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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혜신이 있다고 한 곳은 강남의 코엑스였다.

인사동을 거쳐 종로로, 안국동의 북촌을 지나 경복궁까지 자주 걸었던 혜신이 어쩐 일로 강남 한복판에, 그것도 빛 하나 들지 않는 코엑스에 있다는 건지. 수화기 너머의 혜신의 목소리는 숨이 차는 듯 느껴졌고 뭔가 쫓기는 듯 했다.

 

수는 코엑스에 있는 어느 패스트 패션 매장에서 옷을 고르고 있는 혜신을 보았다. 멀리서 바라본 그녀는 뭔가에 화가 난 듯 행거를 밀어젖히며 옷가지들을 함부로 뒤적이고 있었다. 어느 것 하나에 집중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수가 다가오자 혜신이 얼른 얼굴빛을 바꾸려했다. 여전히 불안한 눈빛이었다. 오늘은 무작정 쇼핑을 하고 싶다고 한 그녀는 매장을 나와 코엑스의 지하복도를 쉴 새 없이 누비며 돌아다녔다. 이것저것 닥치는 듯 옷들을 골라 담았다. 비슷한 컬러와 디자인임에도 두 벌씩 사기도 했고 같은 디자인이지만 컬러가 다르다는 이유로 두 벌씩 사기도 했다. 한창 쇼핑을 하던 혜신이 이번엔 1층에 있는 레스토랑으로 수를 끌고 갔다. 낮엔 맥주가 무한히 제공된다면서 밥도 먹지 않고 맥주를 들이켰다.

걱정스러운 눈으로 쳐다보는 수를 향해 혜신이 맥주를 들이키다 말고 수와 눈이 마주쳤다.

 

“가끔 이래, 뭐든 사고 싶어서 미쳐버리겠거든. 엄밀히 말해 사고 싶다기보다 뭔가를 사서 나에게 쥐어줘야 한다고나 할까.”

 

마치 자아가 둘로 분리된 듯 보였다. 그녀의 내부에서 떼쓰는 아이와 아이를 달래는 엄마의 실랑이가 벌어지고 있었다. 늘 떼쓰는 아이 쪽의 승리로 끝나는 것이 대부분일 것이다. 달래는 엄마의 상태는 지금 바닥까지 내려가 있음에 틀림없었다.

옷장에 옷이 산더미라도 입을 것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 여자였다. 그런 여자들의 심리가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은 물론이고 이제는 어느 정도 그런 심리를 이해할 수 있는 수준까지 되었다는 건 광고계에 감사할 만한 일이었다. 이것에 맞춰 저것을 사고, 저것을 사니 이것이 필요하다는 주장은 비난할 바가 아니었다. 다만 수의 눈에 걱정이 되는 것은 과잉쇼핑보다 쉴 새 없이 들이키고 있는 맥주가 더 문제였다.

 

“예전엔 말이야. 언젠가 쇼핑하고 목이 말라 미치겠더라고. 그래서 혼자 와서 맥주를 미친 듯이 마셨지. 오늘은 그래도 너라도 있으니 좀 살겠다.”

 

“뭔가 안 좋은 게 있구나. 그렇지?”

 

“지금까지 너한텐 긍정적인 면만 보여준 거야. 이번엔 이런 면도 있다는 걸, 그냥 보여주고 싶었어.”

 

혜신의 눈에 초점이 사라지고 있었다. 수 역시 사라져가는 초점 속으로 들어갈 마음은 없었다. 아프다는 거. 어떤 이유로 인해 아파서 견디지 못하는 것이 이런 건가. 의외로 수가 차분하게 혜신을 대하자 혜신도 차츰 안정을 찾았다. 그러더니 혜신이 테이블에 머리를 박고 졸기 시작했다. 한낮의 햇살이 레스토랑의 창으로 밀어닥쳤다. 차라리 처음부터 이렇게 지상 위에서 시간을 보냈으면 더 좋지 않았을까. 컴컴한 지하바닥을 왜 그렇게 헤매고 다녔을까. 창도 없고 먼지만 많은 의류매장의 침침한 조명이 생각나 수는 마음이 무거워졌다.


간신히 혜신을 깨워 코엑스 앞 벤치가 있는 곳까지 걸어 나왔다. 커다란 쇼핑백 여러 개를 한쪽 어깨에 걸치고 한 팔로 그녀의 팔을 붙잡고 걸었다.

비워진 곳을 맥주 따위로 채워야 할 문제가 아니었다. 반대로 가득 고인 것들을 토해내야 할 듯 싶었다. 언젠가 본 ‘러브레터’란 영화에서 여주인공이 외치던 ‘오갱기데스까’가 귀에 맴돌았다. 혜신에겐 그런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그때를 떠올리니 더 인상적이었던 건 사랑했지만 죽어버린 남자 주인공이 아니라 당시 여주인공의 남자 친구였다. 그저 뒤에서 묵묵히 바라봐 주던 남자였다. 수는 그 남자가 어떻게 생겼는지, 어떤 역할을 했는지 기억해내고 싶었지만 떠오르지 않았다.

 

“나, 부탁이 있어.”

 

정신을 잃었을 거라 생각했던 혜신이 고개를 들어 수의 눈을 보며 이야기했다.

 

둘은 이 주변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음이 분명했다.

해가 지기도 전에 이런 20층 특급호텔의 객실을 잡는 건 수로선 상상 해본 적이 없었다. 수가 쇼핑백들을 내려놓고 커튼을 걷어 도심 위로 펼쳐진 하늘을 보는 사이 혜신은 하얀 시트를 둘러쓰곤 얼굴을 벽 쪽으로 돌린 채 잠이 들었다. 오후만 되면 잠이 밀려온다는 건 알지만 꼭 이런 곳에서 잠을 청해야하는 건가.

 

수는 한동안 쥐죽은 듯 소파에 앉아 잠자코 밖을 쳐다보았다. 한바탕 소동을 끝나자 머릿속이 텅 빈 것처럼 고요해졌다. 밖은 서서히 빛을 잃어가고 있었다. 이대로 여기서 하룻밤을 보낼 것인가. 수는 잠시 머뭇거리다 잠이 깨면 도움이 될 만한 약을 사러가기로 했다. 어차피 자신이 없는 것이 숙면에 도움이 될 것이다.

 

가까운 약국에서 약을 산 뒤에도 발걸음은 어쩐지 쉽게 호텔로 되돌아가지 못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오늘의 일이 자꾸 마음에 걸렸다. 혜신을 생각하면 드는 약간은 시리고 아픈 이 감정은 도대체 뭘까? 혹시 이런 게 사랑일까? 이대로 차를 타고 집으로 향해버리고 싶은 마음과 그대로 방으로 올라가 그녀의 옆에 눕고 싶다는 욕망이 반반 나뉘어졌다.

 

수는 밤이 완전히 까맣게 내린 후에야 서성이던 발걸음을 혜신이 있던 방으로 돌렸다. 혜신은 여전히 고개를 옆으로 돌린 채 자고 있었다. 수는 천천히 침대 옆으로 발길을 옮기곤 약을 주머니에서 꺼내어 침대 옆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곤 한동안 그녀를 쳐다보며 침대 구석에 앉았다.

 

바로그때 수는 자신의 옷자락을 잡아당기는 손길을 느꼈다. 혜신은 자고 있지 않았다. 한동안 옷자락을 붙잡힌 채 수는 그녀의 다음 행동을 기다렸다.

 

“나 모델 생활하면서 이리 저리 참 많이도 돌아다녔어. 그땐 지방에 살던 때니까. 서울에 올라오면 호텔에서 자곤 했었어. 그때 엄마 사업이 한창 잘되었고 아빠가 할 일이 없을 때였지. 그래서 엄만 나를 아빠에게 맡겼어. 아빠가 일종의 매니저가 된 거지. 엄마가 짜놓은 스케줄대로 아빤 나를 데리고 촬영장을 다녔어. 아빤 내가 그런 일을 하는 게 못마땅했지만 내색을 안했어. 단지 걱정을 했었지. 촬영이 잘되는 지 잘 살펴보라던 엄마 말은 듣지 않고 그저 촬영장의 공기가 차가운지 먼지가 많지는 않은지. 밤샘으로 힘들어하지는 않은 지 그런 것만 걱정했지.

 

한번은 밤샘 촬영을 하고 호텔에 왔는데 무지 열이나고 아팠어. 새벽녘에 한참 잠이 들었다 깨어보니 아무도 없는 거야. 너무나 무서웠지. 그냥 내방도 무서웠는데 낯선 호텔방이라니. 근데 너무 아프고 무서운데도 아빠도 없는 거야. 혹시나 날 두고 떠난 건 아닐까하는 생각을 하다 깜박 잠이 들었지. 그런데 다시 눈을 떠보니 아빠가 내 옆에 약과 물을 놓고 있더라. 그 새벽에 어디서 약을 구해왔을까. 그때 부여잡았던 아빠의 옷자락. 그 서늘한 옷자락......“

 

혜신은 울고 있었다. 수는 그대로 꼼작하지 않은 채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자신의 옷자락에서 느끼고 있을 혜신의 마음을 투영해보았다. 한 여자의 남자가 된다는 건 반드시 애뜻한 사랑의 감정만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지금은 그녀의 곁에 없는 아버지를 대신해 아버지와 비슷한 존재가 되어보는 건 어떨까. 수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둘은 어느새 껴안고 있었다. 처음엔 수의 품에 혜신이 얼굴을 묻었고 수가 혜신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눈물을 닦아주자 수도 눈물이 핑 돌았다. 이번엔 혜신의 품에 수가 얼굴을 묻었고 혜신이 수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둘은 한동안 서로를 쳐다보다 낮은 소리로 웃었고 입을 맞추었다. 격정적인 키스가 있었고 한동안 서로를 안았다가 서로의 뺨과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정신을 차렸을 땐 혜신이 수의 품에 얼굴을 묻고 자고 있었다. 혜신은 깊은 잠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마른 혜신의 몸에서 깊은 잠의 기운이 스며왔다. 오랫동안 자는 것에 길들여진 몸이었다. 가끔씩 혜신의 몸이 약하게 경련을 일으켰다. 그럴 때 마다 수는 혜신의 팔이며 어깨를 잡아 주었다. 수는 혜신 옆에서 얕은 잠을 잤다. 아무래도 이렇게 높은 곳에선 푹 잘 수가 없었다. 그래도 혜신만큼은 행복한 잠을 자고 있을 거란 확신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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