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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으로 들어가는 배의 선상에서 유진은 객실 유리에 비친 자신을 보았다. 기타를 둘러멘 모습이 마치 콘서트를 앞 둔 가수처럼 보였다.
군 입대 이틀 전 둘은 짧은 여행을 계획했다. 여행의 아이디어는 유진이 냈다. 그와 만나게 해준 기타와 함께 떠나는 여행이었다. 유진은 지금까지 남자와 더불어 연습했던 곡들을 불러보고 싶었다. 그것도 스튜디오나 노래방 같은 밀폐공간이 아닌 활짝 열려진 공간에서. 그러기에 번잡하지 않은 평일의 그 섬은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
섬에 도착은 둘은 한동안 다른 관광객처럼 주변을 산책했고 테이크 아웃 커피를 마셨고 이야기를 나눴다. 눈이 부시도록 햇살은 따사로웠고 바람은 없었으며 공기는 안온했다. 섬의 안쪽으로 깊숙이 들어가자 넓은 잔디밭이 펼쳐졌다. 어떤 용도인지는 몰라도 반쯤 뜯겨나간 무대가 보였다. 유진은 남자의 손을 이끌고 반쪽짜리 무대 쪽으로 걸었다. 그리곤 기타를 꺼내들었다.
막상 분위기를 잡으려니 어색한 느낌에 자꾸 웃음이 나왔다. 꼭 결심한 바였기에 야무지게 마음을 다잡고 유진은 기타를 잡았다. 벤치에 앉은 남자는 무대에 걸터앉아 두 다리를 그네처럼 들썩이는 유진을 바라보았다. 너무 가까이 있으며 방해가 될 것이 분명했다. 유진이 기타 줄을 조율하자 마치 작은 콘서트가 시작될 것 같은 긴장감이 흘렀다. 유진은 피크를 잡지 않고 자신의 손가락으로 부드럽게 기타 줄을 쓰다듬듯 쳤다. 지나가는 사람들의 관심을 끌지 않고 오로지 자신과 남자를 위해서만 연주하겠다는 듯이.
한 달 넘게 맹연습해서 익힌 ‘블랙버드(Black bird)’를 불렀다. 원곡인 비틀즈 버전이 아니라 사라 맥클라란(Sara Mclachlan)이 불렀던 버전이었다. 다소 건조하면서도 크게 높낮이가 없이 잔잔하게 퍼져가는 곡이라 부르기에도 듣기에도 무리가 없었다. 노래에 조금씩 빠져들자 자연공간을 매질로 퍼져나가는 자신의 목소리가 귀에 닿았다. 숲을 거닐며 불렀던 익숙한 느낌. 그 느낌이 살아나자 한결 마음이 가벼워졌다.
한곡을 부른 후 배낭에 넣어둔 맥주 한 캔을 따서 단숨에 들이키고는 역시 사라 맥클라란의 명곡 ‘애디아(Adia)’를 이어서 불렀고 조금 더 자신이 붙자 한영애의 ‘누구없소’를 걸죽하게 느낌을 잡아 불렀다. 남자는 미동도 않고 유진의 연주를 바라보았고 희미하게 미소를 머금었다. 거기 누구 없소, 를 거의 다 부를 때쯤 유진은 남자가 앉은 벤치 뒷편으로 몇몇의 여자들이 길을 멈추고 자신을 보고 있음을 알아챘다.
40대에서 50대 가량의 아줌마들이었다. 모자와 운동화 차림에 크로스백을 맨 모습이 일본인 관광객들로 보였다. 아마도 드라마의 촬영지로 유명한 이곳에 관광을 왔을 것이다. 젊은 애들이 섬에서 노래를 부르네, 하며 지나칠 만도 한데 이국인들은 미동도 않고 유진의 노래를 들었다. 마치 오늘의 관광 코스에 포함된 일정이라는 듯.
노래를 마치자 그들은 진심어린 박수를 보냈다. 유진에겐 노래를 하고 처음 받아본 박수다운 박수였다. 박수를 받자 유진의 가슴 속에 엉뚱한 기운이 꿈틀거렸다. 타인 앞에서 평상심을 유지하며 안으로 들어갔던 남자와 달리 유진은 조금 더 자신을 더 보여주고 싶은 열망에 자신을 밖으로 밀어냈다. 유진은 기타를 안고서 자기도 모르게 관객들에게 말을 하기 시작했다.
전 앞에 앉아있던 저 친구에게 기타를 배웠고 음악을 배웠습니다.
이제 곧 저 친구가 군대를 가거든요.
가기 전에 꼭 이렇게 노래를 한 번 불러 주고 싶었습니다.
지금 부를 곡은 저 친구 몰래 혼자 연습한 건데요.
보통은 연습하면 꼭 중간중간 저 친구에게 보여주고 소감도 물어보고, 그럼 저 친구가 틀린 곳도 잡아주곤 했었는데.
한 곡 정도는 이 자리에서 저 친구를 놀라게 해주고 싶었거든요.
관광객들은 마치 한국어를 알아듣는 듯 유진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팽팽한 집중감이 유진 주변으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유진은 다시 노래를 시작했다.
곡은 앨라니스 모리셋의 ‘땡큐(Thank you’)였다. 언젠가 유진은 이곡의 뮤직비디오를 본 적이 있었다. 영상 속에서 앨라니스는 도시를 배경으로 실오라기 하나도 걸치지 않고 노래를 불렀다. 특별히 아름다운 몸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당당히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유진의 눈에 그건 누군가의 관심을 끌기 위한 쇼로 보이지 않았다.
준비한 곡들은 모두 부른 유진이 다시 관객들에게 말을 걸었다.
여러분 저 남자의 기타연주와 노래도 궁금하지 않으세요?
한번 들어 보실래요?
유진의 손가락이 남자를 가리키자 관광객들의 시선이 그대로 따라 움직였다. 남자를 보던 관광객들이 웃으며 박수를 쳤다. 언제 왔는지 뒤에는 서너 명의 아줌마들이 더 가세해있었다. 남자는 의연하게 걸어 나와 기타를 잡았다. 마치 이런 일을 예견했다는 듯이. 유진이 만들어 놓은 분위기를 그대로 이어가기 위해 남자도 몇 마디 멘트를 던졌다.
저도 학창시절 내내 기타와 함께 노래를 불렀습니다.
하지만 오늘 부를 노래가 최고라고 말하고 싶네요.
부르지도 않은 노래를 두고 최고라고 말하는 게 우습지만요.
전 확실히 말할 수 있습니다.
저 친구가 저한테 배웠다고 했는데 제가 배운 것도 많습니다.
음악이란 게, 오래 해왔다고 다 잘 하는 건 아니니까요.
그저 기타로, 음악으로 보낸 시간이 다른 것 뿐이죠.
말이 끝나기 무섭게 남자는 연주곡 한 곡을 연주했다. 손가락이 기타 줄 위를 미끄러지듯이 질주했다. 평소엔 보여주지 않았던 거침없고 파워풀한 모습이었다. 몇 마디의 전주가 이어지고 곧 손가락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엄청난 속주가 이어졌다. 순간 사람들 입에서 희미한 탄성이 쏟아져 나왔다.
록 밴드 '익스트림(Extreme)'의 '미드나잇 익스프레스(Midnight Express)‘는 록 기타의 천재이자 펑키 메탈이란 영역을 창조해낸 ‘누노 베텐코트(Nuno Bettencourt)’가 연주한 곡이었다. 포르투갈 출신기타리스트는 라틴음악이 품고 있는 흥겨운 리듬감을 그대로 하드록에 심어놓았다. 이 곡 역시 어깨를 들썩일 정도로 그루브가 충만했다. 남자는 원곡 보다 더 스피디하게 곡을 연주했다. 한 줄 한 줄을 칠 때는 손가락이 나비처럼 사뿐사뿐 줄 위에서 춤을 췄다. 중간중간 스트로크로 여섯 줄을 한꺼번에 내리 칠 때는 줄이 끊어질 정도로 강하게 쳤기에 유진은 혹시 기타 줄이 끊어지지나 않을까 두 손을 꼭 쥐기도 했다.
팽팽한 긴장감을 끝까지 유지하며 곡을 끝내자 경탄의 박수가 쏟아졌다. 연주소리를 들었는지 뒤에는 더 많은 사람들이 연주를 지켜보고 있었다.
이어 남자는 유진이 가장 좋아했던 ‘발라드 오브 빅 낫싱(Ballard of Big Nothing)’을 기타와 더불어 노래했다. 그리곤 유진이 그랬던 것처럼 멘트를 이었다.
저 친구가 이곳에 기타를 가져와 노래를 부르겠다고 했을 때
저도 꼭 들려주고 싶었던 곡이 있었습니다.
저나 이친구나 자주 만났던 시간이 일요일 오후였습니다.
저는 그때 너무나 행복했기에 늘 일요일은 오후만 있었던 걸로 기억됩니다.
그래서 저도 저 친구 몰래 이곡을 부르고 또 불렀지요.
남자는 잠시 고개를 숙이고 숨을 고르더니 좀 전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로 기타를 쳤다.
뭔가를 보여주겠다는 마음은 접고 본래 남자가 그러했듯이 자신의 내부 속으로 들어가려 했다. 음 하나하나를 섬세하게 연주하되 음과 음 사이에 충분한 여백을 두었다.
여전히 햇살은 따사로웠고 바람은 없었으며 공기는 안온했다. 일요일은 아니었지만 일요일만큼이나 고즈넉한 오후의 섬 전체가 남자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오후만 있던 일요일 눈을 뜨고 하늘을 보니
짙은 회색 구름이 나를 부르고 있네
생각없이 걷던 길 옆에 아이들이 놀고 있었고
나를 바라보던 강아지 이유없이 달아났네
나는 노란 풍선처럼 달아나고 싶었고
나는 작은 새처럼 날아가고 싶었네
작은 빗방울들이 아이들의 흥을 깨고
모이 쪼던 비둘기들 날아가 버렸네
달아났던 강아지 끙끙대며 집을 찾고
스며들던 어둠이 내 앞에 다가왔네
나는 어둠 속으로 들어가 한 없이 걸었고
나는 빗속으로 들어가 마냥 걷고 있었네
오후만 있던 일요일 예쁜 비가 왔네
오후만 있던 일요일 포근한 밤이 왔네
유진은 남자의 방에서 기타연습을 했던 어느 일요일 오후를 기억해냈다. 자신을 앞에 두고 벽에 기댄 채 눈을 감고 있었던 남자. 그는 자고 있던 게 아니었다. 유진은 갑자기 가슴 한 가운데로 뭔가가 밀려오는 것을 보았다.
노래가 끝나자 사람들의 다시 박수가 쏟아졌다. 둔탁하게 시작된 박수는 조금은 길게 이어져서 진짜 콘서트의 느낌이 들었다. 둘은 일어나 자신들 보다 연장자인 이국인들에게 감사의 뜻으로 허리를 굽혀 인사 했다. 관객들도 역시 허리를 굽혀 자신들 보다 젊은 이국인들에게 인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