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후로 자주 혜신과 수는 만났다.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자연스레 만났다. 만나면 주로 걸었다. 걷다가 가끔 테이크 아웃 커피나 편의점에서 파는 50퍼센트 할인된 아이스크림을 먹기도 했고 군것질을 하며 한참을 앉아있기도 했다.

 

처음엔 집 근처를 걷다가 나중엔 버스를 타고 서울까지 나갔다. 주로 혜신이 수를 끌고 다녔다. 지리에 어두운 수로서는 혜신이 놀랍기 그지없었다. 혜신은 지하철과 버스의 노선을 꿰고 있었다. 어디로 가자고 말하면 마치 공부라도 해둔 것처럼 가장 저렴하면서도 빨리 갈 수 있는 방법을 찾아냈다. 잘 빠진 외제차 옆 자리가 아니라면 밖에 나서지도 않을 것 같은 애가 저럴 수도 있겠구나. 그런 부조화가 수에겐 신선하게 다가 왔다.

 

가벼운 스니커즈를 신고 성큼성큼 걸어가는 혜신의 발걸음은 잘 훈련된 걷기 선수를 보는 것 같았다. 수가 부지런히 걷지 않으면 뒤쳐질 지경이었다.

 

“제작사를 나온 이후 처음엔 집에만 틀어박혀 있었어. 엄만 일 때문에 늘 집에 없었고 그렇다고 오빠가 있는 미국으로 갈 수도 없었어. 정말 어디로든 갈 수가 없었지. 일종의 대인 공포 같은 게 생긴 거야. 친구도 없었고 사회생활도 어떻게 해야 할 바를 몰랐지. 자살충동까지 생겼어. 정말 이젠 아무 필요도 없는 존재가 되어버렸다는 생각 때문에. 몇 년을 그러다 이대론 너무 억울하다 싶었지.”

 

“그래서 걷기 시작한 거야?”

 

“아니. 걷기는 그 다음이고. 처음에 한 건 대중교통 타기였어.”

 

혜신이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하려는 듯 벤치에 걸터앉았다.

 

“살아오면서 내가 부족했던 게 뭔가 곰곰이 생각해 봤지. 제일 먼저 떠오르는 건 어디든 혼자 갈 수가 없었던 거야. 어릴 때부터 엄마나 아빠가 데려다 주는 차로만 다녔지. 학교도 그랬고. 소속사에 들어가니 주구장창 스튜디오, 연습실, 숙소에만 있었고 어디론가 갈 땐 항상 매니저 차나 밴을 타고 다녔지. 그야말로 버스 하나 못타는 바보가 된 거지.

 

정말 기분이 더러울 땐 언젠지 알아? 가끔 매니저가 내가 살던 신도시로 직접 데려 준다고 하면서 잘 뚫린 도로는 놔두고 일부러 인적이 드믄 길로 가는 거야. 불빛도 없는 저수지 옆길 같은 곳. 거길 지나면서.......“

 

혜신이 뭔가 맺힌 듯 말을 멈췄다. 분명 그 과정에 무슨 일이 있었음이 분명했다. 하지만 수는 더 묻진 못했다.

 

“마치 날 이 근처에 버리고 가버릴 같은 기분이 들었지. 실제로 가끔이지만 그런 길에 차를 세우고 훈계한답시고 협박을 늘어놓기도 했지. 사실, 내색은 안했지만 엄청 무서웠어. 정말 스무 살이 넘어서 내발로 내 집을 찾아가는 것도 못하다니. 졸업식 날 너랑 걸어서 연습실까지 간 날. 기억나? 아마 내발로 걸어서 그렇게 멀리 갔던 건 그날이 처음이었을 거야. 그땐 무작정 걷기만 한 건데. 어떻게 가다 보니 연습실까지 가게 되더라.”

 

혜신이 자신의 스마트폰을 꺼내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정말 좋은 세상이야. 어디든 내가 가고 싶은 곳은 다 알려주잖아. 이거 하나만 믿고 밖으로 나갔어. 아무 곳으로든 떠난 뒤 스스로 집으로 찾아오는 거야. 어린애 같지. 하지만 처음 아주 멀리 나가봤어. 광역버스를 타고 지하철도 타고 다시 마을버스도 타고, 그렇게 밤이 늦어 집으로 돌아오는데, 다들 그렇게 하는 건데. 처음 그렇게 돌아와서 얼마나 기분이 좋았는지 몰라.”

 

혜신이 수를 보더니 무안한 듯 두 눈을 질근 감고는 혀를 쭉 내밀었다. 벤치에 앉은 둘 옆으로 기분 좋은 바람이 불어왔다. 혜신의 목에 감겨있던 스카프가 순간 크게 나풀거리며 수의 얼굴을 간지럽혔다.

수가 스카프를 쥐었다. 그러고 보니 스카프를 안 한 날이 없었던 것 같아. 수가 중얼거리자 혜신은 더 바짝 스카프를 목에 둘렀다.

 

“그 자식, 차만 타면 한 손은 핸들을 잡고 한 손으론 목을 쓰다듬는 거야.”

 

마치 상처 위에 대는 붕대처럼 스카프를 두르는 혜신을 보자 수는 울컥함을 느꼈다.

 

“도대체 어떤 인간이야. 한 번 보고 싶군.”

 

수는 순간 혜신을 어깨를 감싸주고 싶었다. 다시 일어난 혜신이 걷기 시작했다. 수는 그저 묵묵히 뒤를 따랐다.

둘은 한번 걷기 시작하면 두 시간 정도를 쉬지 않고 걸었다.

만나면 무조건 걷는 날이 더 많아졌다. 수는 정처 없는 걸음 속에서 지난날 기타를 연주하다 경험한 ‘플레잉 하이’와 비슷한 것을 느꼈다. 2시간 정도 지나고 몸에 땀이 돌고 힘이 빠져나가는 순간, 그때부터 걷는 자신만 남게 되고, 거기서 더 나아가면 걷는 자신을 또 다른 자신이 보는 것 같은 착각이 일었다.

 

그때부터 누군가가 자신에게 끊임없이 속삭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중 선명하던 한마디는 ‘괜찮다’였다. 뭐가 괜찮다는 건지. 늘 한 발 앞서 걷고 있는 혜신이 괜찮다는 건지 자신이 그렇다는 건지, 그건 그때나 지금이나 알 수가 없었다. 왜 그 소리는 힌트만 줄 뿐 하나의 생각으로 정리되지 않는 것일까?

 

머리를 땅바닥에 박고 걷다가 정신이 들면 나풀거리는 혜신의 스카프 자락을 확인하며 수는 걸었다. 걷는 면에선 혜신이 더 능숙했다. 남자를 뒤에 두고 걸으면서도 제법 시간의 단련을 거친 듯 거침이 없었다. 스카프 자락과 앙상한 종아리. 그런 뒷모습만 봐도 가슴이 뭉클했다. 그 뭉클함 이란 자신과 비슷한 이야기가 그녀에게도 있음에 느끼는 동질감이었다. 가끔 그녀가 고개를 돌려 그런 동질감이 가득한 두 눈으로 수를 쳐다볼 때 수는 자신도 모르게 자신을 보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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