도 몇 시간이 걸리는 촬영장에서 미성년자를 위한 배려는 없었다. 촬영은 새벽까지 이어지기도 했고 세트장 구석에서 쪽잠을 자다가도 호출만 받으면 카메라 앞에서 울고 웃어야했다.

 

“그거 알아? 난 초등학생도 되기 전부터 다이어트를 했다고. 세상엔 먹어도먹어도 더 먹으라고 등 떠미는 부모들이 대부분이라던데, 그 나이 때 벌써 칼로리 따져가며 먹었단 말이야.”


혜신이 고칼로리의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태어나서 여태 살이라곤 붙어본 적이 없어보이는 팔로 맥주 캔을 들고 있었다.

 

“우리 둘 다 어린 시절이 거세된 셈이군.”

 

수가 ‘우리’라는 말을 썼다. 수와 혜신은 자신들의 신상에 관한 자세한 이야기를 나눈 적은 없지만 그다지 안정적이지 못했던 자신들의 유년 시절은 이미 서로 예상했을 것이다. 어느새 맥주를 들이키던 혜신이 동화책을 한 권 가지고 와서 앉았다.

 

“어제 이 책을 봤는데. 세로로 보는 책이더라.”

 

수가 혜신으로부터 넘겨받은 책을 세로로 돌린 뒤 천천히 페이지를 넘겼다.

 

“내용이 별거 없는데도 그냥 멍하니 봐지더라고. 한 장에 건물의 10층씩을 그려놓았어 넘길 때마다 10층씩 나오지 그러다 100층까지 구경하게 되는 거야. 각층마다 샤워하는 개구리, 거꾸로 달린 박쥐에..... 그러고 보니 이런 걸 멍하니 보고 지냈던 시절이 없었던 거 같아.”

 

수가 맥주를 마시다 말고 테라스 쪽으로 걸어가며 말했다.

 

“그건 그렇고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수의 물음에도 혜신은 대꾸할 기분이 아닌 듯 멍하니 책에서 시선을 돌려 창밖을 바라봤다. 이제 막 저녁에서 밤으로 접어드는 시간이었지만 혜신은 벌써부터 힘이 빠진 듯이 졸려보였다.

 

“내가 보기엔 너도 재활이 좀 필요한 거 같은데.”

 

혜신은 맥주 캔을 내려놓고 손등으로 입가를 슬쩍 닦았다. 캔을 탁자 위에 놓고 소파에 가로 누웠다. 그리곤 누운 채로 리모컨으로 음악을 틀었다. 곧 아이팟과 연결된 스피커에서 재즈 기타와 피아노 소리가 반복해서 들려왔다. 어느 쪽도 흥분하지 않고 차분하게 연주를 이어갔다. 수에게 인상적이었던 건 아이팟 화면 위에 띄워진 앨범 자켓이었다. 수면 위에 부유하는 한 여인은 흐르는 물에 몸을 맡긴 채 어디론가 떠내려가는 모습이었다. 어찌 보면 죽음과도 연관되어 있는 것 같았다.

 

“재즈를 듣는 줄은 몰랐네.”

 

“딱히 잘 알아서, 좋아서 듣는 건 아니야. 그냥 시대에서 벗어난 음악, 이런 거 듣다보면 딴 세상에 있는 기분이거든.”

 

혜신이 엄마 뱃속의 태아처럼 몸을 잔뜩 웅크렸다. 두꺼운 면 원피스 사이로 살점이 없는 두 다리가 삐져나왔다. 수는 침대 끝에 앉아 음악을 들으며 맥주를 마시다가 다시 동화책들을 펼쳤다. 한동안 생각지도 않았던 그림과 글자들과 음악들이 머릿속을 혼란스럽게 만들더니 어느새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마치 공기 속을 걸어 다니듯 재즈의 베이스음이 공간을 헤매고 다녔고 혜신은 그 저음 속에 낮게 가라앉은 채 잠이 들었다. 잠 속으로 달아남과 동시에 음악은 장르는 완전히 다른, 그러나 분위기만큼은 재즈와 크게 다르지 않은 것으로 바뀌었다.

She's reaching out to touch me

Struggling to breathe

As I feel her she falls into her dreams

 

처음 들어보는 음악이었다. 귀에 들어오는 가사가 지금 자고 있는 혜신과 전혀 어울리지 않은 것 같기도 했고 의외로 잘 어울리는 것도 같았다.

 

I like the way the day has begun…

 

마지막 가사가 묘하게 다가 왔다. 한동안 자고 일어나면 빛 한 점 없는 어둠 속에서 하루가 시작 될지도 몰랐다. 현실의 하늘은 노래 가사처럼 곧 밝아 질 것이 아니라 더 어두워 질 거라는 생각에 기분이 가라앉았다.

 

이어서 쓸쓸하고도 낮은 여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소절이 끝날 때마다 트럼펫이 하루의 마감을 알리는 듯한 인상적인 멜로디를 연주했다.

 

He's wasted his time

Now He's wasting away



지금껏 이런 음악을 들었구나. 혜신의 음악적인 취향까지 안다, 라고 생각했던 건 수의 착각이었다. 계속해서 나오는 곡들은 엠비언트가 강한 일렉트로닉 혹은 트립합 음악이 대부분이었다. 수가 등장하지 않았던 인생의 과도기에 그녀가 들었던 음악은 대부분 우울하고 몽환적이었다. 그 음악들은 매력적이었지만 마음 한 구석을 축축하게 했다. 듣고 있는 내내 스웨덴이나 노르웨이 같은, 눈이 많이 내리고 스산하고 건조한 공기로 가득한, 그런 곳에 있는 것 같았다. 그녀 역시도 수가 그랬던 것처럼 음악을 약으로 먹었는지도 몰랐다. 수가 먹었던 것 보다 더 위험하고 치명적인 약을.

 

처음 맥주 캔을 딸 때만 해도 오랜만에 만난 남녀 사이에 어떤 긴장감이 있었다. 수는 이 집의 어느 곳엔 한없이 늘어지고 쳐지는 공간으로 이끄는 통로가 있다고 생각했다. 어느 새 그 긴장감은 뚫려진 구멍 사이로 빠져나가버린 것 같았다. 수 역시도 혜신을 따라 드러눕고 싶었다.

 

저녁은 완전히 밤으로 넘어가 집밖은 불빛들로 가득했다. 수는 불을 켜지 않고 잠이든 혜신을 한동안 바라보다가 담요를 덮어준 뒤 집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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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인간들이 수 천 번의 삶을 살아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면

저건 천국으로 가기 직전, 마지막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야."

영화가 끝나자 뒤에서 유진을 안고 있던 남자가 혼잣말처럼 영화평을 읊조렸다. 영화는 유진이 DVD로 구해온 ‘원스(Once)’라는 음악영화였다. 무명의 남자 뮤지션이 역시 무명의 여자 뮤지션을 만나 어려운 삶 속에서도 음악의 꿈을 키우다 결국 남자는 음악의 도시 런던으로 떠난다는 내용이었다.

 

군대를 가기 전 유진은 이 영화를 남자에게 꼭 보여주고 싶었다. 유진은 영화에서 보여지는 둘은 아름답고 멋있어 보였지만 자신들도 그들과 다르지 않다고 상상했다. 아니 그들보다 더 나은 조건도 많았다.

 

“넌 그 남자보다 더 잘생겼어.”

“넌 그 여자보다 더 예뻐. 게다가 그 여자처럼 돌봐야 할 아기도 없잖아.”

“넌 그 남자 보다 기타도 더 잘 쳐.”

“하지만 난 그 남자처럼 멋진 곡을 만들지도 못해. 그만큼 노래도 못해.”

한참을 비행기 놀이를 하던 둘은 조심스럽게 현실로 내려앉았다. 그리곤 유진이 뭔가를 생각해낸 듯 남자를 향해 고개를 홱 돌렸다.

 

우리도 런던으로 가자.

 

런던이란 말이 유진의 가슴 속에 깊이 퍼져나갔다. 현실적으론 서울로 가는 것이 옳았다. 그러나 유진은 런던을 품고 싶었다. 한 번도 상상해 본 적 없는 곳. 어릴 적 유진은 막연히 파리나 뉴욕은 그려 보았지만 런던이란 곳은 한 번도 그려 본적이 없었다. 어쩐지 조금은 우울하고 황량할 것 같은 도시일 것이다. 그곳에 가면, 그 곳에 갈 수만 있다면, 술에 취하지 않고도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들 틈에서 미친 짓을 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그리고 춤을 추든 노래를 부르든 그저 낯선 세계에서 온 이방인으로 묵묵히 보아 넘길 그곳의 사람들이 그려졌다.

 

낮에 보았던 그 이국의 관객들처럼 어쩌면 자신들을 더 이해해 줄 수 있는 건 완전한 이방인들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런 곳에서 유진은 남자와 하고 싶은 모든 것을 마음껏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돈? 돈 따위는 상관없었다. 어디에 내놔도 굶어죽지 않을 자신은 있다. 문득 거기까지 상상한 유진이 얼굴을 들어 남자를 보았다.

 

“엉뚱하지? 달리 미친년이겠어?”

 

유진이 입을 쭉 내밀자 남자의 손이 기다렸다는 듯 두 손으로 유진의 얼굴을 감쌌다. 둘은 한동안 말없이 서로를 쳐다보았다. 남자는 자신의 얼굴이 그녀의 눈동자에 선명히 담겨있음을 보았을 것이다. 유진은 어느새 그의 품에서 사랑스런 여인이 되어있었다. 그늘졌던 정신세계는 음악으로 충만했고 사랑을 받은 젊은 육체는 싱싱하게 물이 올라있었다.

 

그래, 런던에서 만나자.

 

남자는 짧게 대답하고는 유진의 이마에 길게 입을 맞추었다. 왜 런던으로 함께 가자, 가 아니라 런던에서 만나자, 인지 묻고 싶었지만 유진은 잠자코 남자의 입맞춤을 받았다. 남자는 다시 이불 속으로 들어가 유진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마치 유진이 품고 있던 생명력을 모두 빨아들이려는 듯 유진의 몸 구석구석에 입을 맞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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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으로 들어가는 배의 선상에서 유진은 객실 유리에 비친 자신을 보았다. 기타를 둘러멘 모습이 마치 콘서트를 앞 둔 가수처럼 보였다.

 

군 입대 이틀 전 둘은 짧은 여행을 계획했다. 여행의 아이디어는 유진이 냈다. 그와 만나게 해준 기타와 함께 떠나는 여행이었다. 유진은 지금까지 남자와 더불어 연습했던 곡들을 불러보고 싶었다. 그것도 스튜디오나 노래방 같은 밀폐공간이 아닌 활짝 열려진 공간에서. 그러기에 번잡하지 않은 평일의 그 섬은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

 

섬에 도착은 둘은 한동안 다른 관광객처럼 주변을 산책했고 테이크 아웃 커피를 마셨고 이야기를 나눴다. 눈이 부시도록 햇살은 따사로웠고 바람은 없었으며 공기는 안온했다. 섬의 안쪽으로 깊숙이 들어가자 넓은 잔디밭이 펼쳐졌다. 어떤 용도인지는 몰라도 반쯤 뜯겨나간 무대가 보였다. 유진은 남자의 손을 이끌고 반쪽짜리 무대 쪽으로 걸었다. 그리곤 기타를 꺼내들었다.

 

막상 분위기를 잡으려니 어색한 느낌에 자꾸 웃음이 나왔다. 꼭 결심한 바였기에 야무지게 마음을 다잡고 유진은 기타를 잡았다. 벤치에 앉은 남자는 무대에 걸터앉아 두 다리를 그네처럼 들썩이는 유진을 바라보았다. 너무 가까이 있으며 방해가 될 것이 분명했다. 유진이 기타 줄을 조율하자 마치 작은 콘서트가 시작될 것 같은 긴장감이 흘렀다. 유진은 피크를 잡지 않고 자신의 손가락으로 부드럽게 기타 줄을 쓰다듬듯 쳤다. 지나가는 사람들의 관심을 끌지 않고 오로지 자신과 남자를 위해서만 연주하겠다는 듯이.

 

한 달 넘게 맹연습해서 익힌 ‘블랙버드(Black bird)’를 불렀다. 원곡인 비틀즈 버전이 아니라 사라 맥클라란(Sara Mclachlan)이 불렀던 버전이었다. 다소 건조하면서도 크게 높낮이가 없이 잔잔하게 퍼져가는 곡이라 부르기에도 듣기에도 무리가 없었다. 노래에 조금씩 빠져들자 자연공간을 매질로 퍼져나가는 자신의 목소리가 귀에 닿았다. 숲을 거닐며 불렀던 익숙한 느낌. 그 느낌이 살아나자 한결 마음이 가벼워졌다.

 

한곡을 부른 후 배낭에 넣어둔 맥주 한 캔을 따서 단숨에 들이키고는 역시 사라 맥클라란의 명곡 ‘애디아(Adia)’를 이어서 불렀고 조금 더 자신이 붙자 한영애의 ‘누구없소’를 걸죽하게 느낌을 잡아 불렀다. 남자는 미동도 않고 유진의 연주를 바라보았고 희미하게 미소를 머금었다. 거기 누구 없소, 를 거의 다 부를 때쯤 유진은 남자가 앉은 벤치 뒷편으로 몇몇의 여자들이 길을 멈추고 자신을 보고 있음을 알아챘다.

 

40대에서 50대 가량의 아줌마들이었다. 모자와 운동화 차림에 크로스백을 맨 모습이 일본인 관광객들로 보였다. 아마도 드라마의 촬영지로 유명한 이곳에 관광을 왔을 것이다. 젊은 애들이 섬에서 노래를 부르네, 하며 지나칠 만도 한데 이국인들은 미동도 않고 유진의 노래를 들었다. 마치 오늘의 관광 코스에 포함된 일정이라는 듯.

 

노래를 마치자 그들은 진심어린 박수를 보냈다. 유진에겐 노래를 하고 처음 받아본 박수다운 박수였다. 박수를 받자 유진의 가슴 속에 엉뚱한 기운이 꿈틀거렸다. 타인 앞에서 평상심을 유지하며 안으로 들어갔던 남자와 달리 유진은 조금 더 자신을 더 보여주고 싶은 열망에 자신을 밖으로 밀어냈다. 유진은 기타를 안고서 자기도 모르게 관객들에게 말을 하기 시작했다.

 

전 앞에 앉아있던 저 친구에게 기타를 배웠고 음악을 배웠습니다.

이제 곧 저 친구가 군대를 가거든요.

가기 전에 꼭 이렇게 노래를 한 번 불러 주고 싶었습니다.

지금 부를 곡은 저 친구 몰래 혼자 연습한 건데요.

보통은 연습하면 꼭 중간중간 저 친구에게 보여주고 소감도 물어보고, 그럼 저 친구가 틀린 곳도 잡아주곤 했었는데.

한 곡 정도는 이 자리에서 저 친구를 놀라게 해주고 싶었거든요.

 

관광객들은 마치 한국어를 알아듣는 듯 유진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팽팽한 집중감이 유진 주변으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유진은 다시 노래를 시작했다.

곡은 앨라니스 모리셋의 ‘땡큐(Thank you’)였다. 언젠가 유진은 이곡의 뮤직비디오를 본 적이 있었다. 영상 속에서 앨라니스는 도시를 배경으로 실오라기 하나도 걸치지 않고 노래를 불렀다. 특별히 아름다운 몸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당당히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유진의 눈에 그건 누군가의 관심을 끌기 위한 쇼로 보이지 않았다.

준비한 곡들은 모두 부른 유진이 다시 관객들에게 말을 걸었다.

 

여러분 저 남자의 기타연주와 노래도 궁금하지 않으세요?

한번 들어 보실래요?

 

유진의 손가락이 남자를 가리키자 관광객들의 시선이 그대로 따라 움직였다. 남자를 보던 관광객들이 웃으며 박수를 쳤다. 언제 왔는지 뒤에는 서너 명의 아줌마들이 더 가세해있었다. 남자는 의연하게 걸어 나와 기타를 잡았다. 마치 이런 일을 예견했다는 듯이. 유진이 만들어 놓은 분위기를 그대로 이어가기 위해 남자도 몇 마디 멘트를 던졌다.

 

저도 학창시절 내내 기타와 함께 노래를 불렀습니다.

하지만 오늘 부를 노래가 최고라고 말하고 싶네요.

부르지도 않은 노래를 두고 최고라고 말하는 게 우습지만요.

전 확실히 말할 수 있습니다.

저 친구가 저한테 배웠다고 했는데 제가 배운 것도 많습니다.

음악이란 게, 오래 해왔다고 다 잘 하는 건 아니니까요.

 

그저 기타로, 음악으로 보낸 시간이 다른 것 뿐이죠.

 

말이 끝나기 무섭게 남자는 연주곡 한 곡을 연주했다. 손가락이 기타 줄 위를 미끄러지듯이 질주했다. 평소엔 보여주지 않았던 거침없고 파워풀한 모습이었다. 몇 마디의 전주가 이어지고 곧 손가락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엄청난 속주가 이어졌다. 순간 사람들 입에서 희미한 탄성이 쏟아져 나왔다.

 

록 밴드 '익스트림(Extreme)'의 '미드나잇 익스프레스(Midnight Express)‘는 록 기타의 천재이자 펑키 메탈이란 영역을 창조해낸 ‘누노 베텐코트(Nuno Bettencourt)’가 연주한 곡이었다. 포르투갈 출신기타리스트는 라틴음악이 품고 있는 흥겨운 리듬감을 그대로 하드록에 심어놓았다. 이 곡 역시 어깨를 들썩일 정도로 그루브가 충만했다. 남자는 원곡 보다 더 스피디하게 곡을 연주했다. 한 줄 한 줄을 칠 때는 손가락이 나비처럼 사뿐사뿐 줄 위에서 춤을 췄다. 중간중간 스트로크로 여섯 줄을 한꺼번에 내리 칠 때는 줄이 끊어질 정도로 강하게 쳤기에 유진은 혹시 기타 줄이 끊어지지나 않을까 두 손을 꼭 쥐기도 했다.

팽팽한 긴장감을 끝까지 유지하며 곡을 끝내자 경탄의 박수가 쏟아졌다. 연주소리를 들었는지 뒤에는 더 많은 사람들이 연주를 지켜보고 있었다.

 

이어 남자는 유진이 가장 좋아했던 ‘발라드 오브 빅 낫싱(Ballard of Big Nothing)’을 기타와 더불어 노래했다. 그리곤 유진이 그랬던 것처럼 멘트를 이었다.

 

저 친구가 이곳에 기타를 가져와 노래를 부르겠다고 했을 때

저도 꼭 들려주고 싶었던 곡이 있었습니다.

저나 이친구나 자주 만났던 시간이 일요일 오후였습니다.

저는 그때 너무나 행복했기에 늘 일요일은 오후만 있었던 걸로 기억됩니다.

그래서 저도 저 친구 몰래 이곡을 부르고 또 불렀지요.

 

남자는 잠시 고개를 숙이고 숨을 고르더니 좀 전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로 기타를 쳤다.

뭔가를 보여주겠다는 마음은 접고 본래 남자가 그러했듯이 자신의 내부 속으로 들어가려 했다. 음 하나하나를 섬세하게 연주하되 음과 음 사이에 충분한 여백을 두었다.

여전히 햇살은 따사로웠고 바람은 없었으며 공기는 안온했다. 일요일은 아니었지만 일요일만큼이나 고즈넉한 오후의 섬 전체가 남자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오후만 있던 일요일 눈을 뜨고 하늘을 보니

짙은 회색 구름이 나를 부르고 있네

 

생각없이 걷던 길 옆에 아이들이 놀고 있었고

나를 바라보던 강아지 이유없이 달아났네

 

나는 노란 풍선처럼 달아나고 싶었고

나는 작은 새처럼 날아가고 싶었네

 

작은 빗방울들이 아이들의 흥을 깨고

모이 쪼던 비둘기들 날아가 버렸네

 

달아났던 강아지 끙끙대며 집을 찾고

스며들던 어둠이 내 앞에 다가왔네

 

나는 어둠 속으로 들어가 한 없이 걸었고

나는 빗속으로 들어가 마냥 걷고 있었네

 

오후만 있던 일요일 예쁜 비가 왔네

오후만 있던 일요일 포근한 밤이 왔네

유진은 남자의 방에서 기타연습을 했던 어느 일요일 오후를 기억해냈다. 자신을 앞에 두고 벽에 기댄 채 눈을 감고 있었던 남자. 그는 자고 있던 게 아니었다. 유진은 갑자기 가슴 한 가운데로 뭔가가 밀려오는 것을 보았다.

 

노래가 끝나자 사람들의 다시 박수가 쏟아졌다. 둔탁하게 시작된 박수는 조금은 길게 이어져서 진짜 콘서트의 느낌이 들었다. 둘은 일어나 자신들 보다 연장자인 이국인들에게 감사의 뜻으로 허리를 굽혀 인사 했다. 관객들도 역시 허리를 굽혀 자신들 보다 젊은 이국인들에게 인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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